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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묵자 Sep 02. 2018

Episode 2. 여행이 무엇을 위해야 하는지

<치앙마이> 첫 날 밤부터 새벽까지 이야기

찝찝하게 끝날 줄 알았던 첫 날, 8시 쯤 눈이 떠졌다,
어두워진 님만해민 큰 길가

여행지에서의 첫 밤을 이렇게 보내기 아쉬웠는지, 잠든지 한 시간 반 뒤에 깼다. 아, 숙소 얘기를 조금 하고 넘어가자. 1층에 있는 카페 공간도 너무 좋았는데, 내부 객실도 정말로 편안했다. 여행 때마다 사진에 속았던 적이 너무 많아 걱정했었는데, 내가 가본 도미토리식 숙소 중 가장 깔끔하고 서비스가 좋았다. 8인실인데도 그냥 허름한 2층 침대 4개가 있던 것이 아니라 개인 공간이 캡슐 호텔처럼 완벽하게 분리된 구조였다.


침대마다 암막 커튼도 달려있었고, 내부도 넓어서 작은 선반과 수건 걸이도 있었다. 침대 밖에 따로 있는 개인 락커도 꽤 컸다. 화장실과 샤워실은 같은 층 투숙객이 공용으로 사용하는 식이었는데, 샴푸, 바디워시, 헤어 드라이어 등 기본적인 용품도 잘 갖춰져 있었다. 매트리스도 엄청 편안해서 마음먹고 잤으면 다음 날 아침이었을 것이다. 잘 생각 없이 불편한 자세로 스스륵 잠든 것이라 금방 깬 듯 했다. 다행이었다.


이름 모를 식당. 조명과 외벽이 잘 어울린다.

여행지에 오면 항상 저녁 이후의 시간을 기다리게 된다. 주변 사람들은 내가 해가 뜨고 지는 것에 집착하는 걸 알텐데, 일례로 이탈리아에서 새로운 도시에 갈 때면 강박적으로 높은 곳을 찾았다. 노을빛에 물든 하늘과 도시의 전경을 보려고 말이다. 사실 극지방이 아니라면 세계 어디를 가도 매일 볼 수 있는게 노을이지만, 고층 건물로 사방이 빽빽한 서울에서는 노을의 색을 잊고 살게 된다. 이따금 저녁 시간에 높은 곳에 올라가도 크고 작은 빌딩들이 울퉁불퉁하게 지평선을 가리고 있어 볼품없는 모습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도시에 살면 하늘을 올려다 볼 여유가 없기도 하다.단순히 자연 현상으로서의 노을만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골목 사이로 노을빛이 스며들때 도시가 주는 새로운 인상도 참 좋다. 노을 빛이 옅어지면서 어두워지는 거리를, 은은한 조명이 서서히 채워준다. 까만 밤하늘을 뒤로하고, 조명이 밝혀주는 거리 풍경을 보면 낮에 봤던 같은 장소라도 느낌이 많이 다르다. 근처에 식당이나 카페가 있으면 저녁 식사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와 식기 부딛히는 소리가 잔잔하게 들리기도 한다.

특히나 야외에 테이블이 있는 거리라면 더욱 잘 들린다. 가장 좋아하는 화이트 노이즈이다.
노래 소리가 들리던 고기집.

유럽처럼 넓은 광장을 끼고 테이블을 깔려 있지는 않았지만, 치앙마이에는 오픈된 식당과 카페들이 꽤나 많았다. 숙소에서 나와 향한 곳은 ‘마야몰’이라는 큰 쇼핑몰인데, 마야몰 건너편에 있는 작은 광장에는 카페 하나와 펍 하나가 야외에서 운영되고 있었다. 카페에서는 인디 밴드가 라이브 공연도 하고 있었어서 잠시 나를 유혹했지만,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해 서둘러 상가 안으로 들어갔다.

원래 목적지가 아니기도 했고.
치앙마이 최대 쇼핑몰 마야몰.

쇼핑을 즐겨하지는 않는다. 즐기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여행 오기도 빠듯한 대학생이 무슨 사치를 부리랴. 치앙마이 최대 쇼핑몰인 마야몰에 온 이유는 5층에 있던 루프탑 바를 가기 위해서였다. 인천공항까지 지하철 타고 오면서 미리 찾아본게 딱 여기까지인데, 꽤나 큰 건물이라 바도 대여섯가지가 운영되고 있다고 해서 찾았다. 노을은 못봤지만 야경은 봐야하지 않겠는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해서 잘 보일지는 걱정이 되었지만, 일단 향했다. 오늘 밤에 갈 곳은 어쩌피 이 곳 뿐이었다.


Myst Bar에서 공연하던 밴드. 태국 노래라 하나도 못알아들었다.

지하는 여느 백화점처럼 푸드코트가 운영되고 있어 따로 가보진 않고, 1층부터 4층까지는 대강 눈으로 훑으며 지나쳤다. 백화점이어도 확실히 한국보다 싸긴 쌌는데, 브랜드 있는 제품들은 태국 물가 생각하면 엄청나게 비싸더라. 여름 휴가 패션의 로망이었던 민소매 티셔츠 하나 살까하다가 술 한 잔 더 마시지 생각하고 위로 향했다.


옥상으로 올라가니 비 때문에 통로를 비닐하우스처럼 씌워놨었다. 바가 다양하긴 다양했는데 비닐이 시야를 가려 잘 보이지 않았고, 무슨 차이인지도 모르겠어서 도시가 제일 잘 내려다 보일 것 같았던 ‘Myst’라는 바에 들어갔다. 들어가자 마자 창가 자리를 찾았는데 라이브 공연 무대 바로 앞을 제외하고는 다 차있었다. 너무 시끄러울 것 같아 다른 자리에 앉으려다, 대화할 사람도 없는데 노래나 크게 듣자는 마음에 그냥 맨 앞에 앉았다. 야경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고 말이다.


롱아일랜드 아이스티. 진한 조명 때문에 사진이 잘 안찍혀 애먹었다.

칵테일 바마다 고유한 스페셜 칵테일을 몇 개 씩 갖고 있는데 어딜가든 제일 비싸다. 안그래도 피곤한데 새로운 술 도전하기도 싫었고, 클래식하게 롱아일랜드 아이스티를 한 잔 시켰다. 롱아일랜드 아이스티는 칵테일바 알바할 때부터 가장 좋아하던 술인데, 맛있을 뿐더러 여러가지 매력이 있다.


일단 바텐더 입장에서 만드는게 재미있다. 잭콕 같은 칵테일은 얼음에 잭다니엘 1온스 붓고, 적당히 콜라 따르고 레몬즙 좀 첨가하면 끝난다. 롱티는 들어가는 술 종류부터 럼, 진, 보드카, 테킬라, 트리플섹(오렌지 맛 리큐르) 5가지이고 여기에 레몬주스나 샤워믹스까지 넣어 쉐이킹한다. 쉐이킹한 술을 잔에 붓고, 콜라로 나머지를 채워준 다음 레몬 조각 하나 올려주면 완성.


마시는 입장에서도 다른 칵테일에 비해 알콜 비중이 높아 도수가 강하고, 가성비가 좋다. 또 비율만 조금 조정하면 달달한 맛을 유지하면서도 엄청나게 강한 칵테일을 만들 수 있다. 마감 시간 쯤 바에 친구가 오면, 나만의 비율로 엄청 쎄게 롱티를 타먹고 같이 취했던 기억이 나기도 한다.


창 밖의 야경을 바라보며 술 한 잔 하고 있자니 이보다 좋을 수가 없더라. 멋진 야경, 괜찮은 공연, 좋아하는 칵테일 두 잔. 그리고 그 속에 혼자 있는 내 모습이 너무도 좋았다. 뭐라도 눈에 담아야겠다는 생각에 하루종일 돌아다녀서 피곤했는데, 왜 그랬나 싶었다. 이렇게 분위기 좋은 카페나 펍에 가만히 앉아 휴식을 취하면 그걸로 최고인걸.


가만히 생각해보니 여행 다닐 때마다 반복되는 패턴이 있다. 본전을 뽑아야겠다는 생각에 첫 날에는 엄청난 거리를 돌아다닌다. 어느 순간 지쳐서 전망 좋은 카페에 찾아가 휴식을 취하는데, 그럴 때마다 왜 이렇게 열심히 돌아다녔지 후회하며 남은 일정을 아주 여유롭게 보낸다. 여행와서 소위 말하는 ‘관광 명소’를 따라 일정을 짜고 무리하게 모두 둘러볼 필요가 없다. 차라리 그럴거면 패키지 여행을 가지.


특히나 혼자 떠나는 여행은 많은 것을 담아내기 위한 여행이 보다는 담을 것은 담고, 비울 것은 비우는 여행이여야 한다. 중요한 관광지를 가는 것도, 편안한 휴양지에 가는 것도, 중간에 적절한 휴식을 취하는 것도 여행에 모두 필요하다. 무엇보다 ‘나’를 위한 여행으로 채워나가는게 중요하다. 시작부터 너무 조급했던 치앙마이라 그런지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무엇을 위한 여행인지, 여행이 무엇을 위해야 하는지.
내부의 풍경이 겹쳐져 잘 나오지는 않았다. 그래서 더 느낌있는 것 같기도 하고.

많이 지쳐있던 것 같다. 비단 멀리까지 와서 돌아다니느라 고생한 어제 오늘 뿐만의 얘기가 아니다. 여름방학 동안, 한 학기 동안, 어쩌면 지난 겨울부터 쭉 축적되온 피로가 꽤 됐나보다. ‘아직은 지치면 안된다’, ‘뭘 했다고 힘드냐.’라며 주변에서도, 스스로에게도 많이 채찍질해왔다. 아직 하고 싶은 일이 더 많이 있고, 지쳐서 뒤를 돌아보기에는 당장 할 일도 너무도 많았으니 말이다.


멈춰야 할 정도로 과부하가 걸린 것은 아니었지만, 일상의 작은 부분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마음을 좁혀왔다. 밤늦게 노트북 붙잡고 앉아있는 시간, 누군가와 같이 있는 것만으로 오는 피로감, 눈만 뜨면 몰려오는 앞으로에 대한 걱정 등. 술을 마셔도 학교 얘기 아니면 학교 앞 단체 회식, 밥을 먹어도 학교 얘기 아니면 학생회실에서 혼자 먹는 패스트푸드. 바쁘게 돌아가는 톱니바퀴 안에 있으면 잘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다.


여행을 마치고 바쁜 톱니 속으로 다시 돌아가면 아무렇지 않을테지만, 잠깐 빠져나와서 휴식할 시간이 필요했다. 생각해보니 여행 날짜 자체도 많이 지쳐있을 것 같을 때 쯤으로 잡은 것이었다.

잠시 멈춰, 온전히 나에 집중할 시간이 필요할 때 쯤으로.
치앙마이에서 보기 힘든 신호등. 일시정지.

나에 집중한다는건, 내 안의 깊은 고민들에 대한 답을 구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고민 걱정 다 떠나서 지금 이 순간의 나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냥 별 생각 없이 앉아 창 밖의 풍경을 감상하고, 들려오는 노래를 즐기면, 그러다 술 한 모금 마시면 그걸로 된 것이다. 혼자 떠나온 여행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여행 코스가 아닐까.

많이 어둡지만


라이브 공연이 끝난 후, 직원이 유투브로 힙합 플레이스트를 틀길래 자리를 옮겼다. 근처에 화요일마다 BBQ 무료 제공을 하는 펍이 있어 갔더니, 생각했던 분위기와는 많이 다르더라. 방금 다녀온 곳처럼 혼자 앉아서 술을 즐길 수 있을만한 곳이 아니라, 현지인과 여행객이 만나 교류하는 왁자지껄한 곳이었다. 들어가자마자 나오기도 좀 그렇고, 모히또 한 잔 하고 30분만에 나왔다.


마야몰을 지나 다른 술집까지 찾아오니, 숙소에서 거리가 꽤 되었다. 올드타운에서 쌩고생할 때까지만 해도 이 시간까지 밖에 나와있을 것이라 상상도 못했었는데, 또 서둘러 돌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한적한 밤 골목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숙소에서 마야몰 가는 길은 큰 길이라 차들이 많았는데, 좁은 골목길을 통해 다니니까 또 새로운 느낌이었다. 벌레가 계속 다리를 무는게 느껴졌지만, 그냥 천천히 걸어갔다. 바람도 솔솔 불어 시원했고, 오는 길에 부처님도 많이 앉아 계셔서 안심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붓-다가 곁에 있다.
하루종일 몸도 마음도 많이 힘들었던 하루였다.
그래도 마지막에, 마음의 여유를 조금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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