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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nclair Oct 03. 2017

프로그래머와 설거지의 美學

어머니는 말하셨지






나는 한남이다. 그리고 개독이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고 그걸 숨기고 싶지도 않다.





프로그래머가 설거지랑 무슨 상관이 있겠냐만은 나는 늘 강의시작할 때 마다 먼저 설거지를 거론한다. 한남 개독 프로그래머가 떠드는 설거지라... 도대체 무슨 꿍꿍이란 말이냐?





울 엄마는 무려 13남매 중 막내였다. 중간의 형제 자매들이 병으로 여러가지 이유로 일찍 죽었지만 그럼에도 그 시절 엄마가 가질 수 있었던 교육의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다. 게다가 외할머니, 엄마의 엄마는 둘째 부인이었다.


하지만 학위 따윈 전혀 없는 국졸인 울 엄마는 누구보다 현명하고 나는 여전히 엄마에게 많은 것을 배운다.



나는 한국에서 20세기 말 부모님과 1남 1녀의 가정에서 아들로 자랐다. 그러면 흔히들 왕자처럼 떠받들려 자랐으리라 생각하기 쉽지만 엄마에겐 그저 똑같은 자식이었을 뿐이다. 아버지는 나름 지방 유지셨던 할아버지의 8남매 중 가장 똑똑하고 자랑스러운 아들로 공부만 열심히 했다고 하셨다.(할아버지의 사업이 쫄딱 망하지 않았다면 엄마를 만나지 못했을 거고 그럼 나도, 이 글도 없었을 게다. 이열~) 그렇게 라면 하나도 끓여본 적 없고 철저하게 한남이었던 아버지는 부엌 근처엔 절대 얼씬도 안 하셨고 엄마는 그게 친할머니가 잘못 가르쳤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셨다. 그 덕분에 우리 남매는 설거지며 기본 요리에, 빨래, 청소며 도와야 할 살림을 아들딸 구별없이 공평하게 나눠서 해야했다. 그렇게 나는 고추장도 담그고 김장도 할 수 있다. (이게 기본 요리냐? 앗, 한국음식의 기본이긴 하네.)

아무튼 어려서 부터 받은 특훈(?) 덕에 어지간한 집안 일들은 혼자서도 척척척이지만 그 중에 으뜸은 설거지다. 내가 할 수 있는 집안 일들 중 가장 좋아하는 것도 바로 이야기의 핵심인 설거지다.

(빨래야 세탁기에 넣으면 알아서 하니 널고 마른 걸 잘 정리만 하면 되니 별거(?) 없지만 청소는 먼지 털고 청소기 돌리고 걸레질까지 마치고 돌아서면 또 머리카락이... 괴롭다. 그에 비해 설거지의 성취감은 절대적이고 매우 아름답다.)



심지어 여행가서 친구들이 밥먹고 설거지 내기 게임을 하자고 하면 나는 그냥 내가 나서서 하겠다고 한다. 친구 자취방에 놀러가서 같이 라면이라도 끓여 먹었다면 그동안 쌓여 있던 설거지를 모두 해치운다.(설거지 때문에 라면 먹자고 부른 친구들이 많았지만 청소는 절대 안해준다. 먄~) 라면도 요리처럼 제법 잘 끓이지만 친구들은 그렇게 나를 설거지의 神, '설신'이라 불렀다. 혼자 살기 여러 해, 비록 빨래 청소는 못하고 심지어 머리도 못 감았어도 절대 설거지를 미루거나 쌓아 둔적은 없다.

이렇게 빠르고 물도 아껴쓰고 깨끗하고 비눗기 없이 완벽하게 해치우는 설신의 경지에 올랐음에도 집에서 내가 설거지를 하려고 하면 엄마는 주무시다가도 꼭 한마디를 하신다.
물 아껴라? 고무장갑끼고 해라? 그릇 깨지 마라? 마무리 잘해라? 모두 아니다.






흔한 공부해라 잔소리도 안 하셨던 엄마의 그 한마디는 바로 "칼부터 먼저 씻어서 칼집에 넣어라."이다.

명절이라 설거지가 산더미 처럼 쌓이든 고작 라면 하나 끓여 찬밥 말아먹어 몇 개 없고 조촐(?)하든, 아들이 이미 설신의 경지에 올랐어도 늘 엄마는 그 말씀을 하셨다.
잘못하면 크게 다칠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말씀이었다. 놀랍지 않은가?




학창시절 문학 소년으로 자라다 스무살을 넘겨 남들보다 늦게 프로그래머의 길에 들어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때 마다 내 귓가에는 엄마의 유일한 잔소리 칼부터 씻어서 칼집에 넣으라는 말이 들렸다.

실제로 개발을 할 때, 대기업에서 대학에서 프로그래밍을 가르칠 때 늘 강조하며 하는 나의 잔소리도 바로 이것이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에서 그냥 0으로 나누면 안된다. 실수값을 단순히 비교하면 안된다. 컴퓨터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게 뭔지 잘 알아야 한다. 씨언어에서 배열은 타입이고, 연산자이다. 표준 함수도 위험할 수 있다. 동적 할당된 메모리는 반드시 해제해라. 포인터는 반드시 사이즈와 함께 다녀야 한다. Hello world!를 제외한 모든 프로그램은 위험요소와 버그를 담고 있다. 모든 외부 입력에는 위험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등등,... 결론은 모든 가능성을 생각하고 위험요소부터 제거한 후에 프로그래밍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줄곧 내가 작성한 프로그램이 남들과 달랐던 점이다. 그냥 막 돌아간다고 다 프로그램일까?








아버지는 말하셨지 인생을 즐겨라.

(현대카드 W 광고, 2005)


하지만 귀에 딱지가 앉도록 어머니는 말하셨지, 설거지 할 땐 반드시 칼부터 씻어서 칼집에 넣어라.
모든 일 처리엔 우선 순위가 있고 반드시 위험요소부터 제거하라는 말씀이다.

학교에선 어느 교수도 그렇게 말해 주지 않았다. 그냥 실행해서 결과만 나오면 끝이었다.



사실 설거지를 하기 싫으면 계속 외식만 하고 요리하지 않으면 된다. 매일 라면만 끓여 먹으면(Hello World!?) 칼을 다루지 않아도 된다.




위대한 예술가이자 과학자, 엔지니어였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놀라운 점은 그가 최초로 헬리콥터나 비행기계를 설계했다는 게 아니라 그것들과 함께 낙하산을 설계했다는 것이 아닐까?







아무리 생각해도 엄마는 나를 프로그래머로 키우시려 했었나 보다.

나는 한남이고, 개독이지만 프로그래머다.


그리고 설거지할 때 가장 중요한 건 칼부터 먼저 씻어 칼집에 넣는 것이다. 그렇게 설거지를 마치고 깨끗이 잘 닦인 그릇들을 바라보는 건 매우 뿌듯하고 아름답다.






세제를 줄이고 녹차 찌꺼기와 밀가루, 쌀뜨물, 베이킹소다, 식초 등을 적절히 사용하면 사람과 자연 환경 모두에게 이롭고 건강한 설거지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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