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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ol K Mar 07. 2018

아쉬움과 설레임


  어디선가 웅장하게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직은 그 소리가 어디서 들려오는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불어오는 바람에 시원함이 묻어 있는 걸 보니 얼마 멀지 않은 곳인 건 확실했다. 가파른 절벽 위로 나 있는 좁은 길을 따라 걷고 있는데, 크게 굽어지는 길 중간에 하이커 세명이 앉아있는 게 보였다. '안 그래도 좁은 길에서 뭐 하고 있는 거지?' 넓은 길도 아닌, 좁은 길을 막은 듯 앉아서 쉬고 있는 하이커들을 보니 아무리 힘들어도 이건 아니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를 보고 해맑게 웃으며 소리 지르는 하이커들을 비켜 코너를 돌았는데 갑자기 눈 앞에 펼쳐진 장엄한 광경에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바로 눈 앞에서 족히 몇십 미터는 돼 보이는 거대한 물줄기가 웅장하고 시원한 소리를 내면서 절벽을 타고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떨어지는 물줄기 옆으로 껴있는 색 바랜 이끼의 모습에서 세월의 깊이를 알 수가 있었고, 오랜 시간 자리를 지켜온 장엄한 폭포의 모습을 해치지 않기 위해 절벽 중간에 터널을 뚫어 길을 이어주고 있었다. 'Eagle creek trail'의  유명한 '터널 폭포(Tunnel fall)'과 마주한 첫인상이었다.


 "너네 여기 앉아 이 폭포를 보고 있었던 거였어?"

 "멋지지 않아? 이 모습을 보고 어떻게 그냥 갈 수 있겠냐"


 그제야 뜬금없이 좁은 길 가운데 자리를 잡고 앉아있던 이 친구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오레곤 주와 워싱턴 주의 경계에 있는 'Cascade lock'에 위치한 'Eagle creek trail'은 수려한 폭포를 감상할 수 있는 트레일로 이미 오래전부터 여러 트레일 사이트의 베스트 하이킹 코스에 선정될 정도로 유명했지만, 직접 그 폭포들을 코앞에서 두 눈으로 보고 있자니 그 느낌이 남달랐다. 그 유명세 때문이었는지 이 곳에 오기 전부터 와일드맨이 'PCT Days'가 열리는 'Cascade lock'으로 갈 때는 꼭 정상 루트가 아닌 PCT의 대안 루트인 'Eagle creek trail'을 걸어야 한다고 노래를 불렀다. 왜 굳이 PCT도 아닌 대안 루트를 걷고 싶어 하는지 당시에는 와일드맨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지금 이 순간 장엄한 폭포 앞에 선 후에야 그 마음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백문이 불여일견. 만약 사진으로 이 모습을 먼저 봤다면, 아기자기하긴 해도 절경의 산세와 계곡이 아름다운 한국에서 자라온 내게는 그다지 매료될 만한 사이즈가 아니라 오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직접 마주한 터널 폭포의 모습은 상상 이상이었다. 물이 떨어지며 바위에 부딪혀 피어오른 물안개가 얼굴에 닿을 때는 그간의 고됨과 때를 한꺼번에 씻어 내리는 듯한 청아함을 느낄 수 있었다. 비 내리는 듯한 터널을 지날 때에는 그 신비함에 동심으로 돌아가 처음과 끝을 왔다 갔다 반복하며 장난을 치기도 했다. 예상치 못한 길에서 마주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맛보는 재미, 이 길에서 느낄 수 있는 또 하나의 묘미였다.  




< 웅장한 폭포의 시원함을 직접 느낄 수 있는 "Eagle creek trail" 우측 트레일에 서있는 하이커와 비교해 그 웅장함을 가늠할 수가 있다 >




 터널 폭포를 지나고 시간이 정오쯤 되니 트레일을 걷는 관광객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꼬질꼬질한 우리의 모습과는 달리, 말끔하고 알록달록한 색의 옷을 입은 가족단위 관광객들의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가벼운 옷차림의 관광객들이 많이 보인다는 것은 그만큼 문명에 가까워졌다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자연 속에서 매일 걷기만 하는 지금의 나에겐 지루하기만 했던 이전의 일상이 이제는 특별하게 느껴질 정도로 상황은 변해있었다. 예전에는 그런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기 위해 애쓰고 주어진 주말의 짧은 시간 동안 자연을 거닐며 재충전을 했는데, 자연을 거니는 게 일상이 되고 나니 아이러니하게도 지겹고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들이 이제는 너무 소중하게 느껴졌다. 뜨거운 물로 샤워 후에 마시는 맥주 한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서 TV를 보는 것, 옷을 입은 채로 침대에 쓰러져 그대로 잠드는 것 등 아무것도 아닌, 그저 벗어나고픈 지겨운 일상이었던 것들을 그토록 원하고 있는 지금의 내가 조금은 의아하기도 했지만, 그런 작은 일상들이 소중했다는 걸 느끼는 순간 '내가 정말 많은 것을 놓치고 살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삶을 이루는 모든 것들이 소중하다. 하지만 나는 그것들을 당연하게만 생각하고 그저 새로운 자극만을 원했다. 어쩌면 떠나기 전에도 이미 나는 행복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작지만 소중한 것을 하나 둘 놓치기 시작하고는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던 것인지도... 그토록 바라던 새로운 자극이 이젠 일상이 돼버린 지금, 전과는 다르게 매일매일이 즐거울 수 있었던 건 이 길에서 만나고 느끼고 작은 것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작은 것에서부터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여유. 그런 여유가 어쩌면 내가 찾던 행복일 수도...


 산길을 내려와 'Cascade lock'으로 이어지는 아스팔트 길을 걸었다. 중간에 길을 잘못 들어 수풀을 헤치고 작은 비탈을 기어 올라가기도 했지만, 얼마 걷지 않아 다시 길을 찾을 수 있어 안도감을 느꼈다. 숲길은 잘도 찾아가면서 잘 포장되어 있는 도로로만 나오면 허둥대는 게 이제는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세상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서 3,200km가 넘는 길을 걸었으니 포장된 도로가 어색한 게 당연했다. 큰 도로로 나와 강을 따라 먼저 도착해 식당에서 자리를 잡고 있는 와일드맨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오레곤 주와 워싱턴 주 사이를 흐르는 콜롬비아 강은 주 경계선의 역할을 하고 있었고, 그 강 위로 두 주를 이어주는 큰 다리가 하나 놓여 있었다. 바로 영화 'Wild'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왔던 '신들의 다리(Bridge of god)'였다. 영화 속에서 본 장소이기도 했고 오레곤 주가 끝나는 곳이기도 했기에 뭔가 느낌이 다를 줄 알았는데, 별 다른 감흥을 느낄 수는 없었다. 다리가 주는 특별함 보다는, '이제 워싱턴 주만 남았구나' 하는 느낌이 더 크게 다가왔다. 

 와일드맨은 다리가 잘 보이는 강변에 위치한 작은 식당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점심을 건너뛰어 배가 고팠지만 간단히 샐러드와 맥주로 요기만 하고는 여기서 멀지 않은 포틀랜드로 이동하기로 했다. 와일드맨의 고향이기도 한 포틀랜드에는 위키가 살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Sister'로 보급품을 찾으러 간 후 만나지 못했던 위키는 'Timberline lodge'에서 그의 엄마를 만나 포틀랜드로 향했다. 아쉽긴 하지만 아직 고등학생이었던 위키는 남은 학업 때문에 그곳을 마지막으로 PCT를 끝내기로 했고, 갑작스러운 헤어짐이 아쉬웠던 위키가 우리를 초대했기 때문에 오늘은 그의 집에서 파티를 할 예정이었다. 포틀랜드에 살고 있는 와일드맨의 여동생이 우리를 태우러 와 편하게 위키의 집으로 갈 수 있었고, 오랜만에 만난 피그 테일과 위키는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트레일에서 봤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른 피그 테일과 위키의 모습에 우리는 깜짝 놀랐기도 했다. 짧고 단정한 머리의 위키가 어색해 보였지만, 그 모습이 바로 위키의 본모습이었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위키의 가족들은 따뜻했다. 위키의 친누나인 벨라(Bella)도 거리낌 없이 우리와 금방 친해졌는데, 그녀는 남자가 되어 돌아온 동생을 매우 뿌듯해했다. 늘 어리게만 생각했던 동생이 무언가를 이뤄내 가며 조금씩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는 게 신기하면서도 자랑스럽다고. 그 말이 쑥스러웠는지 되려 장난으로 누나를 대하는 위키가 귀엽기도 했다. 따뜻한 위키네 가족들과 함께 한 시간은 너무 즐거웠다. 와인과 스테이크, 그리고 좋은 사람들. 이방인이 아닌 오랜 친구처럼 맞이 해 준 그들이 너무 고마웠고, 이제는 이런 분위기를 낯설어하지 않는 나 자신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 포틀랜드에 위치한 위키네 집에 머물며 모처럼의 휴식을 만끽하고 있다 >




 분위기에 취해 와인을 너무 많이 마셔서인지 아침에 일어나는데 머리가 깨질 듯 숙취가 느껴졌다. 와일드맨은 가족들이 있는 집으로 가기 위해 분주하게 서둘렀고, 별 다른 일이 없던 썬더버니와 42는 여전히 잠에서 깨어나질 않고 있었다. 나도 'PCT Days'를 위해 한국에서 오시는 제로그램의 이현상 대표님을 만나야 했기에 조금씩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다. 아직 시간의 여유가 있었기에 집으로 향하는 와일드맨을 배웅하고는 자고 있는 애들을 깨웠다. 향긋한 커피를 한잔 하고 나니 술이 조금 깨는 듯했다. 아침으로 도넛을 먹으며 벨라가 추천한 영화를 한편 보고 슬슬 시내로 나서기 위해 짐을 꾸렸다. 



 "대표님! 여기에요~!!"


 한국을 떠나기 전 뵙고 4개월여 만에 다시 만난 대표님은 나를 보자마자 연신 왜 이리 불쌍해졌냐며 웃기만 하셨다. 그럴 만도 한 게 체중은 14kg 정도가 빠졌고, 검게 그을려 더 말라보이는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불쌍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내가 안돼 보였는지 바로 차를 몰아 한인마트로 향하고는 한국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김치찌개와 제육볶음을 시켜 식사를 권하셨다. 오래간만에 맛보는 한국의 조미료 맛에 정신없이 게 눈 감추듯 밥 한 공기를 비우고는 그제야 그간의 안부를 여쭐 수가 있었다. 몇 시간 뒤 뵙게 된 이주영 선배님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어느덧 길의 마지막 구간만 남겨두고 있는 하이커의 모습을 한 내가 어색해 보이셨는지 웃기만 하셨다. 아마 어제 내가 위키를 다시 만났을 때의 느낌과 같았을까? 대표님과 선배님께는 지금의 내 모습이 더 어색해 보였을지도 모른다. 점심때 먹은 한식에 이어, 호텔에서 막걸리로 한껏 흥을 더했다. 거창한 안주는 없었지만, 좋은 분들과 오랜만에 함께하는 자리에서 그저 한잔의 술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풍족함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꼭 나 때문에 이 곳을 오신 게 아니었지만, 그래도 누군가가 나를 잊지 않고 찾아준다라는 것은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비록 가진 게 없고 또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내가 받은 이 과분한 사랑을 꼭 다른 이에게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무겁게 들었다. 희종이와 희남이도 함께 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이미 다른 지인과 함께 'Cascade lock'에서 자리를 잡았다고 해서 내일을 기대하기로 했다. 트레일에서는 처음 만나게 되는 거라 내심 이들은 또 어떻게 변해있을지, 그동안 어떻게 지냈을지가 궁금했다. 같은 길을 걸었다 해서 같은 것을 보고 느끼진 않았기에 그들이 걸었던 길과 내가 걸은 길을 함께 공유하고 싶었다.


 이윽고 한자리에서 만나게 된 한국인 하이커들. 올해가 한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이 PCT를 걸은 첫 해이기 때문에 의미가 남달랐다. 국내에서는 정보도 거의 없는 길을 무작정 시작한 우리였기에, 지금 이 곳에서 만났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대견스럽기도 했다. 내가 이런 말을 할 처지는 아니었지만, 축제가 열리는 공원에서 만난 이 둘은 하이커인 내가 보기에도 너무 불쌍해 보였다. 서로가 우스웠는지 제대로 얼굴을 쳐다보지 못했다. 얼굴만 봐도 웃음이 터져 나왔는데, 그 웃음 속에는 그동안 고생했다는 말없는 인사도 녹아져 있었다. 그놈이 그놈인데 서로 자기가 더 깨끗하다는 우리를 보다 못한 선배님들은 인근의 화로대로 이끌었고, 이 자리를 위해 준비해온 LA갈비와 푸짐한 음식들로 한바탕 잔치를 열었다. 웃음과 웃음이 끊이질 않았고, 서로 공유할 즐거움이 많았기에 이야기는 오랜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우리뿐 아니라 다른 하이커들도 이곳저곳에서 파티를 즐기고 있었고, 이미 공원 전체가 동네잔치가 열린 어느 시골 마을처럼 한껏 흥이 나 있었다. 오레곤 주와 워싱턴 주의 경계에 있는 어느 작은 시골마을, 그 안에서 한국의 정이 물씬 풍기는 밤은 그렇게 점점 깊어져 갔고 그렇게 또 하루가 저물어 간다.




< Cascade lock의 한 피자집에 모인 PCT 하이커들. 마지막을 향하는 아쉬움과 즐거움이 얼굴에 묻어난다. >




 오레곤 주를 떠나기가 아쉬웠던 걸까? PCT의 마지막 구간인 워싱턴 주로 떠나기 전, 우리는 ‘PCT Days’를 핑계 삼아 무려 사흘 밤을 이곳에서 보내게 되었다. 처음부터 그러려고 계획한 건 아니었지만,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또 아쉬움에 머물다 보니 어느덧 시간은 그렇게 흘러있었다. PCT라는 트레일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문화에 놀라기도 한 경험이었다. 그동안 긴 길을 걸었던 하이커들을 위해, 킥오프를 시작으로 PCT를 진행했던 하이커들이 평균적으로 이곳에 도착할 수 있는 기간에 맞춰 그들을 위한 축제를 열었던 것이다. 그것도 트레일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이커들과 어울려 함께 할 수 있는 자리를 말이다. 축제에 참여한 브랜드들은 그들의 상품을 홍보하는 목적보다는 하이커들이 마지막까지 종주하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필요한 장비를 보수 및 제공해주기도 했고, 하이커들이 즐길 수 있는 거리들을 준비해 즐거운 시간을 함께 했다. 이 길에서 동고동락한 하이커들이 서로의 경험과 추억을 공유하며 우정의 노래하고, 또 축제에 참여한 모두가 어우러져 이 길 위에 함께 있음을 즐길 수 있는 자리. 그리고 마지막까지 다시 길을 떠나는 하이커들을 축복해주는 모습을 보면서 진정으로 아웃도어를 즐기는 그들의 문화를 가까이서 느낄 수 있었다. 나라는 다르지만, 트레일을 사랑하는 한 하이커로써 가슴이 따뜻해졌다. 


 짧은 시간 함께 했던 정든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시 각자의 길을 걷기 위해 안녕을 고했다. 바라만 봤던 신들의 다리에 올라서 떠나온 곳을 돌아보니, 이제야 이 다리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아쉬움과 설레임.

 전혀 다른 느낌의 감정이지만, 이 두 감정은 서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이 다리를 마지막으로 현실로 돌아간 셰릴도, 그동안 자신을 치유해주었던 길을 떠난다는 아쉬움과 치유된 마음으로 새롭게 출발하는 인생에 대한 설레임을 함께 느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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