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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수 Dec 15. 2018

아줌마, 개저씨.

깊은 빡침.

 지난여름 일하던 곳에서 좋게 생각해주신 부장님이 또 다른 일을 연결해주셔서 거기서 일하던 인원들 그대로 새로운 곳에 소개받아 일을 하고 있다. 10월부터 현재까지 일하고 있고 기한은 내년 3월까지인데 이제껏 일해온 어느 곳보다도 업무 강도가 세서 정말 숨도 안 쉬고 일하고 있다.
 늘 하던 대로 내가 하는 일은 테스터.
 은행에서 한 번씩 금융전산을 업그레이드하거나 아예 새롭게 싹 바꿀 때마다 엄청난 규모의 자금과 인력이 투입되는 것 같다. 이번 프로젝트도 꽤 큰 건이라 기간은 거의 2년이 넘어가고 개발자분들의 숫자도 많다. 
 나는 개발자들이 일하는 커다란 사무실 어느 한편에 자리를 잡아 시나리오를 보며 새로운 전산에 대한 테스트를 진행한다. 처음엔 화면이 생소하고 미완성 상태라 여기저기 결함이 많이 보이지만 차차 결함을 잡아가며 전산이 제자리를 잡아가는 모습을 보면 나름 뿌듯함도 있고 재미도 있다. 
 나같이 은행에서 일하다 온 사람이 테스터로 일하기도 하고, 개발자 출신이었던 사람이 테스터로 일하기도 한다. 어찌 됐든 금융권에 일하다 이 일을 접해 이쪽으로 일을 하게 된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이곳 최고 경력자는 20년 차 60대 왕언니시다.

 어느 날과 마찬가지로 화장실도 제대로 못 갈 정도로 정신없이 일을 하고 있는데 한 개발자분이 내 자리로 다가와 내가 올린 결함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셨다. 보이면 안 되는 팝업창이 뜨고 재인증이 발생하길래 올린 거였는데, 이 재인증이 15분 차로 두 번이나 일어났다고 기록이 남았으며 결론은 그럴 리가 없다는 것. 
 그럴 리가 없어야 하는데 그런 일이 일어났으니 결함을 올린 게 아닌가.
 그분 자리와 내 자리를 오가며 다시 테스트를 진행해봐도 여전히 그분은 갸우뚱. 나도 갸우뚱. 암튼 알겠다고 하시길래 나는 내 자리로 돌아와 다시 테스트를 해보았더니 그놈의 "재인증"이 또 한 번 일어나는 게 아닌가. 이건 심각한데 싶어 냅다 그분의 자리로 달려갔더니 그 젊은 남자 대리님은 옆의 여자분과 화기애애하게 얘기를 하며 웃느라 내 부름을 미처 듣지 못했다. 자리 뒤에서 3초쯤 대기하다 좀 큰 소리로 "대리님. 저. 이게 재인증이 또 일어나는데요.." 했더니 순간 알 수 없는 정적 3초. 
 슬그머니 뒤를 돌아다본 대리님은 웃음기가 싹 가신 얼굴로 자기가 잘못 본 거 같다며 다른 분이 재인증을 했고. 그다음에 내가. 다시 대리님이. 다시 또 내가 했으니 그건 정상이고 결함이 아니라고 하시길래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하고 자리에 돌아왔는데. 돌아온 순간. 그들의 대화가 퍼뜩 내 머리에 스치며 그들이 말하던 "아줌마"라는 호칭이 나를 향한 거였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들도 어차피 나처럼 몇 개월씩 회사에 계약을 하고 들어오는 계약직이다. 
 우선 은행이라는 갑이 있고. 협력업체나 수행사 등의 을이 있고. 그 밑에 개발자들과 같이 들어오는 병이 있고. 나는 그 병에 속한 계약직이며 개발자분들도 대부분 그 병에 속하는 인원이다. 그래서 임시로나마 직급을 붙여 서로를 호칭한다. 대리, 과장, 차장, 부장 등.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거나 "씨"로 부르기는 어색하니 그저 일할 때 서로 편하라고 붙이는 정도의 호칭인 것 같다. 그래서 내게도 임시 직급이 있다. 차장. 
 아줌마를 뽑는 자리에 뽑혀 "아줌마"라고 불려도 전혀 어색할 것 없는 자리라면 당연히 아줌마로 불리어도 네~ 하고 달려 나가야겠지만. 나는 경력 있는 테스터를 뽑는다고 하길래 같이 일하던 동료들과 계약서를 쓰고 믿을 수없이 많은 서류에 사인을 하고 증명서를 제출하며 이 국책은행에서 일을 하고 있는 중인 것이다.

 순간 깊은 빡침이 훅 오른 나는 앞뒤 안 보고 메신저로 말을 건넸다.
 "대리님. 저는 아줌마 맞는데요.. 여기 아줌마 아니신 분도 있어요."
 잠깐의 시간 뒤. 왜 자기에게 그런 말을 하냐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답변을 보내왔다.
 "아. 일부러 들은 건 아닌데 아까 자리에 갔을 때 웃고 하시며 말씀하시던 저(혹은 나의 동료들)를 향한 호칭 들었거든요. 아. 줌. 마 "
 좀 더 긴 시간 뒤. 이번엔 순순히 인정을 하며 사과를 해온다. 단, 옆에 있던 여자 차장님이 그러신 건데 악의는 없으실 꺼라며 본인이 대신 사과를 하신다나. 아닌데. 난 니가 말하는 걸 들었는데. 아줌마 어쩌고 하면서 낄낄거리던 거.
 " 아. 그러셨나요. ㅎㅎㅎ 결함 100개 올릴뻔했네요. "
 그 뒤로 구구절절이 결함에 대해 오해해서 미안하다. 본인이 어떻게 잠깐 됐었나 착각을 했나 보다. 그 결함은 내리겠다. 하며 대단히 정중한 척 얘기를 하셨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진심이 담기지 않은 사과 뒤로 내 욕을 하거나 아줌마에 대한 흉을 더 보겠구나. 그렇다면 나도 결함 100개가 농담이 아니란 걸 보여주마.

 온갖 치졸한 것들이 올라와 부글거리다 옆에 있는 동료 아줌마 언니들에게 이 메신저를 공개했더니 흥분한 네 명이 언니들이 벌떡 일어나 내 자리로 다가왔다. 
 어떤 자식이야.
 저 새끼여.
 아. 걔 일도 잘 못하더라. 초짜거나 좀 그래.
 언니들. 용서하지 마시고 좀 과하다 싶게 저분 꺼 결함 좀 올려주세요. 했더니 당연히 그러겠다며 각자 자리로 돌아가고 한 분은 그의 얼굴과 그 옆에 앉으신 분의 이름까지 확인하고 돌아왔다.

 그저 그러려니 하고 넘길 것이지 뭔 짓이냐 하겠지만.
 이 똑같은 곳에서 2년 전에도 같은 일이 있었더랬다. 그때 난 좀 문제가 있어서 3일 만에 이곳을 등지고 나오고야 말았지만, 남아있던 동료들이 벅차게 업무를 받아 일을 하는 중에 개발자들이 대놓고 "아이씨  그 아줌마들~ .." 하며 큭큭 거리며 조롱하는 소리를 듣고도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다 나중에는 쫓겨나듯 안 좋게 나왔다는 말을 들어서였다.
 그 얘기만 들어도 너무 분해서, 내가 과연 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막막해한 적이 있었는데 내가 딱 저 입장이 되어 "아줌마"라는 소리를 들으며 킥킥거리는 조롱을 듣자니 말할 수 없는 분노가 올라왔다. 
 아줌마 맞지만. 아줌마라는 단어가 날 존중해서 하는 말이 당연히 아닐 것이고. 아줌마란 단어는 아저씨란 단어와는 어감이 다르다. 아저씨는 끝에 "씨"자라도 있지 아줌마는 "마"가 아닌가. 아줌마라는 단어에 실린 그들의 조롱 섞인 비하를- 내가 못 봤다면 모르겠지만-눈앞에서 지켜보자니 피가 확 머리로 솟구치는 느낌이랄까. 
 
 퇴근길에 신랑에게 저 얘기를 했더니 역시 예상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 그의 대답.
 "너 아줌마잖어.."
 그저 그러려니 하는 거지 뭐 그런 거에 욱하냐며 진정하시라는 말에. 
 아줌마에 대응하는 말은 아저씨가 아니라고. 개저씨라고. 당신의 사무실에 어떤 20대 여성분이 자네를 두고 "개저씨"라고 말하며 킥킥거려도 과연 "그러려니.."가 가능하겠냐며. 그렇다면 주말 내내 불러주마. 개저씨. 그러려니 하시게나. 하며 여태 개저씨라고 부르고 있다. 
 개저씨는 마침 설사병이 나서 침대에 콕 처박혀 있는데 정성스럽게 약을 사다 먹이면서 측은한 눈빛으로 위로도 해줬다. 
 "개저씨.. 괜찮아..,? 이거 먹어. 지사제. "


 왜 아줌마를 무시할까.
 그 대리님은 왜 함부로 얘기했을까. 
 내가 본인보다 나이가 많고 컴퓨터도 잘 모르고 경력도 없어 보이고 돈도 없어 보이고 학벌도 별로고 모든 게 무시해도 될 상대로 보였던 걸까. 저 모든 조건에 충족되면 무시해도 되는 사람인 건가. 한 가지만 충족해도 무시할 건가. 두 가지 이상 충족하면 무시받아도 되는 사람인 걸까.
 그렇다면. 내가 나이가 적고 컴퓨터도 잘 다루고 경력 많고 돈 많고 학벌 좋으면 어쩔라고. 
 대리님아. 내가 나이는 많지만 금융 개념은 너보다 단단하고 경력도 좀 있고 돈 많고(아마 대리님보다?). 딱 보니 자네보다 좋은 학교 나온 것 같은데. 
 

 사람에 대해 갖는 존중, 공감, 죄의식, 예절.. 등이 없는 사람들에게 누군가 이런 얘기를 하는 동영상을 본 적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양심이나 예의가 없는 게 아니라 지능이 낮은 거라고. 
 완전 동의하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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