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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묵자 Sep 11. 2017

Episode 08. Assisi

소박한 아름다움의 도시

베니스에서 아시시로 바로 향하는 기차는 없었다. 여행 계획을 짤 때 조금 더 주의를 기울였으면 로마에서 바로 베니스로 간 다음 거꾸로 베로나, 밀라노, 피렌체 그리고 아시시로 향했을 텐데 급하게 짠 계획이라 피렌체에 다시 들러 환승을 하게 되었다. 피렌체에 머무는 약 한 시간의 시간 동안 제일 사랑하던 장소인 아르노강에 들러 노을을 잠시 보고 올까 생각도 했지만 생각보다 여유가 없었다. 여행 에세이도 조금 밀리기도 했고 일찍 피렌체-아시시 기차에 올라 자리를 잡았다.

아시시는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역에서 두 시간 정도 떨어진 위치에 있었다. 북부에서 중부로 내려오며 많은 기차역들을 들렀는데 페루자역이란 곳에서 사람들이 모두 내리더라. 그동안 대도시 위주로 여행을 다닌지라 굳이 역 이름을 확인 안 해도 사람들이 많이 내릴 때 따라 내리면 됐었는데, 내 목적지에 가기도 전에 사람들이 모두 내리니 당황스러웠다. 페루자역을 지나자 내가 탄 기차 칸에는 나를 제외하고 2-3명도 남아있지 않았다. 관광객은 물론 현지인도 별로 가지 않는 도시 아시시. 처음에는 괜히 왔나 싶었다.

종점이었던 아시시역에서 내린 사람은 눈대중으로도 스무 명이 안돼 보였다. 당연히 베로나처럼 한국인은 나밖에 없을 거란 생각으로 주위를 둘러보니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이리저리 포즈를 취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국인 부부였다. 산 위 도시로 올라가는 버스 정류장에서 그들과 나, 다른 배낭여행객이 뻘쭘하게 서 있다가 입을 연 이유는 버스 티켓 때문이었다. 해도 지지 않은 시간이었는데 버스 티켓을 파는 담배 가게가 문을 닫았었다. 다른 도시에서는 자정까지도 티켓을 구할 수 있었기에 정말 코웃음이 나는 상황이었다. 걸어갈 기미는 안 보이는 거리여서 무작정 발을 뗄 수도 없었다.

버스 티켓을 들고 있던 다른 배낭 여행객에게 물어보니 근처 식당에서 버스 10회 이용권을 판다더라. 그녀는 10일 정도 아시시에 머물러서 그냥 구매했다지만 나는 1박 밖에 안 하기에 10회 이용권을 사기에는 부담스러웠다. 도대체 이 작은 도시에 왜 열흘이나 머무를까. 궁금해하는 한편,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가 안내판을 자세히 보니 0.5유로를 더 내면 버스에서 바로 티켓을 발권받을 수 있다고 쓰여 있었다. 보통 90분 대중교통 이용권이 1.5유로니 2.5 유로면 굉장히 비싼 가격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비싼 돈 주고 도시로 가는 버스를 탔다. 창 밖 풍경을 보니 왜 누가 이탈리아의 강원도라는 별칭을 붙였는지 알겠더라.

마을에 올라 버스에서 내리니 왼편으로는 긴 성당이 하나 보였고, 오른편으로는 큰 문 하나와 그 뒤로 다닥다닥 집들이 붙어 있었다. 모두 초저녁 노을빛에 물들어 은은한 빛을 내고 있었다. 다른 도시들과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색이 입혀져 있는 집은 하나도 없고 모두 같은 색의 벽돌로 지어졌다는 점이 있고, 산 위에 비스듬하게 건물들이 붙어 있다는 점 또한 색다른 분위기를 만들었다. 버스를 타고 꼬불꼬불한 길을 올라가니 동화 속 마을에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외관을 보니 빨리 마을 깊숙이 들어가 어떤 분위기인지 느끼고 싶어 졌다.

노을을 보러 또다시 높은 곳을 찾아 오르기 전, 숙소에 들러 짐을 풀었다. 지금까지 가장 좋았던 숙소가 베로나의 고급진 1인 아파트였는데, 아시시의 숙소 역시 그에 못지않게 마음에 들었다. 예약할 때는 분명 1인실을 예약했는데 여행객이 많이 없어서 그런지 관리인이 2인실을 혼자 쓸 수 있도록 해 준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벌써 노을빛이 짙어지고 있어 배낭만 두고 나가려 했지만, 가방 자리 그대로 땀에 젖은 셔츠를 보니 그냥 나갈 수가 없어 간단하게 씻었다. 샤워실에 비치되어 있던 식물성 샴푸와 비누의 싱그러운 향을 머금고 기분 좋게 밖으로 나갔다.

아시시 여행의 첫 목적지는 로카 마조레라는 중세 로마의 요새였다. 숙소가 도시의 하부에 위치해서 아시시에서 가장 높은 로카 마조레까지 꽤나 오랜 시간을 걸어야 했다. 힘들게 걸어 올라가던 중 옆에서 자가용을 타고 올라가는 사람들을 보며 버스를 타고 갈까 잠시 고민했지만, 중세 도시의 느낌을 그대로 품고 있는 아시시의 골목길을 걷다 보니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베니스가 완전히 생경한 풍경으로 감동을 주었다면 아시시는 무언가 익숙하면서도 특별한 경관을 갖고 있었다. 무더웠던 다른 도시와 달리 고지대답게 살갗을 에는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서 춥기까지 했다. 아시시란 도시를 알아갈수록 묘한 기대감이 부풀었다.  

생각보다 좋았던 숙소에서 여유를 부리다가, 또 중세 풍 건물들을 렌즈에 담아내느라 저녁노을의 골든타임은 이미 훌쩍 지나가버렸었다. 해는 이미 반쯤 산 뒤에 모습을 가리고 있었다. 골목골목 들어오는 노을빛을 보며 어서 올라가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노을빛에 물든 건물도 꽤나 아름다워서 앞만 보고 갈 수는 없었어서 늦어버린 것이다. 계획보다 늦은 시간에 로카 마조레에 올라 처음 본 풍경은 아시시의 도시 전경과 그 옆에 펼쳐진 움브리아 평원의 모습이었다. 높은 곳에서 바라본 아시시는 생각보다 훨씬 작았고, 움브리아 평원도 훨씬 소박했다. 주홍색 지붕으로 빽빽한 전형적인 이탈리아의 전경도 멋이 있지만 때론 이런 여백이 훨씬 아름답게 느껴질 때도 있는 것 같다.

저녁 노을은 사실 세상 어디서나 매일 볼 수 있는 흔한 광경이다. 굳이 이렇게 높은 곳에 오르지 않아도 건물 사이사이 좁은 하늘 틈 사이로 노을빛을 볼 수 도 있고, 탁 트인 광장 같은 곳에서도 은은하게 도시를 뒤덮는 노을빛을 만날 수 있다. 왜 이제야 하늘을 올려다보았을까. 지구 반대편까지 와서야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나 보다. 평소 길을 걸어 다닐 때나 지하철을 타고 한강 다리를 건널 때 핸드폰에서 눈을 잠시만 뗀다면 충분히 볼 수 있는 풍경일 텐데. 낯선 곳에 와서 이리도 흔한 풍경만 찾아다닌다니 참 미묘하다.

늦은 새벽, 침대에 누워서 이 사진을 보고 글을 쓰자니 그 시공간 속의 내가 너무도 생생하게 아른거린다. 사진을 찍은 그 순간에는 아름다운 색감을 담아냈다는 사실에 마냥 좋아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되돌아보니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어둠이 찾아온 드넓은 초원과 보랏빛으로 덮여가는 붉은 하늘, 그 사이를 가르는 능선이 하나 되었던 아시시의 늦은 저녁이 너무도 그립다. 한국 시간으로 새벽이라 SNS로 연락할 사람도 거의 없었고, 함께 여행을 하는 동반자도 없었던 그때의 나는 완벽하게 혼자였다. 전혀 외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무런 생각을 할 필요 없이 그저 눈 앞의 찬란했던 풍경에 빠져들기만 하면 됐었다.

아시시의 저녁 하늘과 함께 했던 여유로움은 그 사이에 다 어디로 갔는지. 사진 한 장에 스쳐 지나가는 짧은 추억으로만 남아버려 슬퍼진다.

초저녁 하늘의 푸른빛이 모두 사라지는 것까지 보려고 했는데 갑자기 불어오는 찬 바람에 쫓겨 일찍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게 되는 절경에 발을 떼기 힘들었지만, 눈 앞에 펼쳐진 또 다른 풍경에 흠뻑 빠져 아쉬움은 곧 사라졌다. 은은한 조명이 퍼지던 아시시 골목길 특유의 질감이 참 좋았다. 부라노섬처럼 집집마다 달려 있던 화분도 밤이 되어 반쯤 몸을 감추니 더 매력적으로 보였다. 소도시라 그런지 좁은 광장에 주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어서 밤이 깊어가도 활기가 넘쳤다.

좋은 경관이 있는 곳에 좋은 음식이 빠질 수 없다. 근처에서 가장 사람이 붐비는 레스토랑에 들어가 오늘의 메뉴로 추천받은 라자냐를 하나 주문했다. 크림소스를 베이스로 버섯을 넣은 라자냐였는데 이 재료들로 어쩜 이리 맛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는지 경이로웠다. 라자냐의 맛을 더 일찍 깨달았다면 이탈리아에 와서 매일매일 라자냐만 먹었을 텐데. 부드러운 크림과 치즈, 쫄깃쫄깃한 면과 버섯의 조화는 최고였다. 라자냐보다 감동적이었던 것은 화이트 와인이다. 웨이터에게 아시시에서만 먹을 수 있는 와인 중 가장 드라이한 화이트 와인을 추천받아 마신 와인인데 한 병 안 사 온 게 정말로 후회가 된다. 드라이하면서 상큼한 그 오묘한 맛이 잊히지가 않는다. 아시시에 다시 간다면 5할 정도는 이 와인 때문일 것이다.  

이튿날 오래간만에 숙소에서 아침을 해결하고 본격적인 도시 구경을 시작했다. 버스를 타고 올라올 때 보았던 길쭉한 성당으로 먼저 향했다. 지겹도록 보던 유럽식 건물이지만 베니스에서 바다와 함께 봤을 때 느낌이 달랐던 것처럼 산 위에서 새파란 하늘과 함께 보니 또 다른 느낌이었다. 성당의 전체 모습을 담으려 올라가는 길 중턱에 서 있는데 사람들이 연이어서 올라와 사진 찍기가 어려웠다. 버스를 타고 단체로 온 그들은 외국인 관광객이 아닌 이탈리아 사람들이었다. 알고 보니 이 곳 아시시는 성 프란체스코가 태어난 가톨릭 성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성당 내부는 성지순례를 하러 온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애석하게도 사진 촬영이 금지라 내부의 모습은 담지 못했는데, 프란체스코의 일생을 담은 거대한 프레스코화가 성당 전체를 이루고 있었다. 곳곳에 오디오 가이드도 있었고 외부 테라스에서 전시회도 열리고 있었지만 외국인이 많이 안 오는 곳이라 그런지 영어 패치가 안되어 있어 뭔 소리지인지 하나도 이해 못했다. 점점 머리에 든 건 무식한 여행이 되어가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대신 좋은 풍경들을 눈에 많이 담고 있어 나름 만족스러웠다. 동화 속에만 나올 것 같은 예쁜 언덕 위 성당이었다.

성당을 다 둘러보고 그 뒤편으로 길게 이어지던 길을 따라 걸어갔다. 점점 도시에서 멀어지는 느낌이 들어 구글 지도를 보니 길의 끝에 관광지가 하나 있다고 나왔다. 뭐가 있나 확인이나 해보려 계속 걷다가 갑자기 피식 웃음이 났다. 이탈리아까지 와서 걷고 있던 길은 강원도에 있는 할아버지 산소 가는 길과 다른 게 없었다. 조금 갈라진 1차선 아스팔트 도로와 가드레일, 양 옆에 있던 푸른 나무들이 딱 강원도 산길이었다. 길에서 내려다본 전망도 산 높이나 무성한 정도만 다르지 딱 양구 정도였다. 낯선 곳에서 받은 친밀함이 이 반가우면서도 참 어색한 순간이었다. 이 풍경 더 봐서 뭐하랴, 생각하며 길을 되돌아갔다.

전날에 올랐던 로카 마조레 말고 반대편에도 높은 곳에 건물이 하나 있길래 바로 달려갔다. 산속에서 날려 드는 벌과 사투를 하며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고, 버스에서 내려 지도에도 잘 안 나오는 길을 따라 올라갔건만 문이 잠겨 있었다. 로카 마조레와 아시시 전경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최적의 장소라 생각했는데 문은 단단히 잠겨 있고 건물 주변으론 뚝 떨어지는 절벽이라 다가가기도 힘들었다. 절벽마저도 무성한 풀숲이 시야를 가리고 있어 진짜 하나도 안보였다. 화남을 뒤로하고 마음의 정화를 얻기 위해 곧장 저 멀리 보이는 로카 마조레로 가서 힐링을 했다. 어젯밤과 달리 요새 전망대도 오픈해서 들어가보았는데 그리 뛰어난 뷰를 갖고 있지는 않았다.

그렇게 아시시에서의 이튿날도 여유롭게 지나갔다. 아침에 성당 하나 들렀다 전망을 보기 위해 높은 언덕으로 향하고, 실패하자 또 다른 높은 언덕으로 향했다. 성당을 제외하고 가 볼만한 유명 관광지라는 게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도시 전체가 훌륭한 관광지인 아시시는 미로 같은 골목길을 걸어 다니는 것만으로 아름다운 모습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역에서 도시로 올라올 때는 버스를 타고 올라왔지만 내려갈 때는 기차 시간도 애매하고 해서 걸어내려 갔다.

셔츠가 땀으로 흥건 해지며 엄청나게 힘들었지만 내려오는 길 중간에 뒤를 돌아볼 때마다 후회는 사라졌다. 이틀 동안 내가 다녔던 모든 곳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구글 지도로 역까지의 시간을 확인하고 뒤 돌아 사진을 찍고, 기차를 놓치지 않으려 뛰어가다 또다시 사진을 찍는 것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떠나 오기 싫었던 아시시를 이렇게 다시 보니 더욱 떠나기 싫어졌다. 이대로 주저앉아 아시시의 풍경을 감상하며 다음 기차를 탈까 하다 결국 역으로 향했다. 여행 와서 발걸음이 떼 지지 않는다는 말이 왜 생겼는지 많이 공감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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