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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동 Jan 23. 2023

Nothing Matters, 그러나.

삶 #13-1.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

1. 삶의 혼돈에 대하여.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2022년도에 읽은 책 중 가장 나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책이다. 누군가는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경험이라는 말도 한다. 그러니,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책을 읽어볼 것을 권유하고 싶지만, 하고 싶은 얘기는 많아도 그만큼 책의 모든 내용을 이 글에서 다 훑고 싶진 않다. 그것이 불가능할만큼 다채로운 책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인물에 대한 평전이자, 룰루 밀러라는 저자 본인의 삶에 대한 에세이이자, 분류학이라는 한 자연과학의 분야에 대한 교양서적이자, 누군가에 대한 러브레터이기도 하다고 이 책을 정의하기도 했다. 그만큼 하나의 문장으로 명확히 정의하기 힘든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주제를 표현하자면, 혼돈으로 가득한 우주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인생의 의미가 뭐예요?"... 마치 내가 살아오는 내내, 그 질문을 할 순간만을 열렬히 기다려왔다는 듯 아버지는 내게 인생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고 통보했다. "의미는 없어. 신도 없어. 어떤 식으로든 너를 지켜보거나 보살펴주는 신적인 존재는 없어. 내세도, 운명도, 어떤 계획도 없어. 그리고 그런 게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믿지 마라. 그런 것들은 모두 사람들이 이 모든 게 아무 의미도 없고 자신도 의미가 없다는 무시무시한 감정에 맞서 자신을 달래기 위해 상상해낸 것일 뿐이니까. 진실은 이 모든 것도, 너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란다."

 

저자 룰루 밀러는 삶에서 실패하고 무너지는 순간마다 삶에는 아무런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아버지가 알려준 냉엄한 진실을 떠올리곤 했다. 지금까지 살아온 의미가 모두 무너졌을 때마다, 자신의 삶에 주어지는 고통과 마주할 때마다 절망과 무기력에 빠지곤 했다.  그리고 어느 날,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한 분류학자, 즉 거대한 생명의 나무의 형태를 밝혀냄으로써 지구의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는 일에 평생을 바친 과학자에 대해 알게 된다. 그의 전문 분야는 어류였고, 평생을 새로운 종을 찾아 전 지구를 항해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는 수십 년에 걸쳐 지치지 않고 일해, 당대 인류에게 알려진 어류 중 5분의 1이 그와 그의 제자가 이름 붙인 것들이었다. 그러나 1906년 어느 날, 미국 서부에 닥친 대지진으로 그는 지금까지 그가 수집하고 이름 붙여둔 표본들이 모두 박살이 난다. 수천 개의 유리단지가 바닥에 떨어져 깨치고, 귀중한 어류 표본들이 파괴되었다. 그렇게 유리단지에 넣어둔 어류의 이름표들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면서, 그가 이름 붙여 생명의 나무 아래의 질서로 편입한 물고기 수천 마리가 다시 혼돈 속 미지의 존재로 돌아갔다. 하지만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자신의 평생이 무의미해진 그 순간에, 그 지진이 전하는 명백한 메시지, 즉 혼돈이 지배하는 이 세계에서 질서를 세우려는 모든 시도는 결국 실패할 운명이라는 메시지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바늘을 집어 들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물고기의 꼬리에 이름표를 꿰매 붙이기 시작했다. 다시 지진과 같은 혼돈이 찾아오더라도 지지 않겠다는 삶의 의지처럼. 룰루 밀러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삶으로부터 마침내 자신이 평생 실패해왔지만 갈망하던 것, 혼돈의 해독제를 찾을 수 있지 않을지 궁금했다. 온 바다에 가득한 무의미와 혼돈에 이름을 붙이는 것. 바다를 가득 채울 수많은 물고기들을 만드는 것이 혼돈의 해독제일까.



2. Nothing Matters.


잠깐 이야기를 틀어서, 내게 있어 2022년의 올해의 영화인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이하 에에올)에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올린 검은 거대한 베이글을 보고 조부 투바키가 깨달은 것은, Nothing Matters였다. 수많은 다중우주를 관찰하고 자신의 모든 가능성을 실현해본, 마치 신과 같은 조부 투바키가 본 것은, 온 우주에 내가 동시에 존재할 수 있고 내가 원하는 것은 전부 될 수 있다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고민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살아가며 수많은 삶의 기로와 가능성에 마주한다. 하지만 그 선택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사전적으로는 알 수 없다. 나는 이 선택을 후회할까? 그리고 에에올의 다중우주론적 세계관에서 내가 A라는 선택과 B라는 선택의 기로에 직면하는 순간, 우주는 둘로 쪼개지고 A를 선택한 나와 B를 선택한 나는 각각의 우주에 살게 된다. 영화 속 에블린의 삶은 그 수많은 가능성 중 최악이다. 에블린이 경험한 다른 가능성의 우주에는 새끼손가락으로 사람을 튕겨버리는 쿵푸 고수로서의 에블린도 있고, 최고의 영화 스타가 되어 화려한 삶을 살고 있는 에블린도 있다. 하지만 지금의 나, 에블린은 운영하고 있는 세탁소는 망하기 직전이고, 정신없는 와중에 세무조사로 골이 깨지도록 아픈데, 남편 웨이먼드는 불필요한 장난만 치지 아무런 도움도 안된다. 딸인 조이는 그 와중에 여자를 데려와서는 사랑한다고 한다. 단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선택의 기로에서 가능한 최악의 선택만을 하여, 존재할 수 있는 최악의 우주에서 에블린은 살고 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조부 투바키가 보여준 자신의 삶의 다른 가능성들을 모두 경험한 에블린은 우주를 지배하고 있는 혼돈에 마주한다. 내가 운영하고 있는 세탁소가 망할 지경이든, 세무조사로 위기에 처하든, 살기에만 바빠 남편과의 사이가 틀어졌든 다 부질없다. 내가 이 우주에서 아무리 함부로 굴어도. 저 너머 다른 우주에서의 삶에는 어떤 영향도 없다. 그렇다면, 내가 뭐하러 열심히 살아? 무슨 의미가 있어? 모든 곳에, 모든 것으로서,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면 허무와 공허에 잡아먹힐 것이다. Nothing Matters.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무의미의 파도이다.


하지만 그러한 혼돈에서 에블린을 구한 것은, 남편 웨이먼드의 Be kind라는 말이었다. “Please, be kind. Especially when we don’t know what’s going on.” 다정하라, 특히 우리가 혼돈에 잡아먹혔을 때는. 최고의 영화배우로서 살아가고 있는 에블린의 우주에서, 성공한 사업가가 된 웨이먼드는 에블린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게 다른 삶이 있다면, 당신과 세탁소를 운영하고 세금도 내면서 살고 싶다." 존재하는 최악의 우주에 사는 웨이먼드의 삶을, 어쩌면 전 우주에서 가장 멋진 우주에서 최고의 가능성을 실현하며 살아가고 있는 웨이먼드는 평생 부러워하며 살아간다. 반면 손가락이 핫도그인 어떤 우주에서는, 에블린은 죽을 듯 싸웠던 국세청 직원인 디어드리와 사랑에 빠진다. 손가락이 모두 핫도그로 변해서, 깨물면 케찹이 나오는 끔찍한 우주에서도 좋은 부분은 있다. 발을 아주 잘 쓰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발가락으로 피아노를 칠 수 있을 만큼. 삶이 최악이라고 느껴질 때에도, 사랑할 수 있는 부분은 분명히 있다. 결국, 우리의 이 우주와 이를 구성하고 있는 혼돈에 대한 이해는 너무나 불완전하다. 온전히 이해하기엔 우주는 모순으로 가득하다. 그러니 실패한 삶이라는 것도 없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다정하라.  


3. 삶에 대한 시선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와, 에에올은 결국 책과 영화라는 다른 포맷으로 같은 이야기를 하고자 했던 것이라 생각한다. 혼돈의 해독제는,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겸허함이다. 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물고기들에 이름을 붙인다. 우리가 경험하는 어떤 사건과 사람들을 어떠한 범주에 끼워맞추고 분류한다. 우리가 보는 것이 무엇인지 해석하고, 누군가의 호불호를 판단한다. 이는 우리가 마주한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들은 아무런 중력 없이 흩어질 것이다. 김춘수의 시의 유명한 구절이 있지 않은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가 무언가에 이름을 붙이기 전에는, 그저 우주에 떠다니는 아무 이름 없는 먼지에 불과하다. 사람이든, 경험이든, 감정이든. 하지만 그 이름, 우리가 그 대상에 대해 범주화하고 정의한 것은 그 대상의 본질을 모조한 것에 불과하다.


최근 생물학계에서 밝혀진 사실은, 물고기라는 범주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학적으로 포유류라는 범주는 새끼에게 젖을 먹인다는 공통적이고 핵심적인 특징이 존재한다. 파충류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어류의 경우에는 물에 살고 비늘이 있다는 것 이외에는 공통점이 없다. 예를 들어, 소와 폐어 중에 연어와 더 가까운 생물은 무엇일까? 우리의 직관은 당연히 폐어와 연어가 가장 가깝다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직관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지만, 생물학적으로는 소와 폐어가 훨씬 가깝다. 폐어와 소는 허파와 같이 호흡을 하게 해주는 기관이 있다. 하지만 연어에겐 그것이 없다. 폐어의 심장 구조는 연어의 심장 구조보다 소의 심장 구조에 훨씬 가깝다. 또한, 폐어와 소는 모두 후두개라는 기관이 존재하지만 연어는 그렇지 않다. 어류에게는 생물학적, 진화학적으로 공통된 특징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어류라는건 겉으로는 비슷해보이지만 그 본질은 너무나도 다른 여러 생물들을 인간이 자신의 직관에 따라 억지로 묶어둔 범주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세상을 해석하고 분류하는 시야는 얼마나 편협하고 불완전한가?


누군가는 민들레가 잡초에 불과한 별 가치 없는 생물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약초 채집가에게는 민들레가 약재가 되고, 벌에게는 짝짓기를 하는 침대, 화가에게는 염료, 나비에게는 생명을 유지하는 수단이 된다. 그러니 잡초, 약재, 침대, 염료라는 민들레의 여러 이름, 범주, 관념은 무한히 많은 관점 중 단 하나의 관점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다윈이 독자들에게 그토록 열심히 인식시키고자 애썼던 관점이다. 자연에서 생물의 지위를 매기는 단 하나의 방법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좋은 과학이 할 일은 우리가 자연에 "편리하게" 그어놓은 선들 너머를 보려고 노력하는 것, 당신이 응시하는 모든 생물에게는 당신이 결코 이해하지 못할 복잡성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우리 발밑의 가장 단순한 것들조차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우리는 전에도 틀렸고, 앞으로도 틀리리라는 것. 진보로 나아가는 진정한 길은 확실성이 아니라 회의로, 수정 가능성이 열려 있는 회의로 닦인다는 것... "삶에 대한 이런 시선에는 어떤 장엄함이 깃들어 있다."


우리의 삶 역시 마찬가지다. 무한한 우주의 관점에서는 우리의 삶은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우리는 금세 사라질 점 위의 점 위의 점일 뿐이다. 우리의 삶이 불행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무한히 많은 관점 중 단 하나의 관점일 뿐이다. 우리가 틀렸을 수 있다. 삶에 대한 이러한 시선에는 어떤 장엄함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희망에 대한 처방이 숨겨져 있다. 우리의 삶에 찾아온 불행이 어떤 의미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마치 손가락이 핫도그인 우주조차 어딘가에 존재할 수 있고, 그 우주에도 좋은 부분이 있는 것처럼. 절망, 불행, 고통, 우울조차 하나의 관점, 물고기에 불과하다. 최악의 우주에 사는 한심한 웨이먼드의 삶이 가장 멋진 우주에서 최고의 가능성을 실현하며 살아가고 있는 웨이먼드에게는 꿈과 같은 것일 수 있는 것처럼. 자연에서 생물의 지위를 매기는 단 하나의 방법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듯이, 우리의 삶을 해석하는 단 하나의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범주란 잘 봐주면 하나의 대용물이고 최악일 때는 족쇄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사회가 우리의 삶에 이름을 새긴 범주들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관념이 나를 옭아매지 못하게 해야 한다. 절망과 우울의 뒤에는 무엇이 있을지 우리는 모른다. 인간의 상상력과 범주화의 능력은 처참할 정도로 한심하다는 인정은 우주의 혼돈에 대한 겸허함과 그 뒤에는 무엇이 올지 모른다는 기대감을 갖게 한다. 우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것이 희망에 대한 처방, 혼돈의 해독제이다.



4. 나에 대한 정확한 이해


다른 한편으로는, 나는 내가 어떤 사람으로 보였으면 좋겠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하는 자기상이 강하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내가 어떤 사람으로 보였으면 좋겠다는 건 나 스스로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은 나에게 고통을 준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내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고 싶다. 나는 행복한 사람이고 싶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싶다. 마음이 단단한 사람이고 싶다. 회사에서는, 나는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이다. 나는 성실한 사람이다. 그런데 가끔은 이런 내가 가진 관념, 다른 말로는 물고기들이 나를 옭아매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이런 관념들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모습을 내가 보여주면 나는 겁을 먹고, 마음이 불편해진다. 회사에서 무언가 실수를 하면 나 바본가? 하는 자괴감이 든다. 스스로 일이 잘 안되고 나태한 모습을 보이면 이러고 있어도 될까 불안하다. 작은 것에 화가 나면 그만큼 더 괴롭다. 나는 내 마음을 잘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물고기 때문에.


누구나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싶다는 욕심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누적되어 가치관을 구성한다. 행복, 똑똑, 성실, 다정, 이런 물고기들이 나를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 내가 어떤 사람이고 싶은지의 방향성을 나타내는 것이니까, 나에 대한 해석과 바램이 부재하면 자신이 하는 행동에 아무런 책임도 지지 못하고, 어떤 행복도 느낄 수 없이 모든 무게를 잃고 부유할 것이다. 하지만 나의 물고기가 가치관이 아닌 스스로에 대한 편견, 키치가 되어 나를 괴롭힌다면 이건 좀 다른 문제다. 이런 물고기들, 나에 대한 관념들이 가끔은 나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가로막을 때가 있다. 그러니 어떤 순간에는 그것이 나를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는다. 결국 문제는 나의 모순된 모습을 마주했을 때 나에 대해 기존에 세운 관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느냐는 것이다.



5.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주를 지배하는 혼돈을 마주하여 잘 살아가기 위한 처방은, 내가 세운 관점은 언제나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에 불과하고, 언제나 수정가능한 것이라는 자유로운 마음이다. 그러니 불행과 고통도 내가 이름 붙인 물고기일 수 있다는, 그 뒤에는 좋은 것이 온다는 희망이다. 나아가 나는 스스로에 대한 실망으로부터도 자유롭고 싶다. 그 실망이라는 것 역시 나에 대한 범주화의 오차에서 오는 것이다. 나는 이런 사람인데,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나는 내게 세운 물고기들로부터 자유롭고 싶다. 인간에겐 상반된 모습이 가득하고, 나 역시 나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다. 남들에 대해서만 고정관념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나에게 편견을 가질 수도 있다.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세운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 물고기가 스스로를 괴롭힐 수 있다. 스스로를 짓는 자유를 포기하고 그대로 멈춰설 수도 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내가 나에 대해 정의한 말들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는 순간이 있다.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정의한 물고기, 가치관 또는 고정관념은 나의 본질을 모조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를 해석할 수 있는 무한히 많은 관점들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러니, 실망의 순간에 나에게 다정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마음을 다시 들여다보자는 말을 스스로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다.


어느 날 내 맘 속 모순을 발견한다면, 옳다고 생각한 길이 있다면, 내게 솔직할 수 있다면 그 물고기를 벗어던지고 다시 길을 찾아 다시 나아가고 싶다. 온전한 나의 이해라는 단 하나의 물고기를 찾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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