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건너온 다리를 태워버리겠어
올해 상반기에도 어김없이 새로운 앨범이 많이 나왔다. 그 중 역시 가장 인상적으로 들었던 앨범을 꼽으라면 르세라핌의 UNFORGIVEN일 것이다.
전작 안티프레자일보다 훨씬 메시지가 강력해진, 앨범명과 동명의 타이틀곡인 언포기븐도 나름대로 감각적이었지만(그러나 안티프레자일의 아성에 미치진 못하는), '오, 이 앨범 좀 괜찮네?'했던 지점은 트렌디하면서 흡입력 있게, 1번 트랙부터 13번 트랙까지 끝까지 다 듣게 만드는 앨범의 완성도였다. 항간에는 일본어가 여러 차례 등장하는 트랙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있지만, 일본인 멤버가 2명이나 있는 그룹 입장에선 어쩌면 현명한 선택이었으리라 짐작되는 대목이 있다. 7번 트랙 Burn the Bridge가 그렇고, 1번 트랙 The world is My Oyster 또한 그렇다.
세상에 절대 지지 않을, 깨질수록 단단해지는 르세라핌의 컨셉을 안다면 더욱 명확하게 이해가 될 내용이 바로 Burn the Bridge에 담겨 있다. '나에 대한 확신이 있다, 자신감'으로 시작되는 채원의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사쿠라의 일본어로 넘어가는 지점이 누구에게는 오타쿠스럽게 느껴질 수 있지만, 멤버 개인의 모국어 - 가장 잘할 수 있는 목소리 -로 자신의 이야기를 쌓아나가는 전략이 정말 영리하게 느껴진다. 내가 건너온 다리를 태워버릴 것이라는, 당참을 넘어 이전 세계와의 작별까지 감내할 것이라는 의지를 듣고 있노라면 9호선 급행 출근길에 찌끄러져 있는 나조차도 '아니?! 이 사람들을 뚫고 출근하는 내 자신 대단하잖아? 오늘 뭔가 해낼 것 같잖아?'란 느낌을 받고 마는 것이다. (심지어 7번 트랙, 앨범의 딱 중간에 위치한 것도 앨범의 전반부와 후반부를 연결하는 Bridge로 느껴지기도 한다.)
Burn the Bridge에 비해 The World Is My Oyster는 약간 무게감은 떨어지지만, ZARA 매장에서 나오면 딱일 것 같은 하우스 느낌을 잘 가져가 어디서든 인트로로 쓰기 딱 좋게끔 만들어졌다. 처음에 제목을 "세상은 내 굴"로 보고는 서양에선 굴이 귀하니 그만큼 중요하단 의미인가하며, 오이스터가 오렌지나 망고 같은 과일이었으면 "세상은 내 오렌지" "세상은 내 망고"는 좀 그럴듯해 보이는데?, 굴국밥 먹고 싶다, 굴전 먹고 싶다 온갖 굴 생각을 했더니 출근 역에 도착해버렸다. 출근이 이렇게 해롭다 해로워 -.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교통카드 빨리 찍으려고 줄을 우다다 서는 내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내 자신 대단하다는 자만심이 곧 쭈구리로 변해버리기에, 지하철을 나서 직장으로 걸어가는 3분 남짓 동안 다시 Burn the Bridge 트랙으로 돌아가 자신감과 쭈구리의 적절한 균형을 이루고 오늘의 하루를 상큼하게 시작한다.
(그 어느날 출근길 지하철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