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이자 창작자로 살아간다는 것①] 서지형 작가 인터뷰
엄마이자 창작자로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돌봄과 창작 사이의 균형은 어떻게 맞춰갈 수 있을까. 임신을 확인한 순간부터 내 머릿속을 사로잡은 질문들이다. 그간 내가 지켜온, 1인 출판사 대표이자 구술생애사 작가라는 정체성을 위협하는 일생일대의 '사건'을 마주하고 나니, 새삼 작업실의 동료들이 다르게 보였다. 나와 함께 마포출판문화진흥센터에서 창작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여성 작가들에게 인터뷰를 청한 배경이다.
첫 번째 인터뷰의 주인공은 서지형 작가다. 서지형 작가는 불사조 같은 사람이다. 큐레이터로 일하며 비엔날레 팀장으로서 전 세계를 누빌 기회를 거머쥔 순간, 지옥 같은 입덧이 시작되어 모든 일정을 중단해야 했다. 첫째를 얼마간 키워놓고 보니 덜컥 둘째가 생겼다. 남편을 따라 미국에 가서 아이와 함께 온갖 미술관을 돌아보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 끝에서 아이들과 함께 인생 2라운드가 시작되었다. 그녀는 육아하는 7년간 아카이빙해둔 아이들의 그림을 재해석해, 예술 교육 안내서 <의자와 낙서>를 내놓으며 작가로 부활했다. 이후 드로잉 안내서 <흔들리는 선>에 이어, 현재 세 번째 책을 준비하고 있다. 이 책들을 내놓기까지 그녀는 어떤 나날을 보냈을까. 서지형 작가가 지금껏 걸어온 길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봤다.
15년차 큐레이터, 7년의 공백 이후 작가로 돌아오기까지
: 국민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미술이론 석사 과정을 마친 후 독립 큐레이터 겸 전시 코디네이터로 활동했다. 근래에는 개개인의 자유로운 선과 색, 표현을 끌어내는 드로잉 워크숍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저서로 예술 교육 안내서 <의자와 낙서>, <흔들리는 선>이 있다.
요즘 작업실에서 얼굴 보기가 힘들어요. 어떻게 지내세요?
올해 둘째 아이가 초등학교 들어갔거든요. 아무래도 두 아이 모두 초등학생이다보니 작업실에 나가기가 어렵네요. 일주일에 이틀은 아이랑 보내요. 대신 외부 일정 위주로 짜는데, 요즘은 주로 리움 미술관에서 어린이 교육을 하고 주말에 워크숍과 강의 등을 하고 있어요.
바뀐 생활 리듬에는 만족하시나요?
올초까지 해도 국립현대미술관 용역을 비롯해 잡지 필진으로 기고하고, 뉴스레터 발행에, 워크숍, 개인 작업까지 동시에 하느라 얼굴이 시꺼매지도록 일했어요. 올해 1학년 엄마가 되면 일을 많이 못할 테니까 그전에 일을 많이 해놓자 싶었던 거죠. 첫째를 길러보니까 1학년이 참 짧더라고요. 그때가 참 예뻐요. 손도 작고, 다 작고. 그래서 둘째랑 시간을 더 보내려고 일을 줄여놨거든요. 근데 애가 학교에 너무 빨리 적응한 거 있죠? 일을 지레 줄였나 후회하기도 했어요.
리움 미술관에서는 어떤 작업을 하시나요?
리움에서는 미술, 연극, 음악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와 팀을 꾸려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워크숍을 진행해요. 저는 시각 예술팀을 이끌며 퍼실리테이터 두 분과 함께 <먼지>라는 그림책을 선택해서 팀 작업을 하고 있어요. 제가 쓴 드로잉 안내서 <의자와 낙서>를 워크숍에 녹여냈어요. 드로잉이라는 게 나이 불문, 자신의 개성과 감각을 표현하기에 좋은 수단이거든요. 저는 아이들이 그림으로 자기 느낌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예술을 즐길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어요.
: <의자와 낙서>는 예술을 즐기는 습관을 길러주기 위한 드로잉 안내서다. 이 책에는 아이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고 대화를 나눠온, 저자의 실제 경험이 담겨 있다. 서지형 작가는 마음에 드는 드로잉을 식탁 의자 뒷벽에 붙여놓고 감상하곤 했는데, ‘의자와 낙서’라는 책 제목도 여기에서 온 것이다.
작가님의 드로잉 워크숍에 참여했을 때, 그림 그리는 게 참 재미있더라고요.
미술은 원래 재미있는 거예요. 심각하지 않아요. 그런데 워크숍에서 만난 사람들은 내가 잘 가르쳐서 그런지 알더라고요.(웃음) 나는 그냥 마음대로 하게 해줘요. 졸라맨 그려도 칭찬해주거든요. 내 역할은 괜찮다고 잘했다고 하는 게 다예요. 가끔 과한 칭찬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어요. 왜 칭찬만 하느냐고. 하지만 현대의 미술은 행위 그 자체가 답일 수 있거든요. 내가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그 자체에 집중하면 되니 그 무엇을 표현하든 칭찬 외에 해줄 조언은 없는 거죠.
작가님은 어릴 적부터 미술이 재미있었나요?
그럼요, 그림 그리는 자체를 재미있어 했죠. 저는 일반고 다니면서 미대 입시를 좀 늦게 시작한 편이에요. 그런데 대학 가서 예고 출신들과 비교하다 보니 자존감이 낮아졌어요. 그림 그리는 자체에 대한 두려움도 생겼고요. 그래서 대학원을 이론으로 갔잖아요. 결과적으로 제가 이 바닥에서 제일 오래하고 있어요. 20년 머물렀더니 이렇게 되었네요.(웃음)
그 긴 세월을 어떻게 버티셨는지 궁금해요.
졸업하고 큐레이터로 일할 때는 바빠서 정신없었어요. 내가 미술을 좋아하나 의문도 들고, 일도 고단하더라고요. 요즘에 비유하기를 “바쁜 식물로 15년 살았다.”고 그래요. 욕심도 없었어요, 저는. 그저 다람쥐처럼 성실하게만 살았지. 목적지가 있는 건 아닌데 제가 지구력이 있어요. 큐레이터는 10년 일해도 급여가 250만 원이거든요? 석사도 졸업해야 하고, 경쟁도 치열해요. 그래도 저는 중간에 그만두지는 않는 사람이었던 거죠. 엄청 성실하게 일하다보니까 세상에서 한 번씩 기회를 주긴 주더라고요. 고생고생해서 청주 공예비엔날레 팀장이 됐는데 임신이 떡하니 된 거예요. 그리고 입덧 지옥이 시작됐어요. 일 그만두고, 애 낳기 직전까지 입덧하느라 정말 힘들었어요.
그래도 첫째 때는 알바도 간간이 들어오더라고요. 전시할 때 코디를 한 달 한다거나 미술 협회 매니저도 하고 그랬어요. 둘째 낳고는 그것도 드물어지고, 경력이 단절됐어요. 어지럼증도 생겼고요. 돌아보니까 그다지 가고 싶은 데도 없더라고요. 저 때만 해도 옛날 미술계였거든요. 요즘은 협업도 있고 접근 방식이 다양하잖아요. 그때는 경쟁을 하려고 해도 할 마음도 안 생기는 필드였고.
그러다가 <의자와 낙서>를 내놓으셨어요. 어떻게 책을 쓸 생각을 하셨어요?
늘 그런 마음은 있었어요. 내가 글을 써보면 어떨까. 큐레이터 할 때는 전시 서문 두 장만 쓰잖아요. 온전한 내 것을 해보고 싶더라고요. 육아하는 7년간 애들 그림을 아카이빙하면서 생각해둔 게 있었어요.
그러다 둘째 어린이집에서 출판하는 사람을 만난 거예요. 목욕 가려고 나와서 추레한데 출판업에 종사하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니 자격지심 같은 게 생기더라고요. 책과 관련된 대화를 나누었는데 뚜렷한 목적지가 없는 내 미래에 대해 부풀려 대답해버렸죠. 무엇을 쓸지 모르는 상태에서 “테이트 모던에 책을 넣고 싶다.”는 다소 황당한 답변을 했던 기억이 나요. 아이들 그림 아카이빙 해둔 걸 재해석해서 글을 써볼 거라고 선언 아닌 선언을 해버린 다음날, 그분은 출판사와 저를 연결해주었어요. 당장 내일 출판사랑 미팅해보지 않겠느냐고. 처음으로 설렜어요. 제가 경력이 6년간 단절됐었잖아요. 그동안 아무도 나한테 일하자고 한 적이 없었는데, 그 짧은 5분간 나눈 대화로 출판사랑 미팅을 하게 된 거예요.
그 다음날 출판사 만나러 가는데 신랑이 말하길 사기꾼일 거래요. 글 쓴 것도 없고 애들 그림 모은 게 다인데, 오늘 얘기하고 내일 당장 미팅하는 게 말이 되냐고, 책 내준다고 돈 요구하면 그냥 오래요. 나도 미심쩍어하면서도 일단 새벽 3시에 일어나서 회의를 준비했어요. 기획안도 따로 없이, 그림 10장 들고 가서 머릿속에 구상해둔 걸 설명했어요. 내가 큐레이터를 했으니까 기획을 엄청 해봤잖아요. 그 경험을 토대로 설명했어요. 그랬더니 흔쾌히 써보자고 그러더라고요. 다행히 돈 내라는 말은 안 하고.(웃음) 만나보니까 그 업계에서 유명한 출판사더라고요. 기획안도 따로 없이, 그림 10장 들고 가서 머릿속에 구상해둔 걸 설명했어요. 내가 큐레이터를 했으니까 기획을 엄청 해봤잖아요. 그 경험을 토대로 설명했어요. 그랬더니 흔쾌히 써보자고 그러더라고요.
그러고 나서 제가 책 쓰겠다고 미국 휴스턴으로 가버렸어요, 한 달을. 그전에도 남편이랑 같이 로스앤젤레스에서 2년 살다 왔거든요. 그런데 애 키우느라 생활에 매몰돼서, 휴스턴에 있는 로스코 채플에 엄청 가보고 싶었는데 거기도 못 가고 돌아왔단 말이에요. 식구들은 그러죠. 한국에서 글 쓰면 되지 뭐 하러 미국까지 가느냐고. 그래서 제가 남편한테 말했어요. 당신도 7년 일하고 1년 안식년 받아서 미국 가지 않았느냐, 나도 당신과 이만큼 살았으니까 한 달만 시간을 주라, 이렇게 ‘딜’을 했어요. 그리고 시부모님을 구워삶았죠, 둘째를 한 달만 봐달라고. 시부모님 심정이 그랬대요. 어차피 해도 안 될 건데, 못하게 하면 나중에 한이 될 테니 하는 데까지 하게 두자 싶으셨대요.
미국 가서 A4로 17장을 써왔어요. 목차 쓰고 원고 쓰니까 그렇게 되더라고요. 출판사에서 괜찮다고 계속 써보라고 했어요. 그런데 회의가 진행될수록 서로의 관점이 다르다보니 글이 점점 산으로 가는 거예요. 글이 애초 기획했던 분량의 세 배가 됐어요. 그런데도 내 마음에 안 차더라고요. 출판사에서 원하는 방향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고. 회의를 1년 동안 하다가 서로 지쳐서 그만뒀어요. 그러다 지금의 출판사인 케이스스터디와 연이 닿아서 책으로 내게 된 거예요.
글 쓰는 건 힘들지 않으셨어요?
글 쓰는 자체는 어렵지 않았고, 시간과의 싸움인 거죠. 그때는 애가 더 어렸고 가족의 지지를 받는 상황도 아니었으니까. 나도 내가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고. 그래도 성실하게 썼어요. 제가 애기들 어릴 때도 보고 싶은 전시는 대부분 안 놓치고 갔어요. 그리고 카카오스토리에 버릇처럼 세 줄을 하루도 안 빼고 썼어요. 그걸 구독하는 친구, 큐레이터 들이 좀 있었는데, “지형이는 계속 일하고 있는 사람 같아.” 그랬어요. 기고를 한다든지 책을 낸다든지 그 방법은 몰랐지만, 카카오스토리 세 줄 쓰기든 아카이빙이든 꾸준히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계속)
서지형 작가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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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현 작가 인터뷰] 타고난 이야기꾼, 출판사 대표가 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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