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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영 Mar 03. 2019

기획자를 위한 최적의 아지트

콘텐츠의 다양성은 무엇을 기준으로 할 수 있을까

뒤늦게 합정동 종이잡지클럽에 다녀왔다.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한 확신, 내가 좋았던 경험을 타인과 나누고, 즐거움을 확장하고 싶다는 확신. 오래 준비하고 공들인 전문가의 공간이었다. 진작에 와보지 않은 것이 아쉬울 정도로 여러 포인트가 좋았다. ‘콘텐츠 플랫폼이 고객에게 만족감을 주려면 대체 콘텐츠는 어떻게/얼마나 다양해야 하는가’ 하는 요즘의 고민에도 작은 실마리를 얻었다. 진지하게, 강력 추천해준 서영에게 고마움을!


1. 정말로, 충분히 많은 잡지

서영의 추천 포인트 중 가장 첫 번째는, 잡지가 ‘정말’ 많다는 것. 양quantity을 눈으로 확인하는 경험의 힘이 있다고 했다. 전부 내 관심사는 아니더라도 물리적으로 다양한 종류의 잡지를 마주하니, 진짜 잡지 전문공간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실제로 함께 간 의심 많은 무원 역시 특정 분야의 잡지를 의식적으로 구비해놓은 것을 확인하고 공간에 대한 신뢰감이 생겼다고 했다.


공간에 없는 잡지에 대해 운영자에게 물어보면, 집에 있다거나 구독 예정이라는 반응이 돌아온다. 운영자는 온갖 종류의 잡지를 '알고'있고, 염두에 둔 채로 이 공간을 운영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정된 범위 내에서의 취향 제안이 아니라, 이 공간을 꾸준히 방문하고 콘텐츠를 탐독하면 나의 취향과 지식이 확장될 거라는 신뢰감을 주었다.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각 잡지의 과월호가 최소 1-2년어치 확보되어 있었던 것. 덕분에 해당 매체의 관심사와 주력 이슈에 대해 충분히 독파할 수 있다. 종류의 다양성으로 여러 주제를 한눈에 볼 수도 있고, 특정 주제를 골라 과월호를 모아 놓고 깊이 있게 읽을 수도 있다. 연재물의 경우 모아놓고 읽었을 때에만 얻게 되는 특별한 인사이트가 있다.

종이잡지클럽에는 온갖 종류의 잡지가, 150여 종가량 비치되어 있다.

콘텐츠든, 서비스든, 그리고 제품이든 기획의 일은 규격화하기가 정말 어렵다. 일의 과정 중에는 기획을 완성하는 연결고리가 어디에서 나올지 몰라서, 그 한 조각을 찾아 방황하는 경우가 많다. 전혀 다른 분야나 주제에서 해답을 찾기도 하고, 조금 더 깊게 파고들어야 마지막 퍼즐의 조각이 나오기도 한다.


늘 횡으로 또 종으로 넘나 들며 사고해야 하는, 넓으면서도 깊은 영감의 흡수가 필요한 기획자와 마케터들에게는 고마운 아지트가 될 것 같다.

심지어 잡지는 다음 주, 다음 달에 새로운 책이 또 나온다. 매달 새로운 콘텐츠가 채워진다. 열심히 가서 읽어야지.

이날 3종류의 잡지를 훑어보았는데, 그중 한 종류는 1년 치를 쌓아두고 필요한 내용들을 메모해가며 읽었다. 방송 기획안을 쓸 때 도서관을 자주 이용하던 때가 떠올라서 굉장히 즐거웠다.


2. 정말로, 읽기에 좋은 공간

'종이잡지클럽'이라는 이름만큼 공간도 참 담백하다. 커피나 먹을거리는 일절 없다. 입장할 때 운영자가 취향이나 관심사를 묻는데 이것 역시 인사치레가 아니라, 정말 내가 읽을 만한 잡지를 더 정확히, 더 만족감 있게 추천해주기 위한 서비스다.


개인적으로 읽는 공간은 의자와 테이블, 그리고 소음과 조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처음 들어가자마자 생각보다 편해 보이는 좌석이 적어서 오래 못 앉아있겠다 싶었다. 넓은 테이블 자리에 앉았는데 의외로 의자와 책상의 조합이, 구체적으로는 의자 높이와 책상 높이가 정말 적절했다. 조명이나 음악 역시 인스타그래머블instagrammable 하기 위해 가져다 놓은 것이 아닌, 읽기에 몰입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실제로 사람들이 ‘잡지를 읽으러’ 와 주길 바라는 운영자의 의도가 느껴졌다.

외국의 세련된 도서관 같았다.

음료를 팔지 않는, 군더더기를 뺀 기능이 진짜 콘텐츠에 오롯이 몰입할 수 있게 해주는 요인 중 하나일 수도 있겠다. 정말로 잡지를 읽을 사람만, 읽을 만큼 읽고 가게 하는 곳. 실제로 우리 외에도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서로의 몰입에 방해하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그리고 다들 진짜로 '열심히' 읽더라.


3. 정말로, 잡지를 잘 아는 운영자

서영의 추천 포인트 중 하나가 운영자인 민성님의 세심한 맞춤식 큐레이션이었다. 몇 해 전 츠타야의 컨시어지에서 좋은 경험을 하고 난 뒤로는, ‘큐레이션’ 혹은 컨시어지에 대한 나만의 로망 혹은 기대가 있다. 내 관심사에 대한 1차원적인 추천이 아니라, 해당 키워드에 대한 큐레이터 나름의 재해석으로 내 관심사가 확장되는 경험. 오랜만에 '종이잡지클럽'에서 그 로망을 다시 누렸다. 워낙 다양한(a.k.a 눈 돌아갈) 잡지들이 많아서 스스로 원하는 잡지를 찾아보는 것도 충분히 즐거웠지만, 민성님의 사려 깊은 추천으로 내 요즘 고민거리에 대해 도움을 받은 느낌마저 들었다. 덕분에 신선한 정보와 시각을 얻었다.


잡지는 '맥락'이 만들어져야, 그리고 맥락을 많이 알면 알수록 더 많은 정보가 눈에 띄는 흥미로운 콘텐츠인 것 같다. 츠타야의 컨시어지에서도 느꼈던 것이지만, 종이잡지클럽에도 사서librarian와 같은 개념의 운영자가 있어도 좋겠다. 특정 날짜에, 특정 주제에 박식한 운영자가 잡지나 기사를 추천해준다면, 그 추천을 받기 위해서라도 일부러 해당 날짜에 시간을 내어 방문할 것 같다. 더 많은 양질의 콘텐츠를 흡수하기 위한 기초체력을 쌓는 마음으로 말이다.

민성님이 추천해준 읽을거리들. 매우 만족했다.

공간 방문자들에 대한 ‘진짜’ 관심, 본인이 잡지를 통해 누린 자유와 지적 즐거움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충만하게 전달되었다. 웬만하면 재방문 의사를 보이지 않는 무원씨조차 합정에 올 때마다 종종 와야겠다고 했다. 민성님은 Be my B에서 딱 한 번 뵈었는데, 그날의 풍경이나 이야기들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계셔서 놀라웠다.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는 일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느꼈다. 배워야지...


1일 이용권은 시간제한 없이 3000원이고, 심지어 지하철 역에서도 가깝다. 퇴근길 동선에 있었다면 정말 매일 1시간씩, 내일의 일을 위해 다시 에너지를 채우는 공간으로 사용했을 것 같다.  


서점이 더 이상 플랫폼, 혹은 지식과 정보의 허브 역할을 해주지 못하고 있는 때에 국내의 거의 모든 잡지와 해외 일부 잡지를 한 곳에 모아둔 곳이라는 점만으로도 아주 소중하다. 주로 이용하게 될 콘텐츠는 극히 일부이겠지만, 언제든 더 넓은 범위의 콘텐츠를 운영자에게 추천받거나, 내가 손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다는 것은 지적 유희의 무한한 확장 가능성을 기대하게 한다.  


최근에 가본, 국내의 기획된 공간 중 가장 만족도가 높았다. 잡지에 관심이 있건 없건, 콘텐츠를 다루는 사람들 모두에게 추천한다.  


사적인 메모

1. 콘텐츠의 양은 충분히 많아야 한다. 어쩌면 다다익선이다. 이때의 양quantity는 모든 콘텐츠가 선택받고, 관심사에 유효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언젠가 보겠지'라는 가능성으로 설득하기 위함이다. 구독자의 미래의 시간을 확보하기 위한 것. 구독을 끊지 않게 하는(계속 방문하게 하는) 유인이 되는 것. 넷플릭스나 왓챠도 다 보지 않지만, 언젠가 볼 것 같은 마음으로 구독을 유지하니까. 꼭 exclusive 할 필요는 없다. 많-은 것이 차별점.

2. 관심사로 자주 언급되는 것, 혹은 관심을 많이 받는 콘텐츠는 횡뿐만 아니라 종으로도 발굴해야 한다. 특정 분야에 exclusive 한 것은 이런 것에서 나와야 한다. 이 때는 얼마나 깊이, 얼마나 제대로 다뤘느냐가 차별점. 타깃에 대한 제대로 된 공부가 필요한 부분이다.

3. 1번과 2번을 기획자가 자유자재로 다루며 구독자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맥락을 만들어줘야 한다. '언젠가 보겠지'의 마음이 실현은 되지 않고 너무 길어지면 그 '언젠가'가 내게 영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구독자는 플랫폼을 떠날 것이다. 적절히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모든 인사이트 넘치는 정보들을 뒤로하고, 가장 좋았던 페이지와 캡션. “To See and Be Amazed...” 가지고 싶은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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