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클린 브리지에 가면

by 해야

내가 뉴욕에 산다는 것을 자주 잊는다. 그제와 어제와 오늘이 매일 똑같은 탓일 것이다. 아침에 겨우 눈을 떠 지하철에서 내내 눈을 붙이다 사무실에서 여덟 시간을 보낸 후 반나절은 늙어버린 얼굴로 다시 지하철에 몸을 싣고 작은 집으로 돌아오기.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조금 쉬면 벌써 열시다. 조금이라도 더 깨어있지 못하는 게 아까워 죽겠지만 내일 아침의 괴로움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억지로 침대에 눕는다. 유튜브에서 백색 소음을 대신할 영상을 골라 작게 틀어놓고 순간 정신이 들면 다시 아침이 와있다. 나의 하루는 한국에서 빨간 광역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다니던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차이점이라면 눈을 떴을 때 거실에서 흘러나오는 티브이소리와 엄마의 목소리가 없다는 것, 지하철 승객들의 머리색이 모두 까맣지 않다는 것, 피부와 머리색만큼 옷차림 역시 각양각색이란 정도일까.



오히려 타지인들을 통해 내가 뉴욕에 있음을 문득문득 자각한다. 한국에 사는 한 친구는 날 뉴요커라고 부른다. 술을 한 잔 걸치고 가끔 전화를 거는 그는 술기운이 가득한 채로 연신 뉴요커, 뉴요커를 외친다. 그가 날 칭하는 ‘뉴요커’라는 세 음절에는 꽤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뉴욕에서 일하는 커리어우먼, 화려한 뉴욕에서 허술하게 사는 웃긴 애, 맨날 힘들다면서 한국에 돌아오지 않는 이해 불가한 상대 같은 것들이다. 그 모든 뜻이 합쳐져 뉴요커란 눈이 높고 거만한 여자란 한 마디로 귀결된다. 정작 그와의 대화에서 단 한 번도 뉴욕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본 적이 없던 나는 억울하지만 별 수가 없다. 뉴요커의 진정한 속 뜻은 “네가 보고 싶은데 우린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임 또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한 번은 뉴욕에서 차로 네 시간 거리의 메릴랜드에 사는 사람과 얘기할 일이 있었다.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냐는 지인의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영화 같네요.”

이해하지 못할 이유가 없는 다섯 글자를 뇌가 처리하는데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3호선을 타고 출근하는 일이 영화 같다고 하는 말을 들은 것 같았다. 뉴욕의 지하철이 영화 같았던가 생각하려고 빠르게 뉴욕의 지하철을 떠올렸다. 낡고 더러운 열차와 쓰레기들, 가끔 마주치지만 이제 놀라지도 않게 된 거대한 쥐, 툭하면 노선이 바뀌거나 운행하지 않는 제멋대로인 지하철. 잠시 떠올렸는데도 지하철 플랫폼의 지린내가 옆에서 나는 것 같았다. 그저 이동수단일 뿐인 뉴욕의 지하철이 누군가에게는 영화의 한 장면일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이 갑자기 새로웠다. 나의 평범한 일상이 누군가의 낭만이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뉴욕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리라. 하루를 무탈하게 살아내는데 급급해 나를 둘러싼 뉴욕이란 도시를 오래도록 잊고 지내왔음을 문득 깨달았다.



뉴욕을 떠올리면 자동으로 재생되는 수많은 이미지가 있다. 타임스퀘어의 휘황찬란한 광고판들, 아이 러브 뉴욕 티셔츠, 바둑판처럼 교차되는 맨해튼의 거리, 빽빽한 빌딩숲으로 그려지는 스카이라인, 피자와 쥐와 비둘기, 쓰레기가 널린 길거리, 온갖 인종과 국적의 사람들이 꿈을 품고 찾아오는 곳, 예술의 도시 등등. 잠시도 멈추지 않는 뉴욕에서는 항상 새로운 이벤트가 일어나고 유행이 시작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뉴욕을 찾고 또 뉴욕을 떠난다. 그렇게 정신없는 뉴욕 한가운데에 살고 있음에도 시간이 흐르고 하루하루 먹고사는데 치이면서 뉴욕이란 도시에 점점 무감해져 버렸다. 그래서 영화나 미드에 뉴욕이 나올 때면 내가 저곳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도저히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뉴욕이 아니라 어디 먼 곳에서 살고 있는 것 같은 내게 화면 속 도시는 그렇게 낯설 수가 없다. 익숙함 때문인지 미디어 속 뉴욕의 화려함과 내 현실의 간극 때문인지 모르겠다. “뉴욕에 살지만 뉴욕에 살지 않습니다” 같은 현생을 살고 있는 뉴요커니까 말이다.



그런 이유로 제3의 인물이나 매체를 통해, 즉 역설적이게도 뉴욕 밖에서 뉴욕을 바라봐야만 나는 내가 사는 도시를 가장 강렬히 실감한다. 무엇이든 적당한 거리에서 바라보는 것이 더 아름다운 것과 비슷한 맥락일지도 모르겠다. 무언가를 깊숙이 알아가고 나의 마음이 개입될수록 괴로움이 생겨나는 것처럼 뉴욕과 나의 관계도 그와 비슷한 것은 아닐까. 그러니 거꾸로 생각해 보면 나는 뉴욕을 너무나 뜨겁게 사랑했던 것이다. 이십 대부터 짝사랑했던 도시와 불같은 열애의 시간을 통과한 후 이제는 애증이 된 상대는 조금 멀리서 바라봐야 그 아름다움에 집중할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잊고 있던 애틋함과 가슴 절절했던 시간들까지 다시 떠오른다. 아, 내가 저 멋지고도 이상한 도시에 살고 있다!



그래서인지 브루클린 브리지는 십 년 내내 내가 뉴욕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로 손꼽는다. 브루클린 브리지 위에 올라 맨해튼을 향하는 방향으로 다리를 건너면 시간에 따라 변하는 하늘과 고층빌딩들이 만들어내는 장관을 꽤 가까운 거리에서 눈에 담을 수 있다. 이직 해가 지지 않았을 때 하늘이 어두워지기 이삼십 분 전 즈음이 다리를 건너기 시작하는 가장 좋은 타이밍이다. 브루클린 브리지 위에 올라 맨해튼을 향하는 방향으로 다리를 건너기 시작하면 수많은 강철 케이블들이 거미줄처럼 이어진 현수교의 장관에 압도된다. 다리를 건너는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아치형의 타워를 향해 빨려 들어가듯 함께 걷기 시작하면 어느새 브루클린을 지나 허드슨 강 위를 걷고 있다. 밝은 하늘 아래의 맨해튼 전경을 충분히 즐기며 타워를 몇 개 지나치다 보면 어느 순간 하늘이 어두워지고 깜깜한 어둠 속에서 눈앞에 쏟아지는 맨해튼 야경이 펼쳐진다. 꺼지지 않는 빌딩들의 불빛들을 바라보는 그 순간만큼은 내가 지금 뉴욕에 있다는 것에 마음이 터져버릴 것 같다. 한 걸음을 떼는 모든 순간들이 영화의 프레임으로 바뀌어버리는 것 같은 벅참 마저 든다. 천천히 다리를 던너다보면 이곳을 건너던 과거의 내가 차례로 스쳐 지나간다. 다리 위에서 청춘을 외치던 이십 대 초반의 어느 밤, 첫사랑과 손을 꼭 잡고 찍은 전신사진, 불 켜진 빌딩들을 바라보며 느꼈던 허탈함과 미래에 대한 불안, 이 십년지기 친구와 함께 걷던 날의 차가운 밤바람까지 모든 순간들이 다리 위에 그대로 걸려있는 것 같다. 브루클린 브리지를 걸으면 잊고 있던 뉴욕과 잊고 있던 나를 모두 만나는 것이다.



소중한 사람들이 뉴욕을 방문하면 내가 사랑하는 이 도시를 보여주기 위해 꼭 브루클린 브리지를 함께 걷는다. 마치 오래전 뜨겁게 사랑했던 옛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자 봐봐, 저 사람이 내가 지지고 볶고 울고 쫓아다닌 사람이야. 내가 사랑하고 미워하는 이 도시의 아름다움을 당신도 느끼길 바라며 나는 항상 누군가와 다리 위를 걸었다. 내일 아침 겨우 이불속에서 기어 나와 다시 냄새나는 지하철 플랫폼에 서 있으면 이제야 다시 떠올린 뜨거웠던 사랑은 또 기억 속으로 사라지겠지. 그래도 뉴욕을, 뉴욕에 사는 나를 만나고 싶을 때에는 언제든 지하철을 타고 브루클린 브리지를 찾아가면 된다. 그 또한 다행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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