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건대 나는 편안한 상태, 평온을 선호하고 모험과 도전을 꺼리는 사람 중 하나다. 그런 성향 탓에 무엇을 할 때 온전히 나의 모든 것을 던지지 못한다. 사랑을 할 때도 절반만, 모험을 할 때도 절반만. 늘 실패해도 돌아올 곳을 남겨둔다. 귀촌도 그랬다. 아이들과 시골로 1년 살이를 떠나면서도 나는 소심했다. 한 달 있다가 다시 돌아와 볼까 했다가 아이들이 너무 좋아하니까 1년만 있다가 와볼까 하는 식이다. 도시에도 집을 두고, 시골에도 집을 두고서. 경제적 기회비용을 따지는 것보다 심리적 안정이 최우선이었으므로.
그렇게 어정쩡하게 시작한 귀촌 생활이었는데 돌이켜보니 태어나 가장 열심히, 뼛속까지 느끼고, 사랑하며 경험한 시간이었다. 조심스럽게 시작했지만 어느사이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충실히 쏟은 마음은 우리 가족의 한 시절을 온전하다고 느끼게 했다. 그충만한 경험이 '이 순간, 지금 여기'에서 온전히 웃고 울고 고민하고 사랑했던 시간으로 남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항상 경계인처럼 어정쩡한 나란 사람이, 몸과 마음을 던져 시골 생활을 사랑하고 아낌없이 누릴 수 있었을까. 스스로도 의문이다.
도시에서 나는 원하는 일을 명확히 아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안 되는 이유, 할 수 없는 이유도 명확히 아는 사람이기도 했다. 내가 원하는 일을 왜 할 수 없는지 변명부터 하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 익숙했다. 비슷한 이유로 변명하면서 희망하기에 괴리감을 안고 쳇바퀴처럼 사는 사람들, 그러니까 나와 비슷한 사람들끼리 어울리면서. 그런 어울림이 내겐 어떤 심리적 안정감을 주기도 했다. 가끔 어떤 상황에서도 하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는데 나는 그의 성취에도 꼬리표를 달았다. 그는 원래 돈이 있었고 해낼 수 있는 환경이었고, 원래 타고난 지능이 좋았고 뭐 그런, 부러움 섞인 질투. 그러다 지쳤다. 이렇게 말고 좀 더 솔직하고 건강하게 살고 싶었다. 자잘한 이유들의 총합도 있었지만 그저 회복하고 싶다는 마음, 오랜 여행을 떠나고 싶은 마음으로 시골로 떠나왔다. 부모님이 가지고 계셨던 빈 집으로.
시골에서 나는 좀 변했다.
옛날집을 고쳐가며 살았다. 불편함도 불만도 수그러들었던 것은, 아니 매일 만족이 솟구쳤던 것은 우리를 둘러싼 평범하고 무수한 생명들 덕이었다. 가령 마당에 나오면 저 멀리 아침 안개에 숨은 갑장산, 햇빛을 머금은 잎사귀를 바람결에 흔드는 감나무들, 사시사철 자기만의 때를 기다려 피어나는 꽃과 풀잎들. 나는 이런 소소하고 평범한 것들과 사랑에 빠졌던 것이다.
손바닥만 한 텃밭에 이것저것 먹을거리를 심으며, 자연적으로 살았다. 비료도 약도 치지 않고 고만고만한 채소와 과일을 길러냈다. 아이들도 그렇게 길렀다. 아이가 어떤 생각과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는지 유심히 보며, 자연스럽게, 힘들이지 않고. 아이들과 돌담길을 걸어 학교로 걸어가며 그날의 오롯한 바람, 햇볕, 구름을 알아채며.
시골학교에서 마음껏 뛰어놀고 주말이면 돌담길로 자기 뜰끼리 친구집에 달려가 같이 놀자고 부르는 시골 아이들의 다정한 삶은 지켜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따뜻해지곤 했다. 핸드폰도 텔레비전도 침범할 겨를이 없었다. 아이들은 해가 지기 전, 조금이라도 저희들끼리 어울리려고 마을 공터에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우리의 어린시절이 그들에게도 옛이야기처럼 전해진 건 아닐까 싶어 맘이 저릿해지기도 했다. 내가 아픈 날이면 이웃친구가 아이들 몫까지 먹을 것을 두고 갔다. 무슨 일이 생기면 그녀의 집으로 아이들을 거두어들였다. 타인인데 이런 깊은 친절을 받을 때 나는 그 친절을 잘 받아먹고 좀 다른 사람으로, 더 나은 사람으로 다시 일어났다.
처음 귀촌 1년은 평범한 자연들이 주는 건강하고 무한한 생명력, 흔한 시골 풍경들이 가지는 평범 속에 천연덕스럽게 빛나는 아름다움에 빠졌다. 어디로 눈을 돌려도 무심히 빛나고 있는 것들에 눈이 시렸다. 인생의 기본값이 허무와 슬픔이라고 생각했던, 그래서 끊임없이 의미를 발견하려고 애썼던 나는 이 별볼것 없으나 무수한 미덕을 가진 자연 속을 거닐고 거닐면서 쪼그라든 마음을 회복할 수 있었다. 매일 걷고 그리고 보고들은 것을 쓰면서 평범함이 가지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아름다움이 고맙고 고마워 나는 눈을 뜨면 한숨 되신 잔잔한 일상을 돌보며 자주 고맙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치열'과 '타인과의 비교'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여유를 가지자 '나'의 생각을 가질 수 있었고, 그 생각이 '태도'를 만들어 나가게했다.
그다음 해는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도시에서 관계와 업무에 치여 사람 만날 기운도 없었던 나는 몸과 마음이 회복되자마자 사람들이 내미는 호의에 기꺼이 응했다. 그 사람들은 내 삶에 무엇인가를 보내왔다, 호의, 관심, 도움 같은 형태로. 때론 그 삶자체가 주는 영감의 모습으로. 나는 그에 응답하듯 움직였고 그런 날들이 흐르자 나의 좁았던 마음도, 포옹도 점점 커져갔다. 이러다 세상을 껴안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그것이 불가능이 아니라는 직감도 들 정도로.
돌이켜보면 도시든 시골이든 사람들은 손을 내밀거나 호의를 비쳤을 것이다. 다만 그것에 응하는 나의 마음과 태도가 달랐을 뿐. 어쨌든 시골에서의 일상성을 회복하는 시간, 평범한 것에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기쁨을 맛본 나는 전과 삶의 태도가 달라져있었던 것 아닐까.
때론 귀촌한 사람들로부터 유난히 내가 로컬의 삶을 잘 즐기는 것 같다는 말을 듣곤 한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작정하고 왔으므로. 우리의 귀촌이 한시적이었기에, 내게 휴직할 수 있는 기한이 정해져 있기에 주어진 시간을 진정으로 누리고 싶었다. 내 인생 다시 오지 않을 40대 초반이며 아이들에게도 다시 오지 않을 유년기이므로. 아이들도 나도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알아야했다. 그래야 이 유한한 시골 생활, 내면 가장 깊은 곳에 꿈틀대고 있는 것들을 해야 후회가 적을 것임을 본능처럼 알고 있었으므로. 시골에서만 누릴 수 있는 생활, 다시 돌아가 그때 더 열심히 할 걸 하고 후회하지 않기 위해 뛰어들었으므로. 돌이켜보면 이렇게 뛰어든 것은 결혼, 출산 이후 오랜만이었다. 뛰어든 순간 많은 기쁨이 뒤따랐다. 내가 바라던 삶, 생각을 실천하고 있다는 성취 외에도 나를 만난 기쁨, 어정쩡한 경계인으로서 안전하게 플랜을 짜며 사는 삶이 주는 미련,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차곡차곡 쌓인 시간이었다ㅡ.
귀촌 3년 차.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오래 머물렀다. 이제 남은 늦가을과 겨울을 보내고 나면 우리는 도시로 돌아간다.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으나 아쉬움과 미련은 여전히 남는다. 이 생활이 한 번 더 지속되었으면 하는 간곡한 바람. 그러나 우리가 시골로 내려왔을 때 결단한 것처럼 떠날 때도 결단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름다움을 보는 눈, 한걸음 물러나 나의 생각을 찾아내는 법을 차곡차곡 쟁여놨으니 너무나 많은 것들 속에 너무 결핍된 생활을 했던 도시로 돌아가서도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진실되고 깊었던 경험의 순간, 긴 인생에서 보면 하나의 단편 여행으로 남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