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가 갈지(之)자로 헤맬 때
드디어 제목을 정했다. '희망을 버려, 그리고 힘내'로. 이 문구만큼 저자의 세계관을 잘 보여주는 제목은 없다.프롤로그는 이렇게 시작된다.
“삶에서 희망을 버리면 살기가 싫어진다. 내일은 좀 나아지겠지, 지금은 힘들지만 이걸 끝내고 나면 더 나은 곳에 가 있겠지 하는 작은 희망을 붙들고 우리는 살아간다. 나 역시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텨왔다. 하지만 꿈을 이루겠다는 열망이 너무 크면 그게 좌절됐을 때 고통도 배가된다. 영화「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 나온 대사 “희망을 버려, 그리고 힘내.”에 매료되었던 것은 바로 그 지점이었다.
아, 희망이나 꿈이 꼭 있어야 하는 건 아니구나. 그냥 살아도 되는구나. 그냥 살되, 힘을 내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되는구나. 나를 다그치지 않아도 되는구나. 희망이 없으니 기대도 없고, 기대가 없으니 실망할 일도 없다. 일단 시도해보고 안 되면 접으면 된다. 잘되면 다음 일을 찾아서 해나가면 되는 것이다.”
저자 김송희는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 같다. 10년 가까이 옆에서 지켜본 결과, 그는 새로운 것을 시도할 때 주저함이 없다. 외주도 자잘한 드라마 리뷰부터 연예인 인터뷰, 화보 촬영, 강의, 브랜드 컨설팅, 스토리펀딩 같은 큰 프로젝트까지 장르 불문하고 들어오는 일은 다 한다. 한창 이것저것 배우러 다니던 시절도 있었다. 내일배움카드로 포토샵을 배우고, 거액을 들여 드라마 극작원에 등록하고, 오로지 취미로 일대일 바이올린 레슨을 받기도 했다. 그는 회사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그런 식으로 푼다.
언뜻 보면 사이드잡을 병행하며 직장도 다니고 틈틈이 자기계발도 하는 유능한 직장인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실은 그는 오늘만 사는 사람이다. 김송희는 미래에 대해 되도록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대신 지금 할 수 있는 것, 하고 싶은 것들을 일단 하고 본다. 무시로 계산기를 두드려보고 멋대로 희망에 부풀었다가 시도도 못해보고 주저앉는 나로서는, 그 용기가 부럽다. 뭐든 하다 보면, 그래서 시간이 지나고 경험이 쌓이면, 그게 다 내 자산이 되고 또 다른 선택지로 이어지게 마련이니까.
“매일 지는 경기에 나가는 기분이지만 오늘도 삶의 링 위에 어쩔 수 없이 올라서야 하는 모두를 응원한다.”는 김송희의 글을 읽으면 울컥하는 지점이 있다. 우리 세대의 최선이란 무엇일까. 안 될 줄 알면서도 노력을 멈출 수 없는 삶이란. 희망을 버리고 힘내라는 말은, 김송희가 자기를 다독이는 말이기도 하지만 우리 세대를 향해 내미는 손이기도 하다. 실패했을 때 상처받지 않으려고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두르는 안전장치 같은 주문이랄까. 체념 같은 위로, 절망 같은 희망을 눈밝은 독자는 알아볼 것이다.
제목과 표지, 역설적인 조합이 주는 재미
제목이 주는 부정적인 느낌을 상쇄하기 위해 표지는 발랄한 느낌으로 가기로 했다. 그즈음 시중에서 나온 책 중에 <정신병의 나라에서 왔습니다>라는 제목을 달고 나온 책이 있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도 아닌데, 정신병을 정신병이라 부르지 못하는 세태를 거부하며 '정신병의 나라에서 왔다'며 당당하게 정체성을 밝히는 이 행보란!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멋짐이 아닌가! 대문짝만하게 제목을 써붙여서 정체성을 확고히 보여주며, 정신과의사와 환자와 고양이를 적시적소에 배치한 표지를 보고서 나는 단박에 사랑에 빠졌다. 심각한 이야기도 귀엽게, 재미있게 풀어낼 수 있다. 제목과 표지의 역설적인 조합에 감명받은 나는 <희망을 버려, 그리고 힘내>의 표지도 이런 느낌으로 만들기로 맘먹었다.
여기까지 말했을 때 디자이너가 한 일러스트레이터를 추천해주었다. 인스타그램에서 'SF소년단'이라는 팀 명으로 활동하는 '요기보이'라는 일러스트레이터였다. 그의 작업물을 하나하나 탐색하다 이거다 싶은 그림을 발견했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시기에 나온 프로파간다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포스터였다. 이런런 스타일로 열심히 사는 도시인의 일상을 가득차게 그려넣고, 정중앙에 힘빠지게스리 "희망을 버려, 그리고 힘내"라는 제목을 표어처럼 넣으면? 내리막 세상에서도 살아보려 최선을 다해야 하는 MZ세대의 울분을 이보다 잘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표지 일러스트, 이렇게 발주한다
그 길로 인스타그램 DM을 보내 미팅 일정을 잡았다. 위의 포스터처럼 중간에 제목 위치를 비워두고 아래 위로 그림을 분할해서 그려 달라고 했다. 편집자로서 내가 잘하는 것이 한 가지 있다면, 일러스트를 발주할 때 내가 원하는 것을 최대한 자세하게 설명한다는 것이다. '빈티지하면서도 세련된 느낌' '당장 울기 일보 직전인 직장인의 애환을 명랑하게 표현'처럼 추상적으로 말하면, 그리는 사람은 이게 뭔 따뜻한 아메리카노 같은 개소리냐며 화를 낼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전체적인 컨셉과 함께 구체적인 상황을 세세히 전달한다. 본문을 발췌하고 기획 방향을 정리해서, 일러스트레이터와 디자이너, 내가 머릿속에 같은 그림을 떠올리도록 작성한 이메일을 보냈다. 참고자료로 쓸 만한 이미지도 덧붙여서 말이다.
2주 뒤에 밑그림 시안이 도착했다. 여기에 디자이너가 피드백을 보냈고, 그렇게 두어 차례 이메일을 주고 받은 뒤 우리가 원하는 밑그림을 받을 수 있었다. 스케치 시안을 확정짓고 채색 작업을 시작해달라고 한 게 7월 말이었나. 그즈음에는 모든 게 순조로웠다. 명확한 기획 방향, 그에 꼭 맞는 제목, 표지까지 일정에 맞춰 작업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과연, 기획을 세 번이나 엎어가며 고민한 보람이 있었다. 나는 교정교열에 집중하며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저자로부터 문제의 원고를 받기 전까지는 말이다.
표지 일러스트 발주 과정
1. 일러스트레이터 섭외하고 계약하기
2. 책의 콘셉트와 원하는 그림에 대해 설명하고 발주하기
3. 밑그림(스케치) 시안 받기
4. 피드백주고 수정안 받기(작업물이 마음에 들면 생략)
5. 채색 시안 받기 -> 7월 말에 이 단계에 들어섬. 일러스트의 70퍼센트는 완성된 상태.
6. 피드백주고 수정안 받기(작업물이 마음에 들면 생략)
7. 완성본 받고 입금
이제 와서 이렇게 좋은 원고를 주면 어떻게 해?
한겨레 신문의 '이런 홀로'라는 코너에 1인 생활자로서의 삶에 대해 에세이를 쓰고 있던 저자는 이번에 새로운 글을 하나 썼는데 참고하라며 링크를 보내줬다. 제목은 "누구나 귀여운 할머니가 될 순 없지". 나는 이 글을 읽고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내가 할머니 컨셉으로 책을 밀고나갈까 고민하면서 프롤로그를 새로 써달라고 할 때는 글을 그렇게 안 주더니, 이제 와서 이렇게 좋은 원고를 주면 어떻게 해? 제목 정하고 표지 일러스트 발주까지 끝낸 마당에 나더러 어쩌라는 거냐고!
물론 저자는 나한테 책의 방향을 바꾸자는 제안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다만 그 글이 내가 잊고 있던 편집자로서의 직감을 일깨웠을 뿐이다. 이건 된다. 이게 바로 시대가 원하는 이야기다. 지금까지 기획을 엎고 판을 새로 짜야 한다는,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그 예감은 너무 뾰족하고 강렬해서 편집자이자 사장인 나를 잠 못들게 만들었다. 단전부터 불안이 스멀스멀 밀려왔다.
돌이키기에는 나는 이미 너무 많은 길을 와 있었던 것이다. (계속)
"누구나 귀여운 할머니가 될 순 없지"
무사히 할머니가 되고 싶은 1인 생활자의 모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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