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여름.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탔다.
스페인 마드리드의 한 숙소에서
"저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유럽에 들어왔어요."
라고 말하는 친구를 만난 후,
나도 언젠가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나 출발지에서 도착지까지 꼬박 7일을 좁은 기차 안에서 보낼 자신이 없었다.
기름기로 떡진 머리를 이고 일주일 동안 목욕을 못 했던, 스무 살 대학농활의 기억을 떠올리면
'굳이..'라는 단어가 맴돌았다.
그래서 하바롭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가는 열차에 올랐다.
가운데 통로를 두고 열차 1량 양쪽으로 침대가 이어져 있는 3등석을 타고,
처음 만난 사람들과 음식을 나눠먹으며 왁자지껄하게 보내는 게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묘미일 것 같았지만..
내게 그럴 깜냥이 없다는 걸 받아들이고 2등석을 탔다.
2등석은 한 칸을 4명이 이용하는데, 나는 3명의 어른과 귀여운 꼬마가 있는 러시아 가족과 같은 칸에 탔다.
요령껏 침대를 펴고 2층에 자리 잡았다. 알아듣지 못할 말들이 귀를 스쳐 흘러가고, 꿈같은 기분이 들었다.
안톤 체호프의 책과 러시아 문학 강의 책을 꺼냈다.
그때, 익숙한 말소리들이 들려왔다.
나처럼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의 맛을 보고픈 한국인 패키지 여행객들이 기차에 올랐다.
이런저런 일들로 부대끼는 일상에서 벗어나 낭만적으로 고독을 즐기고 싶었는데.. 방해를 받는 느낌이었다.
귀에 쏙쏙 들어오는 한국어와 복도를 가득 채운 컵라면 냄새가 달갑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12시간 동안, 7일의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을 흉내 내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책을 두세 장 읽었고, 영어조차 통하지 않는 승무원에게 어찌어찌해서 기차모양 받침이 있는 기념품을 샀고, 설핏 잠을 잤다. 러시아어를 못 하는 내가 답답했던 승무원이 한국인 가이드를 대동하고 나타나 아침밥을 안겼다. 러시아 가족은 우물쭈물하고 있는 나에게 내려와 밥을 먹으라며 자리를 만들어줬다. 쭈뼛쭈뼛, 한 마디 대화 없이 먹던 보르쉬가 맛있었다. 호기롭게 배낭 하나 짊어진 여행객이 어찌 그리 주변머리는 없는지.. 아침밥을 먹고 다시 2층 침대로 올라갔다.
그런데, 어느 이름 모를 간이역에 선 기차가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곧 출발하겠지.. 싶었는데, 몇 시간이 지나자 열차에 탄 사람들이 한 둘씩 내려 마중 나온 일행의 차를 타고 떠나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는 그냥 침대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대책 없어 보이는 내가 답답했는지, 열차 승무원이 나를 불러 짐을 싸는 한국인들에게 데려갔다.
"이 열차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못 간데요. 비가 많이 와서 어떤 다리를 지나갈 수가 없다고.. 저희는 버스가 와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타고 갈 거래요. 혼자 계신 거예요? 일단, 빨리 짐 싸서 나와보세요."
이야기를 듣고는 침대에 늘어놓은 짐을 허겁지겁 싸서 밖으로 나왔다. 행여 버스를 못 얻어 탈까, 아침밥을 함께 먹었던 러시아 가족과는 인사도 나누지 않고 도망치듯 나왔다.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서둘렀다.
몇 시간 전만 해도 방해꾼처럼 생각됐던 패키지 여행객들의 OO여행사 버스를 얻어 탔다. 아무런 대가 없이 나에게 자리를 내줬다. 안도의 한숨.. 같은 버스를 탄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 뒤 한번 돌아보지 않은 나의 인간성에 대한 부끄러움.. 민망해서 얼굴이 붉어졌다.
극단적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 두려움을 안고 산다.
아무래도 자신이 없다. 내 본능을 이겨내고 누군가를 먼저 챙길 자신이 없다.
그래서 이런 나 자신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 본다.
다른 이들에 대해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으려 애를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