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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튼로프 Dec 29. 2020

2020년 연말 결산 (1)

마음에 남은 10곡의 노래들

올해 랜선 친구와 나눴던 이야기 중에 유독 기억에 남는 것이 있습니다.

"음악이 없었으면 진작 한강 다리로 달려갔을지도 모른다"

모두가 힘들었던 한 해,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 내놓은 아티스트들, 그걸 듣고 서로 공감하며 각자의 감상을 나누던 랜선 친구들 덕분에 마음을 다잡고 버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올해를 마무리하면서 즐겁게 들은 10곡의 노래에 대한 감사 인사를 남기려고 합니다. 순위는 없고 발매 순서로 정리했습니다. 


아무 노래 - 지코 (2020.01.13)

정작 올해 초 이 노래가 인기를 끌 때는 별 관심이 없다가 챌린지 유행도 사그라든 여름에 뒤늦게 빠졌다. 심플한 건반 루프로 시작해 악기들이 들어오고 노래가 전개되면서 보사노바와 라틴으로 리듬이 바뀌는데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구조와 가사에 맞춰 장치들이 걸려 있다. (블루투스를 켜면 시작되는 신나는 파티) 몸치도 따라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간단한 동작과 단숨에 각인되는 훅으로 이루어진 챌린지 덕도 봤지만 우울한 일상에서 작은 재미를 찾고 싶은 시대정신이 반영된 노래. 아무 생각 없이 만들고 아무 생각 없이 즐기면 될 것 같지만 사실은 모든 것이 정교하게 기획된 2020년 히트상품.

https://youtu.be/UuV2BmJ1p_I


눈누난나 - 시그니처 (2020.02.04)

방향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전개, 한 곡 안에서 속도와 패턴을 계속 바꾸는 리듬 파트, 뜬금없다 싶은데 한 번 맛들리면 중독되는 보컬 소스와 훅, 안 붙을 것 같은 여러 개의 테마들을 한 곡에 때려 넣었는데 매끈하게 바느질해서 이어 붙이는 솜씨, 레퍼런스들은 다방면으로 체크하지만 벤치마킹에만 그치는 영리함. 2020년 K-Pop 씬에서 가장 폼이 좋았던 국내 작곡가는 KZ & B.O 콤비라고 생각하는 이유. 귀로만 들으면 산만하고 정신없는 노래 같은데 무대에서 뻔뻔하고 당당하게 살려내는 멤버들의 퍼포먼스 수행력도 신인답지 않게 좋았다.

https://youtu.be/WM9DCnxXstI


레시피 - 스텔라 장 (2020.03.01)

엊그제 같은 90년대도 어느덧 30년 전. 90년대에 태어난 작곡가가 90년대 가요 스타일 노래를 90년대 보다 더 90년대스럽게 만드는 시대. 누군가에게는 경험해본 적 없는 시절에 대한 동경과 환상, 누군가에게는 이미 지나가버린 호시절에 대한 추억과 향수로 다가오는 노래들이 있다. 투박하고 촌스러운 드럼, 몽글몽글한 건반, 쫄깃하게 리듬을 튕기는 베이스, 화려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 브라스에 지금은 멸종되다시피 한 간주 기타 솔로가 더해진다. 모노트리 소속 작곡가 지하이와 손고은이 김현철을 모티프로 만들었다는데 정작 노래를 듣고 마로니에의 칵테일 사랑이 떠올랐다. 말맛을 살려내는 스텔라장의 보컬도 참 좋다.

https://youtu.be/WMunOu6NBr4


CANDY - 백현 (2020.05.25)

오래전에 뉴 에디션은 "My girls like candy 내 여자는 캔디 같아"라고 노래했지만 지금의 백현은 "Girl, I'm your candy 내가 너의 캔디"라고 노래한다. 어른스런 시나몬, 좀 웃기는 민트. 시대의 변화를 반영해 끈적하게 달라붙지 않고 산뜻하면서 아련한 잔향을 남기는 절제는 어디에서 올까. 비트 위에서 밀당하는 레이드백, 본능적인 박자감으로 만들어내는 그루브, 호흡을 자유자재로 조절해 가성과 진성을 오가며 쌓아 올리는 화음, 무심한 듯 시크하게 어필하지만 이미 네가 넘어올 거란 걸 알기 때문에 느긋하고 여유로운 태도. 음악과 가사, 스타일링과 퍼포먼스까지 자기가 뭘 잘하고 뭐가 잘 어울리는지 아는 영리함.

https://youtu.be/gmgcRWxhmqY


Monster - 레드벨벳 아이린 & 슬기 (2020.07.06)

인지도가 필요한 데뷔 초도 아니고 이미 훌륭한 디스코그래피를 갖추고 있는데 유닛이 나온다 해서 일말의 걱정이 있었는데 아무 쓸데없는 일이었다. 팀에서 가장 차가운 음색과 가장 낮은 음역대가 만나 완전체가 보여준 서늘하고 고혹적인 벨벳의 세계를 넘어 괴물이 배회하는 어둠 속까지 들어간다. SMP 중기 대표작인 '주문(Mirotic)'의 여성 버전이라 할 만큼 거칠고 세게 부르는 가창과 괴물을 형상화한 퍼포먼스의 조화가 굉장히 좋았다. 묘하게 닮아 있는 두 사람의 그림체가 One Indivisual, Two Shadows라는 콘셉트에 맞춰 환상적인 순간들을 만들어내는 '놀이'도 훌륭했지만 완전체와 차별화된 유닛이라는 도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해낸 점에서 Monster에 마음이 조금 더 갔다.

https://youtu.be/Ujb-gvqsoi0


운전만 해(We Ride) - 브레이브 걸스 (2020.08.14)

용감한 형제가 새로운 작곡가들과 함께 만든 여름 노래. 한 시대를 풍미했던 과거의 영광은 오래전에 저물었지만 가끔은 남아 있는 폐허 속에서 여전히 빛나는 것이 발견되기도 한다. 쨉쨉이 기타와 슬랩 베이스, 브라스까지 여름을 상징하는 모든 요소들이 흥겨운 리듬을 연주하는데 들으면 들을수록 쓸쓸해지는 이율배반적인 노래. 권태기가 찾아온 지 오래지만 먼저 헤어지자는 말은 꺼내기 싫어서 차일피일 미루며 말없이 함께 있는 연인. 숨 막히고 어색한 침묵 속에 그나마 남아 있는 한 줄기 미련마저 사그라드는 시간을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담아내는 메인보컬 민영과 다른 멤버들의 보컬 합도 훌륭했다. 3년 만의 컴백인데 다음 기회가 꼭 있었으면 하는 팀. 

https://youtu.be/4HjcypoChfQ


절대, 비밀 - 러블리즈 (2020.09.01) 

영롱한 빛을 내뿜으며 달리는 아르페지오 신스 위로 투명한 슬픔을 머금은 목소리들이 하나 둘 얹어지면 원피스와 서지음이 함께 쌓아 올렸던 잔혹한 짝사랑의 세계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다빈크가 혼자 만들었지만 데뷔곡 '어제처럼 굿나잇'의 전개와 정서가 닮았는데 시간이 흐른 만큼 멤버들 보컬도 더욱 깊어지고 표현도 정밀해졌다. 트렌드에 맞춰 새로운 스타일을 시도한 타이틀곡 '오블리비아테'도 좋았지만 여전히 윤상의 그늘에 사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이 곡에 마음이 간다. 너는 모른 채 혼자서 오롯이 감당해내야만 하는 짝사랑의 깊은 슬픔. 다른 누구도 아닌 러블리즈가 가장 잘하고 러블리즈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노래라서 몰입해 들었다.

https://youtu.be/xdVCxKWsMJw


LA DI DA - EVERGLOW(에버글로우) (2020.09.21)

팬데믹이 불러온 자가격리와 코로나 블루로 인한 반동일까.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디스코와 뉴웨이브 재해석이 미국과 한국 양쪽에서 어느 때보다 활발했던 한 해였다. 예전에는 본토의 유행이 시차를 두고 반영됐다면 빌보드를 직접 공략하는 요즘은 시차 없이 동기화가 일어난다는 느낌을 받았다. 위켄드의 Blinding Lights와 두아 리파의 Don't Start Now는 아마도 올해 케이팝에서 가장 많이 참고한 레퍼런스일 것이다. 그러나 위켄드나 두아 리파도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 아니다. 근본의 근본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취할 것을 취하고 자신들이 잘하는 것에 맞춰 변형했다는 점에서 올해 나온 디스코와 뉴웨이브 재해석본들 중에서 이 곡을 가장 즐겁게 들었다.

https://youtu.be/jeI992mvlEY


NCT U - FROM HOME (2020.10.12)

재즈와 클래식에 뿌리를 두고 있는 작곡가 밍지션과 R&B 가수로도 활동하는 JUNNY가 함께 만든 노래. 주 선율은 피아노가 끌고 가는 전통적인 R&B 발라드인데 뒤에 은은하게 깔려 있는 드럼 하이햇은 쪼개지다 못해 드르륵하고 갈려 나가는 트랩 사운드. 전통적인  요소와 첨단의 요소가 한 곡 안에서 멋지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NCT 2020 프로젝트는 구성을 바꿔 가며 다양한 조합으로 여러 곡들을 선보여도 브랜드 색깔은 유지되고 고성능을 내는 시스템이 완성됐음을 알리는 선언 같다. 하지만 정작 그중에서 가장 마음을 울린 건 무한 확장의 세계 속에서 분투하는 한, 중, 일 3국 청년들이 각자의 언어로 아름다운 화음을 쌓으며 돌아갈 곳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하는 이 곡이었다.

https://youtu.be/3p7s7Rjh4fg


OMEGA - SAAY (2020.10.20)

여름 즈음에 우연한 기회로 SAAY와 함께 작업하는 댄서 분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초면에 수줍어서 정말 좋아한다는 얘기를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가수가 활동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고민한다는 얘기를 듣고 마음이 좋지 않았다. 직접 곡과 가사를 쓰고 춤도 만들어 멋지게 추고, 심지어 외모까지 매력적인 재능의 총집합 같은 아티스트. 쉬지 않고 꾸준하게 좋은 곡들을 내고 안무팀과 함께 방송 활동까지 했지만 여전히 아는 사람만 아는 현실. 꾸준하게 내던 작업 속도가 떨어졌다 싶을 때쯤 EP가 나왔다. 대중과의 접점을 고민한다 했지만 여전히 타협하지 않고 몸쪽 꽉 채운 직구로 승부하는 곡들이 가득해서 듣다가 살짝 뭉클했다. 

https://youtu.be/WaCZO_ZbOz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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