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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달아 Nov 26. 2023

내가 2명이면 좋겠다

32개월 아들의 언어치료 상담을 권유받으며

  아주 오랜만에 챙겨보는 드라마가 생겼다. 바로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출근하자마자 언제나 그렇듯 기사를 읽다가 한 드라마 제작발표회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 중 단연 눈에 띄는 문구가 있었다. '... 일과 육아를 병행하느라 지친 워킹맘 ...'. 우울증이나 공황장애 등 정신질환을 다루는 드라마에서 워킹맘도 한 꼭지라고 했다. 그 순간 이 드라마를 보리라, 가벼운 결심이 섰다.




  워킹맘이 된 이후, 출산, 임신, 육아, 특히 워킹맘에 대한 콘텐츠를 지나칠 수 없다. 이제는 모든 게 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노벨경제학상 받은 교수가 한국의 저출산 문제를 여성이 육아를 맡아야 하는 편견이 부부간 공평성을 깨며 임금 차이를 만드는 등 바뀌지 않은 직장 문화에서 기인한다는 기사*, 30대 경력단절 여성이 줄어든 배경에는 30대 여성이 자녀를 낳지 않아 '경력단절' 자체가 없어졌다는 기사** 모두 나와 아주 큰 연관이 있다. 다만, 전자는 보통에서 조금 벗어나 있고, 후자는 후자(경력단절)처럼 되지 않으려고 고군분투한다는 면에서 차이가 있다.


  전자 이야기를 먼저 하자. 올해 이직을 하면서 누구나 그렇듯 연봉을 올렸다. 전 회사에서 나를 붙잡기 위해 제시한 연봉보다 지금 재직 중인 회사에서 제안한 연봉이 더 크니, 높아진 월급은 솔깃한 제안이었다. 게다가 육아휴직 중 취득한 업무 관련 자격증을 인정받아 자격증 수당도 매월 지급되는 조건이었다. 커진 상승폭만큼 금전적인 안정감은 당연지사였다.


  후자 이야기를 하자. 헤드헌터를 통해 받은 Job Description에 나열된 조건은, 경력단절과는 더욱 거리가 먼, '승진'이었다. 옮기게 된다면 나는 머지 않아 'part leader'로 업무를 하게 될 터였다. 만 35세, 조금 빠른게 아닌가 싶다가도 안될 거 뭐 있어?의 마음이었다. 어차피 전 회사에서 부장급 바로 밑에서 일한지 몇 년이었고, 내 밑에 10명이 넘는 친구들이 있었다. 원체 조심하기보단 도전하는 타입이라 그런지 더욱 흥미로웠다. 그 뒤에 어떤 일이 기다리는지는 모른채....


  여튼 전자든 후자든 결론은 이직. 이직을 했고, 그로부터 5개월이 지났다. 


  내가 이직을 하며 궁극적으로 되고 싶은 직업은 'Data Analyst'였다. 육휴 후 복직하며 데이터에 대한 관심이 직업적인 측면으로까지 옮겨갔고, 이 길을 택해야겠다는 오랜 생각을 하며 고르고 골라 이직한 회사였다. 데이터에 대한 마음이 어느정도냐면, 내 안에서 글쓰기에 대한 재능이 서서히 줄어드는 것을 느끼는 데도(왜? 쓰지 않으니까) 글쓰기보다는 데이터 생각을 했다. 눈 비비며 공부를 하고, 시험을 봐야겠다며 D-Day를 셌다. 


  파트장으로서 업무도 내 몫이었다. 새로운 곳에 적응도 하고 파트장으로서 데이터에 대한 중장기 비전도 세워야 하는데, 하필 그 와중에 반드시 규모를 늘려야 할 일이 생기고 말았다. 내가 담당해야 할 인력이 더 늘어나고, 독자적으로 해야 할 업무가 생겨났다. 갑자기, 갑자기, 갑자기 남들 앞에 서서 인력을 이야기하고, 작업물의 일정을 맞추고, 큰 자리에 나가 발표를 하고, 무엇보다 회사의 윗선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야만 했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윗선과 이야기를 할 때마다 너무나 화가 나서 무언가를 더 할 수가 없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날에는 재택근무를 하다가 점심시간에 달리기를 하러 나갔다. 그런 일이 9월, 10월, 11월, 세 달이 이어졌다. 신경은 신경대로 쓰고 스트레스는 다 받아가며 업무를 하고 집에 돌아오면 녹초였다. 11월은 그렇게 아기를 재우다 까무러치듯 잠이 들고, 일어나면 출근을 해야 하는 일상이었다.


  남편은 남편대로 지쳐있었다. 어린이집에 있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이고자 남편의 회사 가까이로 이사를 오면서 등하원 모두 남편의 몫이었다. 그러니까 등하원을 도맡아한지도 10개월째가 되어가고 있었다. 요 몇 주 퇴근 후 마주한 남편의 안색은 더욱 잿빛이었다. 얼굴 곳곳에 '나 힘들다'라고 새겨져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도 위로의 말을 찾지 못했다. 도리어 날 서 있는 채로 집안일 깨작하다 잠들고, 늦었다는 핑계로 출근길 집을 나서며 인사도 제대로 안해주니 그 모습을 본 아들은 울고불고 난리였다(고 했다). 그 울음을 어르고 달래가며 남편은 출근했다. 우리는 출근 후 2~3시간쯤 지나서야 "출근 잘 했어?" 메시지를 보냈다.



   

  어린이집에 오래 있는 아들에게 항상 미안함이 있었지만, 이런 일상이 엄마아빠에게만 힘든 게 아님을 느끼게 된 건, 아들의 표정이 언젠가부터 부쩍 어두워졌음을 깨닫게 된 때부터였다. 32개월 아기도 일상이 힘들고 피곤하고 마음에 안 들면 뒷모습부터 축쳐진다는 사실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아들에게 직접적으로 물어본 건 아니었지만, 엄마이기에 알 수 있었다. 


"...아들이가....우울해보여."

"..그런 것 같아."


  엄마아빠와 오랜 시간을 보내지 못해 울적했을 아들의 마음을 알기에, 이번 주말에는 타요키카에 가자며 아들에게 몇날 며칠 약속을 하곤, 또 바쁜 업무를 하다가 금요일 오후에 어린이집 학부모 상담을 하러 갔는데, 


"아들이 언어치료를 받아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언어치료요?"

"네, 또래에 비해 말이 너무 느려서..."


  아들이 말이 느리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유전이겠거니하며 크게 신경쓰지 않았는데 선생님께 권유를 받으니, 게다가 우울해하는 뒷모습을 마주한 요즘에 그런 말을 들으니 어린이집을 나서자마자 든 생각은 오직 하나 뿐이었다.


내가 2명이었으면.
한 명은 일하고 한 명은 아들 옆에 꼭 붙어있을텐데.


  그러나 요리조리 어떻게 생각은 해봐도 일은 계속 해야겠고(결국 나라는 사람의 자아를 위해서..) 나의 힘듦이 회사에 계속 붙어 있을 유인을 뛰어넘지 않는다면 퇴사할 생각도 없으니, 지금 상황에서 바꿀 수 있는 건 내가 스트레스를 덜 받고 일하는 것 뿐이라 이렇게 또 브런치까지 오게 된 것이다.



  타요키카는 그저 이벤트일 뿐. 타요키카에 다녀온 오늘, 자기 전 아들에게 또 묻는다. 매번 같은 답인줄 알면서.


"아들아, 엄마 회사 안갔으면 좋겠어?"

"응"

"아빠도 회사 안갔으면 좋겠어?"

"응"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코코코 눈- 코코코 입- 코코코 아들이!하며 웃겨주며 토닥토닥 재우는 것 밖에.


결혼기념일이라고 꽃다발도 준비한(?) 소중한 아들내미. 말이 늦는 게 뭐 대수니. 네가 있는데.


*기사 출처 : https://share.newming.io/YTxe

**기사 출처 : https://share.newming.io/4i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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