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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다리딩 Mar 25. 2024

안녕, 나의 월든

귀촌 생활을 마무리하며


떠나야 한다는 건 진즉에 알았다. 얼었던 땅이 부풀어 오르고, 풀들이 손잡고 메마른 흙덩이를 기어이 오를 때, 늙은 감나무의 연한 잎이 넘치는 윤기를 주체하지 못할 때. 그때부터 알아챘다. 내 마음이 이제는 이만하면 됐다고 말한다는 것을. 계절마다 반복되는 새로움을 낡았다고 느낀다면 이제는 그만. 돌아가 나는, 넘치는 생각과 감정은 단정히 모아두고, 생계의 무게를 짊어질 것이다. 그것을 사람들은 복귀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시골로 온 나를 두고 자연으로 돌아왔다고 하지 않았고, 떠날 때도 도시로 돌아간다고 말한다. 나의 근원은 어디인가. 이토록 근시안적인 나의 행보.


 아이들과 시골로 내려왔을 때, 나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아이들이 시골에서 유치원을 다니다 학교까지 입학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순순히 그렇게 하마, 라고 답했던 것은 어쩐 이유에서였을까. 나는 그때 이렇게 답했다. 아이들이 자연과 사랑에 진하게 빠질 때가 있는데 지금이 그때라고 답했다. 그 답변에는 미진함이 있다. 뭐지, 꾸준히 나를 증명해내는 일에 중독된 사람이 왜 시골로. 아, 설명할 수 없어. 

 도피는 아닐까. 내가 배워온 자연은 속세와 대비되는 이분법적인 공간이었으니까. 강호가도(江湖歌道)를 지은 사람들 역시 당쟁에 밀려난 사람들이었으니까. 속세를 떠나 자연에서 안빈낙도(安貧樂道)의 마음으로 패배를 치유하고 또 다른 방식으로 삶을 살아간 사람들이었으니까. 나는 그런 삶을 어쩔 수 없이 왔다가 어쩌다 보니 긍정하게 된 경우라 판단했었으니까. 어쩌면 나도.

 그 무렵 직장상사는 육아시간 쓰는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눈빛을 숨기지 못했다. 나는 육아와 일에 허덕이는 사람이었으므로 그 부정을 면하지 못했다. 어미가 묻혀온 그 부정은 오래 남아 지친 몸으로 아이들을 끌어안을 때 옮겨갔다. 일 년의 대부분 인도양을 항해하는 남편과는 일상적 대화도 주고받지 못할 만큼 서로 삶의 무게에 짓눌려 있었다. 짓누르는 건 일만이 아니었다. 필사적이었으나 숨길 수 없는 우울이 달라붙었다. 죽을 만큼 최선을 다한 것도 아니면서, 남들만큼 뭔가 성취해내지도 못했으면서. 평온함은 미래에 저당잡아놓고 과거의 수모는 과거대로 발목 잡혀서 지금은 지금대로 헛된 욕망을 키우고, 자아를 부풀리고 내 안의 미움으로 삶을 갉아 먹으면서. 뭐가 뭔지도 모르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모르고.      

 내가 어떤 마음인지 알지 못한 채 기어들어 온 곳은 부모님의 비워둔 시골집. 10여 년 전 엄마가 불안과 우울을 짊어지고 울며 고친 집. 무엇하나 돈이 되지도 않고 보아주지도 않는데 죽을 둥 살 둥 꽃을 심어 자신만의 월든으로 만든 집. 그렇게 만든 집이나 자식들은 보잘것없다고 외면하는 집. 나는 그 집에 우리의 세간을 들이고 살며 한 남자를 생각했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      

 소로는 미국 월든 호숫가, 오두막에서 보낸 2년 2개월 남짓 동안의 삶을 ‘월든’으로 남겼다. 나는 경북 갑장산 자락 근처 돌담 안 흙집에서 보낸 3년 남짓 동안의 삶을 글로 남겼다. 대문호의 삶을 좇아 내가 자연 속에서 살아보고 싶은 삶의 형태로 한 시절을 보냈다는 자부심은 무엇을 남겼을까. 당연히 나는 그처럼 심오하지 못하고 인식을 전환할 스위치도 가지지 못했다. 그러나 종종 그를 떠올릴 때, 나는 안심했다. 우리는 어떤 위장의 공모자였으므로. 

 소로가 본가에서 2km 남짓 떨어진 곳에 살며 자급자족의 삶을 주창할 때, 가족들은 그에게 음식을 조달해 주었으며 어머니는 빨래까지 해 주었다. 나는 시골집에 산다고 해도 시내에서 불과 6km 떨어진 곳이며, 배달이 안 된다고 해도 차를 타고 나가 언제든 음식을 포장해서 올 수 있었다. 급한 일이 생기면 300km 떨어진 곳에 살고 계신 부모님이 달려와 주셨다. 흙집을 보수해야 하거나 감을 따 곶감을 만들 때가 오면 부모님은 약속처럼 오셨다. 그때마다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든든해졌다.

완벽한 자급자족은 아니었지만 살아오며 쌓인 생각을 정리할 공간으로서의 자연이 필요했던 삶임은 분명하다. 자연은 분명 그러한 행위를 하기 최적의 장소였다. 내면에 깊이 침착하여 삶의 정수에 가닿도록 격려하는 최상의 환경이었다. 거기에 나 외 타인의 흔적은 없으므로.

 소로는 오두막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삶 자체를 하나의 경력으로 만들었다. 그 경력은 언어를 통해 자연을 그대로 그려내려 했다는 것, 생각을 적확하게 언어화했다는 것에 있다. 나는 시골 흙집에 누워 이 시간이 인생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곱씹었다. 압도적으로 많지만 이름을 외지 못하는 나무와 벌레와 꽃과 풀 같은 것들이 이름을 갖다 붙여 달라고 부추겼다. 절기마다 빛을 달리하는 눈앞의 풍경이 의미를 찾아 달라고 아우성쳤다. 나는 내가 가진 언어를 박박 긁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적어내다 비루함을 느끼고 절망하곤 했다.      

 결론적으로 나는 소로만큼 깊이 있는 글을 쓰지도, 삶의 시도를 증명해내지도 못했다. 바라던 성취는 있었으나 객관적으로 미진했으며, 마냥 행복했으나 끝내 허무감을 종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소로와 마찬가지로 시도 자체를 중요한 경력으로 만들었다. 세계를 나의 언어로 규정했다.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고 불안과 비관과 두려움을 기본값으로 끌어안고. 

 밤이 결코 어두워지는 법 없는 도시의 불빛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며 상대 없는 허공에다 묻는다.

 “그래서, 너의 월든은 어디인데? 불과 얼마 전까지 이 시골이 너의 월든이라며?”

 목소리의 울림이 이윽고 사라지자, 이렇게 답한다.

 “나는 일관성 없는 태도가 변덕이라고 생각했지. 그렇게 보일까 봐 조심했어. 소로의 친구, 에머슨은 이렇게 말했지. 융통성 없이 일관성을 지키는 것은 마음이 편협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뭐 어때, 융통성이라고 해 두자. 어쩌면 나는 에머슨이나 소로처럼 자연으로부터 받은 영감은 일관되게 흘러, 글로 드러났지. 나도 그렇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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