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 달라지는 것들
나는 삼십 년을 조직에서 생활하였으므로 조직의 보호를 당연하게 여기며 살았다
주위에는 항상 조력자가 있었으므로 일상적인 일은 당연히 그일 만을 담당하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며 살았다
그러나 은퇴 이후로 혼자만의 힘으로 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였지만 생각처럼 유연하게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럴 때 조직이 나를 위해 존재했는지 내가 조직을 위해 존재했는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은퇴를 하고 본격적인 홀로서기가 시작되면 모든 일을 내 손으로 직접 해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특히 대관업무일 경우 한 가지 업무를 하루에 끝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은행업무, 건강보험, 휴대폰요금 등 많은 이들이 용케도 적응하며 살고 있구나 하는 경외감이 들 정도이다
같은 곳을 몇 번씩 반복하며 오고 가야 비로소 끝을 볼 수 있다
의외의 성과라면 미처 몰랐던 성취감을 맛볼 수 있다
마치 대단한 프로젝트라도 끝낸듯하다
다시 한번 직장에 서의 나의 시급에 대해 생각한다
내 한 몸을 유지하는데 이렇게 많은 것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있는지
새삼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한동안을 혼돈과 무기력에 빠져 우왕좌왕하다 보면 비로소 회사와 사회가 목적과 방향이 다를 뿐
구조는 다름이 없음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신용이 처음 상태로 돌아간다
개인신용카드도 소득이 확연히 달라짐으로 재계약이 어려워진다
쌓인 마일리지를 소진한 후 자격조건이 달라진 타사의 신용카드를 신청하여야 하는데
이 상황은 생각보다 상실감이 매우 크다
연회비를 동일하게 내겠다 해도 자격이 되지 않는다 했다
내 자격에 어떤 변화가 온 것일까
우선 아내에게 말하기가 너무도 부끄럽다
스스로도 갑자기 대외적으로 정상임을 인정을 받지 못하는 불안정한 존재가 된듯하다
강남 모 대형서점의 경우
서가의 변화까지도 몸으로 알 수 있을 정도의 높은 충성도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당연히 상당한 신용이 구축되어 할인, 무료주차 등의 혜택과
지나치리만큼 자상한 여러 형태의 안내와 권유를 받는 이른바 브이아이피 고객이었다
그러나 은퇴 후 한동안 구입보다는 책 냄새를 맡기 위한 방문이 많아지고 당연히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시간이 많다 보니 나의 신용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느 날인가 안내데스크에서 궁금해서 물어본 후 차라리 묻지 말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냉정하게 나의 모든 것이 새로이 포맷되어 있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까지는 아닐지라도 안부 정도는 확인해야 하는 것 아닌가
라는 헛된 생각을 잠깐이나마 할 정도로 서운하였다
집사람으로부터 버스 타는 법을 시작으로 이런저런 조언을 받고 홀로서기를 할 때만 해도
이동수단만 잘 이해하고 활용하면 생활에 전혀 지장 없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조직 밖의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하물며 더 이상의 생산활동을 하지 않으며 생기는 위축은 여러모로 초라한 상황을 연출하게 된다
점심식사에 대해 고민하기는 가난했던 대학시절 이후로 정말 오랜만이었다
물론 메뉴에 대한 고민이 아니다
사서 먹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더구나 뜻한 바 있어 개인 작업실을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더더욱 지출에 대해 예민할 수밖에 없다
경제적인 풍요를 느끼며 만족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현실적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가장 큰 위기일 것이다
우리 사회 가장에게 존재감이란
자신의 가족에 대한 부양의무를 최선을 다해 수행하는 것에서 비롯될 것이다
은퇴자의 많은 수가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의무를 완수했을 테지만
자신의 노회함을 느끼지 못하는 대다수는 더 이상 생산에 참여하지 못함을 그 어떤 것보다 큰 상실로
여기며 스스로 자책한다
나 역시 어느 순간부턴가 움직임을 최소화하게 되었고 사교와 모임의 지출을 계산하기 시작하였다
점차 작업실을 벗어나는 일이 줄어들고 외부와 서서히 단절되며 급기야는
말이 어눌해지고 어휘력도 떨어짐을 느낀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적절한 어휘로 입밖에 내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그나마도 시차가 생겨 생각과 말이 적절 한때에 조화를 이루어 구사되지 않는다
이모두가 태어나서 처음 겪는 변화들이다
새롭고 낯설다
모든 것에서 당황하게 된다
지금의 체력과 사고력 그리고 경제력 등 나의 모든 기능이 오늘 이 순간이 최절정 일 것이다
서서히 시간이 지나면 적응하고 익숙해지겠지만
부디 체념에 의한 익숙함이 아니길 바란다
가급적 치열하게 순응하되 굴복이 아닌 극복이 되길 진심으로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