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남은 10개의 앨범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것 같은 추천 알고리즘에 몸을 맡기면 하루 종일 좋아하는 것들만 듣고 볼 수 있는 시대, 노동요와 BGM 플레이리스트에 머물지 않고 긴 호흡으로 이야기를 들려준 열 장의 국내 앨범들을 순위없이 다섯 개의 주제로 묶어봤습니다. 훌륭한 앨범들이 많았지만 올해 개인적으로 가장 많은 위로와 감동, 즐거움과 행복을 안겨준 음악들을 골랐습니다. (앨범 결산에서는 K-Pop을 한국 대중음악이라는 넓은 개념으로 접근했습니다)
김오키 – 스피릿 선발대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이 노동을 재정의하고 더 많은 부(副)를 창출한다는 세상이 왔지만, 전태일은 여전히 또 다른 이름으로 또 다른 곳에서 불타고 있는 21세기. 상관없을 것만 같은 내 일상은 평온해 보여도 한 발만 삐끗하면 ‘실직, 폐업, 이혼, 부채, 자살’로 가는 나락으로 떨어져 장례식장에서 영정사진으로 친구와 재회할 확률이 더 높은 ‘각자도생’의 시대. 하루하루 견디고 버텨내는 사람들에게 바람 빠진 소리를 내는 색소폰이 구슬프게 말을 건다. “그런데 당신, 살아있는 건 맞습니까?”
9와 숫자들 – 서울시 여러분
통근을 위해 서울과 경기도를 오가다 표지판을 보면 가끔은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장벽 앞에 선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언제든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지만 사실은 한 번 밀려나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곳. 사람들의 불안과 기대, 희망을 집어삼키며 끊임없이 증식하는 인프라, 그 인프라를 자양분 삼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부동산. '아파트를 사서 앉은자리에서 몇 억을 번 A'와 '건물주가 세를 올려 달라고 해서 장사를 접는다는 B'가 함께 살아가는 도시. 이곳에 사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11곡에 담아낸 단편소설집 같은 음악.
드레스(dress), 소금(Sogumm) – Not My Fault
드레스라는 이름은 리온(Leon)과 함께 만든 백현의 UN Village 크레딧에서 처음 알게 됐다. 둔탁하고 먹먹하게 찍은 베이스로 낯선 공간감을 만들어내는 사운드 메이킹이 인상적이어서 기억하고 있었는데, R&B 싱어 소금과 함께 합작 앨범을 내놨다. 소금의 보컬은 나른하고 퇴폐적인 톤으로 발음을 뭉개면서 노래하는데 개별 곡이 지닌 감정선들을 귀에 새기고 무드를 만드는 악기처럼 들린다. 고전과 전위를 넘나드는 샘플링 소스를 깔고 힙합과 일렉트로닉, R&B를 넘나들며 만들어낸 영화 같은 음악. 마치 포티스헤드(Portishead)의 Dummy 앨범을 다시 듣는 기분이 들었다.
기린(KIRIN) – YUNU IN THE HOUSE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돌아오던 뉴잭스윙이 이번에는 제법 큰 파도를 만들어 냈고 기린은 물때를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레이블 에잇볼타운(8Ball Town)을 통해 훌륭한 결과물을 연달아 내보냈다. 프로듀서 브론즈(Bronze)의 East Shore 앨범에서는 동료들과 함께 시티팝의 요소들을 불러와 재현해내고, 박재범과 3년 만에 다시 뭉쳐 내놓은 Baddest Nice Guys 앨범에서는 매끈하게 뽑은 뉴잭스윙 파티 트랙을 선보였다. 그리고 DJ YUNU와 함께 한 이 앨범에서는 K.W.S, Technotronic, Blackbox, 2 Unlimited, Clivilles+Cole이 흐르던 90년대 클럽의 하우스 비트를 가져와서 흥겨운 판을 벌이니 기력이 다해 누워 있던 사람도 벌떡 일어나 춤을 출 수밖에.
선우정아 - Serenade
5월에 나온 Stand와 8월에 나온 Stunning에 새로운 노래들이 붙어 완성된 Serenade. 개별적인 흐름과 구성을 가지고 있는 조각들이 하나로 합쳐져 완성된 앨범. 순서가 1-2-3이 아니라 3-1-2인 이유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보게 만든다. 뭔가를 견디고 버텨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참지만 말고 도망가도 되고 욕해도 된다고, 나와 다른 이를 이해하려 애쓰다가 망가지지 말라고, 사실은 이런 말을 하는 나도 너와 똑같은 약한 사람이라고, 그래도 누구나 안에는 빛나는 걸 가지고 있으니 찾아보자고 말을 건넨다. 시대와 장르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여 자신만의 우주로 재창조해내는 음악가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며 느끼는 경이로움.
레드벨벳(Red Velvet) – The Reve Festival Finale
‘페스티벌’을 테마로 각각 다른 콘셉트를 가지고 있는 첫째 날(Day 1)과 둘째 날(Day 2)이 지나고 찾아온 마지막 날(Finale). 새롭게 수록된 3곡 중에 Remember Forever를 들으면 놀이공원의 불이 꺼지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쓸쓸함이 마음 가득 차오른다. 하지만 역순으로 배치된 Day 2와 Day 1의 트랙들이 흐르기 시작하면 축제의 즐겁고 행복한 추억이 다시 떠오르고, 시작을 알렸던 ‘짐살라빔’이 마지막에 화려한 불꽃을 터뜨리면 ‘처음이 마지막, 그리고 다시 처음’이 되어 ‘끝나지 않는 축제’의 이야기가 완성된다. 콘셉트와 장르의 경계를 확장하고 표현의 깊이를 더하기 위해 도전을 멈추지 않는 이 팀 덕분에 올해도 너무 즐겁고 행복했다.
에몬(EMON) – 네가 없어질 세계
어쩌다 가수의 SNS를 팔로우하게 됐고 앨범이 나오기까지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5년 전에 낸 앨범의 스트리밍 저작권료는 단돈 몇 십만 원. 음악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기에 직장 생활과 창작 활동을 병행하느라 수면부족과 잔병에 시달리고, 버는 돈은 음악에다 쏟아붓는다고 제대로 옷 한 벌 사 입은 적 없지만, 음악만큼은 완벽주의자라 대충 때우지 않고 친구들과 함께 한 땀 한 땀 공들인 세션으로 녹음했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환멸, 어쩔 수 없는 세상에 대한 냉소를 딛고 피워낸 따뜻하고 아름다운 소리들로 사라진, 사라질 것들에 대해 담담하게 남겨놓은 기록이 마음을 울렸다.
So!YoON!(황소윤) - So!YoON!
새소년의 프런트우먼 황소윤에서 분리되어 또 다른 방향으로 확장하는 얼터 에고. 나잠수와 선우정아, 수민과 재키와이, 샘킴과 적재, 공중도둑과 모임별, 지금 음악계에서 한 가닥 하는 사람들이 참여한 탓에 앨범이 나왔던 당시에는 주도권을 상실한 과도기적 실험이라는 이야기가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나 황소윤이 참여한 게스트들을 모두 불러 작업 과정을 회고하는 Album Commentary: So!YoOn!(무려 2시간이 넘는다!)을 들으면, 이 22살의 뮤지션이 어떤 생각과 의도를 가지고 앨범을 만들었는지 희미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다. 머릿속에 떠올린 추상적인 개념을 다양한 협업자들과 조율하며 실제 음악으로 만들어가는 과정, 여기서 발생한 분열과 혼란, 불편함조차 어디로 튈지 모르는 긴장감과 펄떡거리는 에너지로 끌어들인 흥미로운 작품.
태연 – Purpose
이번 앨범은 개별 트랙의 완성도도 훌륭하지만 ‘Blue’와 ‘사계’를 포함해 12곡을 모두 들었을 때 완성되는 하나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부정과 원망, 위악과 일탈, 후회와 자책을 오롯이 감당해내야 ‘온 세상이 너’같았던 사랑에도 ‘정말 사랑했을까?’라는 냉소를 보낼 수 있다. 태연의 보컬은 사랑이 지나가고 마주해야 하는 복잡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타오르는 차가운 불꽃같다. 더 이상 극한의 고음이나 화려한 기교를 쓰지 않아도 듣는 사람의 감정을 순식간에 물들이고 마음에 파장을 일으키는 영역에 진입했다.
크러쉬(Crush) – Midnight To Sunrise
크림처럼 부드럽고 실크처럼 미끄러지는, R&B에 최적화된 목소리지만 왠지 소울의 깊이가 부족하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메가 히트곡을 내고 성공가도를 달릴 때도 취향과 맞지 않아 잘 듣지 않았는데 12월에 나온 앨범을 리스트에 넣은 이유는 편견이 산산조각 날 정도로 감동받았기 때문이다. 홍소진과 함께 매만진 따뜻하고 풍성한 밴드 사운드와 클래식한 소울/재즈 편곡 위로 한밤중부터 해가 뜰 때까지 잠들지 못하고 느끼는 감정들을 유려한 화음으로 아름답게 쌓아 올린다. 화려하고 반짝거리는 시간은 잠시일 뿐, 결국 어떻게 해서라도 혼자 감당해내야 하는 쓸쓸함과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