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Whole Photography of Mine, 2019’ 중-
영화 '중경삼림(重慶森林)'을 좋아했기 때문에 홍콩을 좋아하는지 홍콩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 영화를 좋아하는지가 확실하지 않다. 그럼에도 벌써 홍콩으로만 대여섯 번 들락거리고는 했는데, 오랜 태국에서의 유랑(혹은 방황)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시금 점을 찍기로 했다.
태국 생활이 원했던 방향으로 마감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 따른 아쉬움의 잔여감이 고스란히 홍콩행으로 옮아갔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대체로 3박 4일 또는 4박 5일을 반복적으로 오가던 일정이, 이번에는 한 달에 가까운 기간이나 세계에서 가장 비싼 부동산 물가를 자랑하는 홍콩에 머무르게 되었다.
중학교 2학년의 한 해 정도 내게 애정과 선물 공세를 쏟았던 동창 녀석이 어쩐 일인지 마카오에서 자리를 잡아 일을 하고 있었으므로, 덤으로 마카오까지 여유롭게 여행할 수 있었다. 방콕에서 마카오로 가는 비행기를 타고 그녀를 만나 신세를 좀 진 후에 다시 페리를 타고 홍콩으로 건너갔다.
홍콩의 카오룽(Kowloon) 지역과 홍콩섬의 센트럴(Central), 완차이(Wan Chai) 지역에서 머물기에는 남은 예산과의 괴리가 컸기 때문에 카우치서핑(CouchSurfing)을 통해서 호스트를 찾아보려고 애썼다. 다수의 레퍼런스(References)와 꽤 오랜 기간 활동해 온 안정적인 프로필에도 불구하고, 홍콩에서는 역시 비어있는 조금의 공간도 찾기가 어려웠다.
결국 애버딘(Aberdeen)이라는 의외의 지역에서 호스트를 찾게 되었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이번의 홍콩 여행과 경험을 정의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챈과 케네스는 너그럽게도 일주일 이상이나 본인들의 공간을 공유해주기로 결정했다. 생소한 이름의 지역이었으나 로컬(Local)들의 생활을 더 들여다볼 수 있는 귀한 기회가 될 것 같다는 생각 또한 들었다.
지층에 마트와 정육점이 있어, 한동안 머무른 거실(이라고 하기엔 아마도 현관문 입구에 너무도 가까운) 침대맡에 위치한 사선 쇠창살의 창문 밑으로는 동네 주민들이 밤낮으로 부산하게 이동했다.
시내인 센트럴 방향을 오가는 버스가 집 계단을 내려와 40초 남짓 거리에 있어서도 좋았다. 내키는 날에는 나가고, 또 내키는 날에는 동네를 거닐었다. 딱히 의미랄 것은 없는, 그러나 그 자유가 좋았다. 살인적인 물가와 좁디좁은 주거환경으로 악명이 높은 홍콩에서 느끼는 이방인만의 사치인 기분도 이따금 들었던 것 같다.
삼사 여일을 충분히 쉬고는 작은 카메라를 하나 들고 여느 때처럼 도시와 거리를 방황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일주일을 넘겨 지내니, 도시의 이질감이 조금은 무뎌졌다. 일정 기간을 체류한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조금씩 도시와 사람들의 속도에 익숙해졌다. 매일 아주 조금씩 이 도시의 호흡과 사람들의 발걸음, 그리고 셔터 속도를 맞춰가는 과정이 좋았다.
더 이상 걸음이 빠르거나 호흡이 쫓기지 않을 때가 되니, 어느새 훌쩍 한 달이 지나 챈과 케네스가 오랜 친구를 대하듯이 자극 없는 일상으로 나와의 마지막 오후를 보내주었다. 고마움으로 온통 젖은 마음으로, 나 역시 과장된 표현과 수사 하나 없이 단출한 인사로 다음을 약속했다. 그날 오후, 케네스는 다른 지역으로 출장을 떠났고 챈은 파티가 있어 밤을 꼬박 새우고 올 것이라며 유쾌한 손인사를 마지막으로 집을 나갔다.
다음날 귀국 비행기를 타기 위해 초저녁부터 일찍 침대에 몸을 뉘었다. 생각의 방은 공허함을 느낄 만큼이나 컸는데 별다른 생각이 들어앉지는 않았다. 정신은 한참이나 또렷했다. 자정까지도 쉽게 눈을 감지 못한 마음은 저만치 창살 밖으로 보이는 어스름한 밤 구름을 따라 함께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