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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성균 Feb 12. 2016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 리뷰

용서는 가족을, 감사는 행복을

b.

 오랜만에 군대에서 휴가를 나왔을 때의 일이다. 상수동 근처에서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집에 가기 위해 들렀던 합정역 화장실에서 그만 지갑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화장실에서 나와 지갑이 없어졌다는 걸 알아차리는데 걸린 시간은 정확히 30초. 다시 화장실로 돌아가 내가 있던 자리를 한참이나 뒤지고, 역무실에 가서 분실물도 확인해봤지만 지갑은 어디에도 없었다.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 겨우겨우 집에 돌아오긴 했는데, 역시나 잠은 오질 않았다. 술기운을 이미 빌린 상태인데도, 잠자리에 누워 하는 것이라곤 오로지 후회의 이불킥뿐. 이럴 날엔 잠자기를 잠시 포기하고 영화를 보는 수밖엔 없다.

 그렇게 한참을 찾아 헤맸다. 나의 후회와 불안과 염려를 잠 재울 수 있는 영화가 뭐가 있을까. 검색하고, 또 검색하다 우연히 말도 안 되는 제목의 영화를 발견하게 됐다. 제목이 나를 그 영화로 인도했다. 그 말도 안 되는 제목의 영화는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이었다. 이 영화를 보면 왠지 기적처럼 지갑이 돌아올 것만 같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시작된 영화 감상은 생각지도 못했던 감동과 알 수 없는 따뜻함을 선사해주었고, 덕분에 난 지갑 없이도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었다. ¹


 이것이 내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를 보게 된 첫 번째 날이었다. 이 날 보았던 영화가 어찌나 좋았는지 다음 날 바로 <공기인형>을 보게 됐고, 그렇게 난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의 '짝수설'을 알게 됐다. 영화의 평가가 홀짝으로 나눠진다니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론 수긍하게 된다.

 가장 최근에 나온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짝수번째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도 그렇게 보게 됐다. 감독님의 짝수번째 영화니깐 일단 무조건 보려고 했지만, 왠지 이 영화는 극장에서 보고 싶었다. 이것이 배우의 힘인가 보다.

 그나저나 이토록 강한 배우의 힘에도 일본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르지 못했다니 [러브 라이브!]라는 매체가 강한 건가, 오타쿠들이 강한 건가. 그 힘이 우리나라에도 전해질까 무섭다.



1.

 영화는 서로 다른 세 자매의 일상을 보여주며 시작된다. 첫째, 둘째, 셋째가 전형적인 자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부모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집을 나가 다른 살림을 차린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 역시 집을 나가고, 그렇게 티격태격하면서도 끈끈하게 살아가는 세 자매에게 아버지의 부고가 전해진다.

 15년 만에 찾아가게 된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세 자매는  이복동생을 만나게 되고, 썩 믿음이 가지 않는  이복동생의 친모를 보고 첫째는 집안에 네 번째 식구를 들이게 된다.


2.

 자매의 부모 이야기만 놓고 보자면 전형적인 막장이다. 근데 자매의 이야기만 놓고 보면 드라마가 된다. 자매는 단순히 '가족'이라는 집합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들의 복잡한 가족사가 만들어낸 새로운 집합을 '함께'라는 방법으로 풀어나간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이미 정해진, 애초부터 주어진 가족이라는 개념과 다르게, 세 자매는 서로를 통해 다른 방식으로 가족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정하고 그렇게 네 번째 식구에게 쥐어준다. 또 다른 가족을.

 사실 이런 드라마 장르가 자칫 잘못하면 걷잡을 수 없는 잠의 블랙홀로 빠져들게 만들고, 이를 무마하기 위해 쓸데없이 눈물을 쏟아내려 한다거나 웃음을 자아내려 이것저것 이야기를 첨가하다 보면 양념이 과해 못 먹는, 못 보는 영화가 되고 만다. 근데 이상하게 이 영화는 지루하지도 않을뿐더러 지나치게 웃기지도 않는다. 심지어 억지 감동도 없다. 그런데 영화를 보는 내내 입가에 소소한 미소를 띄어준다. 잠깐도 아니고 영화 내내 이런 미소가 가시질 않는다.

 평범하지 않은 가족의 이야기에 애써 특별함을 담아내려 하지 않아서 그런 건지, 평범한 이야기 구조에도 보는 내내 네 자매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된다.


3.

 이야기는 평범하지만 영화에 등장하는 배우들은 절대로, 정말 티끌만큼도 평범하지 않다. 비현실적인, 정말 세상 남자들의 이상형을 모조리 모아놓은 이런 자매들은 없다는 걸 내심 되새기면서도 정말 가족같이 느껴지는 그들의 모습에 현실과의 괴리감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없다.

 배우들이 연기한 네 자매는 각자의 성격이 완벽하게 구분되어 있다. 가장의 모습을 보여주는 첫째, 철없는 둘째, 귀염둥이 셋째, 그리고 이 셋의 모습을 모두 합쳐놓은 넷째까지 모두가 저마다의 매력을 영화 내내 보여준다. 캐스팅도 어쩜 이렇게 잘해놨는지, 얼핏 보면 전혀 안 닮은 것 같다가도 계속 보다 보면 묘하게 서로가 닮아있다.

 평범한 이야기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어주는 것이 또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영화 속 배경이 된 '카마쿠라'다. 아기자기한 풍경에 일본스러움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일본 영화를 볼 때면 가끔 설명하기 어려운, 정말 '일본스러움'이라는 단어로 밖에 표현히 안 되는 색감과 분위기와 풍경들이 있는데, 지금까지 봤던 일본 영화 중에 가장 일본스러운 모습들을 보여준 곳이 카마쿠라인 것 같다.

 이곳에 살고 있는 영화 속 모든 이들이 부러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4.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평범한 일상을 통해 프레임 안에 고스란히 담아낸다. 나와는 다른 공간, 다른 시간,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데 그들의 이야기에 어느새 교감하게 된다. 그것이 가족이라는 집합을 통해 전달되어져서 그런지 공감은 커지고, 반감은 줄어든다.

 평범한 일상에서 그들과의 공감을 통해 전해지는 메시지는 꽤나 강렬하다. 담담하지만 강한 어조로 무언가를 툭하고 던져놓고 가는데, 무게가 꽤나 무겁다. 쿵하고 머릿속에 강하게 자리 잡은 충격이 가슴까지 전해진다. 이번 영화에선 가족을 중심에 두고, 그 속에서 가장 꽃피우며 살아가야 할 '용서'와 '감사'라는 두 가지 감정에 중점을 둔다. 불꽃처럼 금방 사그라들 미움이라는 감정을 잠시 접어두고, 진정 꽃피워야할 것은 무엇일지에 대한 이야기가 역시나 툭하니 던져진 듯하면서도 가슴 한켠 깊숙이 자리 잡고 만다.

 개인적으로 작년에 봤던 영화들 가운데 가장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있는 영화다. 지금도 이 영화를 볼 때의 그 애틋하면서도 편안한 감정이 오롯이 전해진다. 언젠가 극장에서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열일 제쳐두고 곧장 달려가서 보고 싶을 정도로 강한 여운이다.

 이 여운이 슬슬 가실 때쯤 <걸어도 걸어도>를 보았다. 확실히 짝수번째 영화들만 챙겨보는 느낌이다. '이번엔 홀수번째 영화인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봐야지'라고 속으로 다짐하면서도 <아무도 모른다>를 먼저 볼 것이다. 사람의 무의식이 이렇게나 무섭다. <공기인형>이 무서운 건가.




★★★★



¹p. s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을 보고 며칠 뒤에 지갑이 소포를 통해 집으로 전해졌다. 기적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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