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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튼로프 Apr 18. 2019

SM은 어디로 가고 있나

N년차 슴덕의 쓸데없는 걱정   

K-Pop의 First Mover

1996년 H.O.T 데뷔 이래 SM은 K-Pop의 First Mover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K-Pop이 본격적으로 산업화의 길을 걷게 된 과정을 'First Mover가 혁신적인 제품을 내놓으면 벤치마킹해서 유사품, 개선품을 내놓는 Fast Follower들의 경쟁'으로 봐도 될 것이다. 과도한 경쟁으로 시장이 포화 상태에 이르고 위기설이 돌 때면 SM은 해외 진출, 다인원/다국적 멤버 구성, 세계관/브랜드 스토리 구축 등 새로운 패러다임을 담은 차세대 그룹을 내놨다.


SM이 K-Pop의 First Mover가 될 수 있었던 두 개의 축은 자체 오디션과 캐스팅으로 우수한 인재들을 발굴해 트레이닝시키는 연습생 시스템, 국경의 장벽을 넘어 공동 창작으로 좋은 곡을 수집하는 송 캠프 시스템이었다. 지금은 웬만한 회사들도 다 하고 있지만, SM은 엔터 산업이 주먹구구식 감으로 돌아가던 시절부터 먼저 시도했고, 시스템과 매뉴얼을 정착시킨 덕분에 양질의 결과물을 지속적으로 뽑아낼 수 있는 일관성을 갖추게 됐다.


'이 중에 네 취향이 하나쯤은 있겠지'라는 농담으로 회자되는 광범위한 인재풀에서 추리고 추려낸 재능들은 외모와 실력을 갖추고 있었고, 해외에서 들여온 음악과 퍼포먼스에서는 자본의 향기가 풍겼다. 얄팍한 상술과 무신경한 프로모션, 의도적인 불친절함과 무리한 사업 확장 등을 욕하면서도 SM 콘텐츠를 소비해온 팬들은 자조적인 의미를 담아 스스로를 SM의 'ATM(현금 자동입출금기)'이라고 불렀다. '뭔가 이상한데 어쨌든 새로워 보이는 것'을 내놓으면 '긴가민가 하다가 어느 순간 설득되어 버리는 과정'을 통해 '슴덕(SM 덕후)'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제2의 전성기와 새로운 미래

2014년은 동방신기 데뷔 10주년이자 입대를 앞둔 마지막 국내 활동이 있었고, 소녀시대는 재계약을 했지만 완전체를 유지하지 못했다. 엑소는 정점을 찍었으나 중국 멤버들이 팀을 떠나면서 K/M 활동 시스템과 세계관에 손상을 입었다. 탈세로 세무조사를 받고 거액의 추징금을 내면서 대외적인 이미지는 추락했고, 팬덤을 멘붕 시켰던 열애까지 온갖 악재들이 쏟아지면서 우려를 자아냈다.


위기 속에서 맞이한 2015년, SM에서 한 해동안 내놓은 앨범들은 다음과 같다. 엑소의 Exodus+Love Me Right, 종현의 Base, 보아 Kiss My Lips, 샤이니의 Odd+Married to the Music, 소녀시대의 Lion Heart, 레드벨벳의 The Red, 태연의 I, f(x)의 4 Walls까지. 팬덤을 넘어 대중의 반응과 평단의 호평까지 이끌어낸 웰메이드 앨범들이 연속해서 쏟아져 나왔다. A&R 파트에서 뽑아낸 곡들은 타이틀곡부터 수록곡까지 버릴 것 없이 높은 완성도를 보여줬고, 비주얼 콘셉트와 프로모션은 유행을 앞서가는 예술적인 감각으로 번뜩였다. 더 보여줄게 남았을까 싶던 팀들은 새로운 경지를 보여줬고, 미래가 불확실해 보였던 팀들은 믿음을 안겨줬다. 개별 팬덤에서는 짧은 활동기간과 프로모션 물량 차이 때문에 빈정 상하는 일도 있었지만, 음악과 비주얼이라는 본질에 집중하면서 위기를 극복해냈다.


2016년 1월, New Culture Technology 2016 프레젠테이션에서 발표한 일련의 계획들은 다가올 미래에도 First Mover로 산업을 이끌어 나가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1년 52주 동안 음원을 발표하는 Station, EDM 레이블 설립, Vyrl과 루키즈 앱을 비롯한 일련의 모바일 기반 플랫폼들을 새롭게 론칭하고 사용자 참여를 유도하겠다는 전략은 원대해 보였다.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무한 개방, 무한 확장'을 내세운 새 그룹 NCT(Neo Culture Technology)였다. 오랜 숙원이었으나 계약 상황과 팬덤의 반발로 제대로 시도하지 못했던 '멤버 구성의 유동성'을 글로벌 브랜드 구축과 현지화로 풀겠다는 접근 방식은 신선했지만, 과연 실현 가능할까 의심도 들었다. 그러나 실체를 드러낸 NCT U의 '7번째 감각'을 보고 받았던 충격은 지금도 생생하다.


다 걷어내고 골조만 남긴 트랩 비트 위에 날 선 래핑과 나른한 보컬을 얹은 음악부터, 이국적인 취향을 넘어 무국적성과 근본 없음을 대놓고 드러내는 뮤직비디오를 보고, NCT의 개념은 '한 치의 오차 없이 완벽하게 기능을 수행하는 부품들을 다양하게 조합해서 매번 새로운 콘셉트의 제품을 만들어내는 브랜드'라고 이해했다. 사람을 부품으로 보는 관점이 비인간적으로 보일 수는 있어도, 물의로 인한 탈퇴나 계약 종료 등 외부 변수에 대응할 수 있고 끊임없이 새로운 인재들을 수혈할 수 있는 시스템의 등장. 이때만 해도 K-Pop은 다시 새로운 단계로 진입했으며, 그 중심에는 여전히 SM이 있을 줄만 알았다.


더 이상 1등이 아닌 시대

3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면 K-Pop은 엄청난 속도로 진화해 상상조차 한적 없던 영역에 도달했지만, 선두에 서 있는 회사는 SM이 아니다. 아직도 3대 기획사로 가장 먼저 호명되지만 시가총액 1위는 JYP 엔터테인먼트에 내줬고 빅히트 엔터테인먼트가 상장되면 3위로 떨어질지도 모른다. 보아, 동방신기, 슈퍼주니어, 소녀시대 등 한 시대를 상징했던 아이콘들은 여전히 훌륭한 음악을 하지만 화제성과 판매량이 예전 같지는 않다. 가장 큰 캐시카우였던 샤이니와 엑소는 멤버들의 군입대와 함께 당분간 완전체를 볼 수 없다. f(x)는 2015년 이후 활동이 없고 레드벨벳 혼자 분투하는 와중에 다른 회사들은 새로운 걸그룹을 속속 데뷔시키고 있지만 SM은 루머조차 들리지 않는다.


차세대 캐시카우로 다른 소속 가수 팬덤들의 불만을 살 정도로 총력을 기울여 푸시했던 NCT는 지금쯤 서울팀 127이 국내 Top을 찍고 해외팀까지 활동하고 있을 줄 알았지만, 현실은 공들여 만든 브랜드 콘셉트와 시스템이 흔들리고 있다. NCT라는 브랜드 아래 DREAM, 127, U를 성공적으로 담아내며 가능성을 보여줬던 NCT 2018 Empathy 이후 행보는 갈피를 잡을 수 없다. 팬덤의 규모나 대중 인지도가 Top Tier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서울팀 127이 일본과 미국 활동까지 병행하는 와중에 등장한 중국 현지팀 이름은 북경에 해당하는 116이 아니라 '웨이션 브이(WayV)'였다. '무한 개방, 무한 확장'을 내걸고 자유롭게 오가며 활동할 줄 알았던 멤버들은 127과 웨이션 브이로 고정되고 있으며, 지금 시점에서 DREAM이나 U의 미래는 알 수 없다. 유료 팬클럽도 NCT 브랜드가 아닌 127로 모집하고 127이 월드투어를 준비하는 상황에 팬들마저 어리둥절하고 있다.


어쩌면 지금이 진짜 위기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상황들이 심각해 보이는 이유는 단순히 실적이 부진해서가 아니다. SM 이성수 이사는 미국 SXSW 2019에서 "모든 대중에 맞추기보다 SM만의 색깔과 문화, 음악성을 갖추고 이를 좋아하는 팬덤을 중심으로 콘텐츠를 만든다"라고 얘기했다. 그러나 지금 SM의 방향성에 가장 의문을 가지고 있는 것은 핵심 소비자인 팬덤이다.


소속 아티스트들의 덩치가 커지면서 활동 기간은 짧아지고 공백기는 길어졌다. 심지어 앨범을 내고 활동하는 기간에도 즐길 거리인 '떡밥'이 적다. 음악방송이나 팬사인회, 콘서트도 중요하지만 유튜브와 'Vlive', '딩고' 같은 다양한 채널을 통해 '날 것' 감성의 콘텐츠를 수시로 제공하면서 팬들과 직접 소통하는 요즘 프로모션 트렌드랑 비교해보면 인색함이 드러난다. 굿즈도 아티움이나 콘서트장 같은 오프라인에서만 팔다가 올해 들어서야 온라인샵을 만들었고, 콘서트 선예매가 가능한 유료 팬클럽도 뒤늦게 정식으로 모집했지만 전용 앱의 인터페이스와 완성도가 너무 허접해서 실소를 자아낸다. 원래부터 팬들에게 친절한 회사는 아니었으니 그러려니 한다. 일일이 하나하나 화내기에는 팬들도 이제 나이를 꽤 먹었다.


슴덕에게 제일 재미있고 짜릿한 순간이 언제냐고 물으면, 티저 이미지와 비디오를 보면서 일명 '궁예질'로 콘셉트를 유추하고 기대감에 차올라 음원과 뮤직비디오 공개를 손꼽아 기다리는 시간이라고 할 것이다. 이 즐거움은 차별화된 콘셉트와 미감을 만들어냈던 민희진  아트디렉터와 아티스트에게 어울리는 좋은 곡들을 수집한 A&R 팀의 역할이 컸다. 그러나 민희진 이사가 회사를 떠나고 김세준 스타일리스트가 비주얼 디렉터를 맡은 일련의 앨범들 비주얼 콘셉트에는 고급스러움만 남아 있고 특유의 Hip과 Edge가 빠져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동안 SM은 한 번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면 당장 통하지 않더라도 뚝심 있게 밀어붙여 어떻게든 성공시켜왔다. 그러나 해외를 중심으로 K-Pop에 새롭게 유입되고 있는 팬들은 SM의 유산과 영향으로부터 자유롭다. 이들은 전반적으로 상향 평준화된 음악과 퍼포먼스 속에서 SM만의 차별화된 요소가 없다고 느낀다. 어쩌다 보니 슴덕이 됐고 애증이 교차하는 복잡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지만,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진짜 위기라는 생각이 든다. '1등이 아니라는 아쉬움' 보다 더 이상 '새로워 보이는 것을 만나지 못할 수 있다는 불안'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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