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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화 Nov 02. 2021

(5)텀블벅 수치사

예정보다 빠르게 공개된 프로젝트에, 부끄러워서 죽고 싶었던 사연 

"프로젝트의 자동 공개일이 내일로 다가왔습니다."


텀블벅에서 온 메일을 보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예상했던 날짜에 비해 프로젝트 공개일을 일주일가량 미루기로 했는데, 정작 텀블벅 웹사이트에는 이를 반영하지 않은 것이다. 만약 이 메일을 보지 못하고 지나쳤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미처 준비도 못한 상황에서 프로젝트가 만천하에 공개됐을 것이다. 잽싸게 텀블벅 홈페이지에서 프로젝트 공개일을 바꾸고 저장 버튼을 찾아 누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운수 좋은 날 


그날은 이상하게 운이 좋았다. 엄마가 재개발 임대아파트에 당첨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역세권에 들어선 신축 아파트라 경쟁률이 엄청났다. 5가구 모집하는데 대기번호 5번이라 기대도 안 하고 있었는데, 그게 돌고 돌아 엄마에게까지 입주 기회가 온 것이다. 로또 당첨된 기분이었다. 아빠가 전 재산을 말아먹고 이혼한 지 15년째, 무주택으로 재산 하나 없이 떠돌던 엄마에게도 드디어 그럴싸한 집이 생기다니! (여성 생계부양자 이야기『나는 엄마가 먹여 살렸는데』참조) 살다보니 이런 좋은 날도 있구나, 시궁창에 빠진 기분이 들 때마다 이 순간을 기억해야겠다며 오늘은 반드시 일기를 쓰겠노라고 다짐했다.   


그간 수시로 임대주택을 알아보며 엄마의 주거 환경 개선을 위해 해온 노력이 결실을 맺었으니, 나에게 선물을 주기로 했다. 일단 작업실 근처에 평소 눈여겨봐둔 브런치 맛집에 가서 혼자 점심을 즐겼다. 위장 저 밑바닥부터 따뜻하게 감싸주는 토마토감자 스프에 고급스러운 치즈가 올려진 샌드위치를 먹으며 늦가을 오후의 햇살을 만끽했다. 그날은 누구를 만나든 기쁘고 반가워서 작업실에서 마주치는 사람마다 붙잡고 인사를 나눴다. “요 앞에 생긴 수프 맛집 가보셨어요?” “요새 작업은 잘되어 가시나요?” 하고 말을 걸었다. 그렇게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시간도 잊어버리지 않는다. 


10월 12일 오후 3시 30분, 단톡방에 심상치 않은 메시지 하나가 올라왔다.


“오, 님 프로젝트 드디어 공개됐네요! 축하드려요. 첫 번째 후원 인증!” 


응? 이게 무슨 소리야? 설마 내 프로젝트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텀블벅의 ‘내가 만든 프로젝트’에 들어가봤다. 세상에, 이럴 수가! 3일 뒤 10월 15일에 오픈할 예정이었던 프로젝트가 공개 상태로 바뀌어 있었다. 어제 저녁에 내가 과연 저장 버튼을 눌렀던가? 잘 안 보여서 찾아헤맨 건 기억나는데…그 뒤가 흐릿했다. 웹툰을 보러 갔던가, 유튜브로 흘러들어갔던가. 이런 쳐죽일 놈의 손가락을 봤나! 


아니다, 지금 와서 과거를 헤집어봐야 무슨 소용인가, 일단 수습부터 해야 한다. 텀블벅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마치 불이라도 난 듯한 다급한 목소리로 나는 상담 매니저한테 물었다. 실수로 프로젝트가 공개되어버렸는데 혹시 지금이라도 닫을 방법이 없느냐고, 아직 프로젝트 소개 글도 다 못 썼고, 상품 구성도 수정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 매니저는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창작자님, 프로젝트는 한번 공개하고 나면 닫을 수가 없습니다. 정책상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저희가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어요.” 


얼굴에 핏기가 가시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발가벗겨진 채로 거리에 내동댕이쳐진 기분이었다. 이제 겨우 무대 뒤에서 배우들이랑 합 맞춰보고 무대 의상을 수선하고 있는데, 갑자기 막이 올라가고 청중들 앞에서 공연을 해야 하는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참고로 나는 무대공포증이 있다. 그래서 미완성인 상태로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한다. 비슷한 상황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이 밀려와서 작년에는 공황장애 직전까지 갔더랬다. 그때처럼 손이 벌벌 떨렸다.  


이 와중에 텀블벅 후원 액수는 계속 올라갔다. 텀블벅 공개예정 프로젝트로 걸어둔 터라, 오픈되고 나면 신청자한테 자동으로 알림이 뜬다. 이걸 보고 지인들이 하나둘 후원하러 오고 있었다. 카톡, 카톡, 카톡. 그 노란 창 앞에서 나는 지구 밖으로 도망치고 싶어졌다. 부끄러워서 죽고 싶은 그 순간, 나는 ‘수치사’라는 조어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었다. 어쩐지 오늘은 기똥차게 운수가 좋더라니! 



내 똥을 내가 치워야 한다는 참혹함


반쯤 정신 나간 채로 앉아 있는데 디자이너 친구가 눈에 힘을 빡 주고 또랑또랑하게 말했다. “작가님, 괜찮아요. 수습할 수 있어요. 지금 당장 급하게 필요한 이미지가 뭐예요? 제가 오늘 할 수 있는 건 다해서 드릴게요. 어차피 내일까지 작업해서 드리려고 했는데 그거 좀 당겨서 하면 되잖아요. 수정할 수 있으니까.” 호랑이 굴에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다. 정신 차리고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텀블벅은 프로젝트가 공개된 뒤에도 바꿀 수 있는 게 있다. 


첫째, 텀블벅 소개 글. 프로젝트를 설명하는 글과 그림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둘째, 텀블벅 상품. 후원자가 한 명이라도 후원하기로 선택한 상품이라면 상품 구성과 액수를 바꿀 수 없지만, 만약 아무도 선택하지 않은 상품은 바꿀 수 있다. 예를 들어 책과 수건 굿즈를 합쳐서 1만 8천 원에 팔기로 했지만, 프로젝트를 공개한 시점에 아무도 이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관리 페이지에 들어가서 가격을 1만 7천 원으로 낮추거나 수건 대신 양말을 주는 식으로 품목 자체를 바꿀 수 있다. 


절대 바꿀 수 없는 것은 텀블벅 시작일과 마감일이다. 원칙적으로는 프로젝트명도 바꿀 수 없다. 하지만 매니저한테 상황을 설명하고 읍소하면, 프로젝트명 정도는 수정해주기도 한다. 나는 이미 고객센터에 전화해서 예정보다 프로젝트가 일찍 공개된 상황임을 어필해두었고, 이런 나를 딱하게 여겼는지 매니저는 단 한 번 수정할 기회를 주었다.  


어쨌든 내가 싼 똥은 내가 수습해야 한다. 난 어른이고 게다가 출판사 대표니까. 일단 주변인들에게 최대한 홍보 자제를 부탁했다.(널리고 알려도 부족할 판에 텀블벅 함구령이라니!) 디자이너가 이미지를 만들어서 건네줄 때마다 하나씩 실시간으로 업로드했다. 그렇게 급한 불을 끄고 나니 어느덧 해가 저물어 있었다. 소개 글을 써야 하는데 앉아 있을 기운도 없어서 퇴근했다. 


그리고 집에 와서 술을 마셨다. 남들은 나한테 괜찮다고, 지금 쓴 글도 괜찮다며 위로를 건넸지만 나는 안다. 지난 번 프로젝트 소개 문구에 비하면 너무너무 못 썼다는 걸. 이런 부족한 글을 지인들한테 내보이다니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다. 저자의 동생, 친구, 동료도 볼 텐데 이런 형편없는 홍보물을 내보이다니, 나를 뭐라고 생각할까!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저장 버튼만 누르면 되는데 어떻게 그걸 잊을 수 있을까. 그렇지 않아도 공개 예정일을 수차례 변경하면서 ‘저장하는 걸  깜빡해서 고생하는 멍청이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던 차였다. 그게 바로 요기 잉네? 그럼 그렇지, 행운이 왔으니 그만큼의 불운이 찾아올 줄 알았다. 일기로 오늘의 행운을 기억하기는커녕 낮의 괴로움을 술로 씻어내지 않고서는 잠들 수 없는 밤이었다. 



절망할 시간에 맛있는 거 먹고 잘래 


그래도 나이가 들어서 좋은 점은,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다음 날도 나는 여전히 나를 용서하지 못한 채, 도살장에 끌려가는 심정으로 작업실에 억지로 가서 앉아 있었다. 동료를 만나서 하소연하고, 여기저기 도움을 요청하고, 글을 끄적거리고, 밥 먹고, 산책하는 동안 나를 단죄하려는 욕구가 서서히 사라졌다. 조각 모음하듯이 머릿속도 정리되어갔다. 


하룻밤 더 자고 일어났더니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와 함께, 될 대로 되라지 하는 너털웃음을 닮은 오기가 남아 있었다. 프로젝트의 원래 공개일이었던 금요일 밤, 나는 비로소 텀블벅 페이지를 내 마음에 들도록 완성해냈다. 누더기 옷도 그러모아 입고 나니 그럴싸했다. 이미 내 부족한 모습을 본 사람은 할 수 없다. 이제부터라도 멋지게 입고 홍보를 시작해야지. 완벽주의자인 나는 오늘도 이렇게 불완전한 나를 용서하고 내보이는 법을 익혀가고 있다. 창작에 있어서 완성형이란 없는 거니까. 그래도 나 같은 사람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 텀블벅공개일 설정에 대해 몇 가지 팁을 정리해본다. 



※ 텀블벅 수치사 예방법 

① 텀블벅 프로젝트 공개일을 설정할 때, 실제 예정일보다 한 달 정도 뒤로 미뤄서 넉넉하게 잡을 것. 

② 텀블벅의 모든 요소를 수정하고 나서 상단 오른쪽에 있는 저장 버튼을 반드시 누를 것.

③ 텀블벅 공개 예정일은 전날까지만 수정 가능하고, 그 이후로는 자동 공개된다는 점을 기억할 것. 


※ 텀블벅 수치사 대처법 

① 아직 후원자가 선택하지 않은 상품 카테고리가 있다면, 그것부터 수정한다. 

② 만약 프로젝트명을 수정해야 한다면 운영진 근무시간 내에 연락을 취할 것. 

③ 소개 글이든 이미지든 준비되는 대로 실시간으로 업로드한다. 

④ 창작자 자신의 실수를 받아들이고 용서한다. 

⑤ 실수조차도 홍보의 기회로 만들어라. 그러면 자신을 좀 더 빨리 용서할 수 있다.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에서 프라우드먼의 모니카는 이렇게 말했다. "이겨낼 수 있도록 집중하면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기적은 항상 일어나는 일이니까." 어쩌면 내가 이겨내야 하는 것은 내부에 있는지도 모른다. 실수를 받아들이고 불완전함을 용서하고 한발 나아가는 속에서 우리는 기적 같은 새로움을 만들어나갈 수 있으니까. 마음대로 안 풀리면 일단 먹고 자자.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겄지. 


무사히 할머니가 되고 싶은 1인 생활자의 모험기 

<희망을 버려, 그리고 힘내>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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