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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튼로프 Dec 30. 2020

2020년 연말 결산 (2)

마음에 남은 10장의 앨범들

정규 앨범이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플레이리스트의 시대지만 일정한 볼륨을 가진 앨범 단위의 작업물을 통해 음악가가 전하고자 하는 어떤 흐름과 이야기를 희미하게나마 따라가 보는 과정은 여전히 즐겁습니다. 팬데믹의 시대에도 흥미와 함께 위로를 안겨준 10장의 앨범을 골라봤습니다. 순위는 없고 순서는 발매일 기준으로 정리했습니다.


아이즈원: BLOOM*IZ (2020.02.17)

어른들이 펼친 사기극 후폭풍으로 기약 없이 밀리다가 올해 나온 첫 번째 정규앨범. K-Pop은 음원-뮤비-퍼포먼스의 총합이라지만 특히나 이 팀은 퍼포먼스까지 모두 보고 나서야 비로소 좋다는 말을 할 수 있다. 음원 공개 후 처음 귀로 들었을 때 음역대가 겹치는 보컬들이 계속 나오니 귀가 피곤했고 외국 멤버들의 발음 한계 때문에 몰입이 깨져 아쉬움이 남았다. 그러나 뮤직비디오와 무대 퍼포먼스까지 보니 꽃을 피우는 '개화'와 활짝 피어난 '만개'로 이어지는 스토리텔링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다인원이 정교한 동선으로 펼치는 군무로 전하는 이야기. 귀로 들었을 때 느껴졌던 단점들이 눈으로 꽉 채워지는 재미. 꽃은 언젠가 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지만 만개한 지금의 아름다움을 좀 더 오래 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NCT 127: NCT #127 Neo Zone – The 2nd Album (2020.03.06)

SM 덕후들에게 공식처럼 전해 내려오는 얘기가 있다. 'SM은 두 번째 정규 앨범이 본편'이라고. 이 앨범이 나왔을 때 SNS 반응 중에서 공감했던 표현이 '흑당 마라'였다. 절대 같이 못 먹을 조합 같은데 먹음직스럽게 내놓는 맛집. 흑당에 해당하는 팝과 R&B, 마라에 해당하는 힙합과 일렉트로닉을 섞어 중독적이면서 세련된 맛을 만들어내는 노하우가 집약된 최신 판본. 그동안 이 팀 음악에서 따로 노는 것 같던 랩 버스(Verse)와 보컬 파트가 자연스럽게 연결되면서 설득력을 만드는 '영웅(Kick It)'도 좋았고, 멤버들의 개성 있는 보컬 레이어를 섬세하게 겹쳐놓은 '우산(Love Song)', '백야(White Night) 같은 R&B 곡들이 마음에 와 닿았다. 127, WAYV, DREAM, SUPERM, 2020까지 한 해동안 숨 가쁘게 달려온 NCT 월드의 시작에 이 앨범이 있다.


딥플로우: Founder (2020.04.13)

세상을 향해 바짝 세운 칼날을 들이댔던 '양화' 앨범 이후 5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동생들과 같이 음악 하던 '형님'은 많은 것을 챙기고 사람들을 책임져야 하는 '사장님'이 됐고 무엇보다 자신이 내뱉었던 말들을 다시 주워 담고 엄격하게 세웠던 기준을 무너뜨려야 하는 모순을 감당해야 했다. 사업자등록을 해서 레이블을 설립하고, 새로운 아티스트를 영입해 성과를 내고 손익분기점을 맞추고, 위기도 관리하고 부가세도 성실하게 납부하는 와중에 누군가의 아들이라는 역할까지 수행하면서 깨달은 성찰과 반성의 시간들이 앨범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리얼 밴드 세션으로 풍성하고 묵직하게 쌓은 사운드를 기반으로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펼쳐지는 허슬 라이프. 올해 국내 힙합에서 훌륭한 결과물이 많이 나왔지만 개인적으로 이 앨범이 베스트.


신해경: 속꿈, 속꿈 (2020.06.16)

퇴근하는 버스에서 멍하니 석양을 바라보며 듣다가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났다. 뭘 해도 닿을 수 없고 가질 수 없는 것들을 바라보다가 내 것이 아님을 깨닫고 꿈에서 깨어나는 슬프고 허망한 순간, 아름답고 황홀한 소음에 얹힌 가냘픈 목소리가 덤덤한 위로를 건넨다. 2017년에 <나의 가역반응> EP로 선보였던 놀라운 음악 세계를 더욱 확장하고 정립해서 내놓은 앨범. 드림팝, 슈게이징이라 불리는 사운드 위로 희미하게 풍기는 80년대 가요의 아련한 감성이 서로 이질감 없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골방에서 하나의 세상을 혼자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아티스트의 고독과 외로움이 마치 꿈결처럼 전해져서 들을 때마다 같이 외롭고 슬퍼지는 음악. 


악단광칠: 인생 꽃 같네 (2020.07.18)

올해는 그동안 꾸준하게 좋은 음악들이 나왔지만 상대적으로 빛을 보지 못했던 크로스오버 국악이 제대로 터진 한 해가 아니었나 싶다. 2017년 타이니 데스크 무대에 섰던 '씽씽' 멤버들 이희문, 추다혜, 장영규와 이철희가 모두 앨범을 냈다. 작년부터 슬슬 입질이 오던 이날치는 그야말로 날아올랐고 민속 무가와 블랙 뮤직을 결합한 추다혜차지스의 앨범도 훌륭했다. 국악이 전통에 갇히지 않고 새로운 흐름을 받아들여 동시대와 호흡하면서 '힙(Hip) 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일련의 흐름이 흥미로웠다. '멜로디와 리듬이 만들어내는 그루브'와 '가락과 장단이 만들어내는 신명' 사이에 존재하는 커다란 벽에 구멍을 내고 서로 통해서 흘러가도록 하는 다양한 시도들 중에서도 국악기만으로 황홀한 사이키델릭 사운드와 인생살이의 씁쓸함을 담아낸 악단광칠 앨범이 참 좋았다.


유키카: 서울여자 (2020.07.27)

사전을 찾아보면 세계의 원형이 이데아고 현실은 복제물이고 복제물의 복제물이 시뮬라크르라고 한다. 8말 9초에 일본에 존재했던 일련의 사조(그 조차도 복제된)가 '시티팝'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호명되어 복제를 거듭하다가 독립된 하나의 장르로 오독됐고, 이것도 저것도 시티팝으로 라벨링해 확산시키는 알고리즘을 타고 퍼져 나가는 시대. 일본에서 꿈을 찾아서 온 소녀가 한국어로 노래하는 시티팝이라는 기획은 마치 시뮬라크르에 남은 원형의 희미한 기억을 되살려보려는 시도처럼 느껴진다. 원형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참여해 공을 들인 작, 편곡과 꼼꼼한 스타일링으로 해상도 높은 결과물을 얻었지만 그 과정에서 가수는 실체 있는 사람이 아닌 가상의 게임 캐릭터처럼 소모됐고 프로젝트는 1회로 종료됐다는 점에서 미완의 아쉬움이 남는다. 


블랙핑크: The Album (2020.10.02)

'도대체 정규 앨범은 언제 나오는가?', '갈수록 곡들이 다 비슷하지 않나?'라는 클레임에 뒤늦게 도착한 애프터서비스. 8곡, 24분 분량이라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개별곡들을 통해 보여준 장점은 그대로 가져가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납득이 됐다. 테디와 YG 인하우스 프로듀서들이 확립해놓은 확고한 스타일에 해외 프로듀서들과 Selena Gomez, Cardi B 같은 빅 네임들이 참여해 본토의 팝 씬과 자연스러운 동기화를 이루어내는데, 한국 가수가 영어로 노래를 부르거나 유명 팝스타들과 콜라보할 때 느껴지는 묘한 위화감이 없어서 좋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에 박히는 직관적인 멜로디와 인상적인 드롭, 뽕끼가 살짝 남아있는 보컬 운용까지 YG와 투애니원의 유산은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것도 재미있다.


태민: Never Gonna Dance Again: Act 1 & 2 (2020.11.09)

12년 전에 '누난 너무 예뻐'라고 춤추며 노래하던 바가지 머리 소년은 속에 거대한 야심을 품고 있었고, 훌륭한 솔로 앨범들을 통해 장르의 경계, 젠더의 경계, 표현의 경계를 확장하면서 성장해왔다. '다시는 춤을 추지 않겠다'는 역설적인 제목을 달고 나온 이번 앨범은 일종의 커리어 중간 결산이자 자기 다짐 같다. 다양한 스타일을 선보이지만 한 편의 스릴러 같은 앨범을 만들고 싶었다는 의도대로 일관된 무드를 내는 ACT 1, 여전히 SM의 자산들을 활용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개인의 내밀한 자아를 드러내면서 사적인 무드를 내는 ACT 2까지 듣고 나니 아마도 다음 앨범 프로듀서 크레딧에는 스스로 이름을 올릴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10장을 추리며 마지막까지 고민했지만 좋았던 걸 결산하는데 최대한 솔직하자라는 마음이라 SM 앨범이 3장이나 들어갔다.


정미조: 바람 같은 날을 살다가 (2020.11.10)

'개여울'을 부른 옛날 가수라는 것만 알고 있었다. 검색해보니 '70년대에 활동하다가 은퇴해서 프랑스로 유학을 갔고 박사학위를 받았고 서양화가로 활동하다가 2016년 37년 만에 가수로 복귀해 앨범을 냈다'라고 나와 있었다. 딱히 들어야 할 이유가 없었지만 분위기나 체크해볼까 싶어 플레이했다가 그 자리에서 끝까지 다 듣고 연이어 들으면서 좀 울었던 것 같다. 그때 유독 힘들었나 싶어 연말에 다시 들어봐도 감동은 변하지 않는다. 인생을 아름답고 멋지게 살아온 어른이 마지막을 앞두고 지나온 세월을 반추하는데 쓸쓸한 회한, 잊지 못할 추억, 감사한 마음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간다. 70대라고 믿어지지 않는 유려한 목소리, 나이가 들어도 트로트에 포섭되지 못하는 어른들을 위한 어덜트 컨템퍼러리(Adult Contemporary) 음악. 


보아: BETTER – The 10th Album (2020.12.01)

데뷔 20주년이라고 하면 히트곡들을 모아 다시 편곡하거나 신곡 1-2곡을 넣은 패키지를 내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원래 8월에 나올 예정이었다 12월에 겨우 나온 20주년 앨범에는 이름값에 안주하지 않고 동시대와 호흡하면서 업데이트해 온 감각, 시간이 흘러 목소리를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게 된 연륜이 모두 녹아 있다. 타이틀곡 Better는 변화무쌍하게 움직이는 구조, 여전한 존재감을 과시하는 유영진의 강렬한 코러스까지 SM 음악의 인장들이 가득하지만 과잉과 허세를 빼고 절제된 매력을 선보인다. 소속 아티스트들의 세계관을 하나로 연결한다는 SMCU(SM Culture Universe), 원대한 만큼 무모해 보이는 계획에 그래도 일말의 기대감을 갖는 이유는 한 아티스트가 20년 동안 스스로를 몰아붙이며 도전해 쌓아 올린 위대한 유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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