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다른 집 애들만.
우리가 이사를 왔을 때 딸아이와 초등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이미 이 동에 살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었다. 아이가 고1 막 시작됐을 때 옮겨왔으니 벌써 2년 반이나 됐다.
이 소녀(친구)는 학교 오케스트라에 소속되어 있을 만큼 악기에 능숙하며, 태권도 유단자인 데다가 얼굴도 이쁘고 군더더기 살도 없이 날씬한 여고생이라는 놀라운 얘기.
내가 일했던 동안 종종 우리 집은 시험 끝나는 날 모여 노는 아이들의 아지트 같은 역할을 했었는데 그때마다 놀러 왔던 이 친구는 라면 끓여 먹은 냄비에 내가 쓰다가 담가놓은 다른 설거지까지 싹 치워두고 간 일이 있어 나는 매우 놀라웠다. (우리 딸은 설거지 자체를 안 한다...)
그러나 가장 놀라운 건. 심지어. 이 소녀는 공부를 매우 잘한다.
고1 초 첫 모의고사를 치르러 가던 날 "엄마 나 1등 먹고 올게" 하고 집을 나서더니. 진짜 그 모의고사에서 전교 1등을 했단다. 이 얘기를 딸에게 듣고 입이 쩍 벌어졌는데. 아 전교 1등을 이렇게 가까이서 뵙게 될 줄이야.
우리 딸은 수학만 100점을 받고 나머지 과목은 우수수.. 여서 건질만한 게 없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첫 모의고사가 그나마 이제껏 본시험 중에 가장 잘 본 모의고사였다.
이 소녀는 쉬지 않고 노력하여 모든 과목을 골고루 잘하는 멋쟁이 고3(공부만 잘해도 멋지겠는데)이 되어. 서울대가 아니 되면 재수를 하겠노라며 부모님께 이미 허락을 구했다고 한다. 아. 서울대라니.
그에 반해 인서울 어딘가는 가겠지 하며 열심히 매진 중인 우리 딸이 행여 맘이 다칠까 꾸준히 눈치를 보고 있는데. 아침마다 같이 등교하고 학원도 같이 다니고 하는데. 전혀 그런 기미는 보이질 않고. 집에 널브러져 있는 우리 딸을 이 소녀가 독서실에 갈 때 한 번씩 불러주니 너무너무 감사할 따름이다.
맘 같아서는 독서실과 카페를 종류별로 끊어주고 음료를 몽땅 다 제공하고 싶은나 그럴 수는 없으니 나는 그저 임영웅을 바라보는 할머니의 팬심처럼 멀리서 응원하며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다.
딸아이 앞에서 너무 입을 쩍쩍 벌리면 우리 애가 또 상처받을까 봐 적당히 놀라려고 노력은 하는데. 우리 딸은 이 소녀의 얘기를 하면서 본인도 놀랍다며 지자랑 하듯 얘기해 주기 때문에 그저 우리 모녀에겐 약간의 동경의 대상 같달까. 욕심이 많아 다 하고 싶은데 하는 거마다 다 잘한다. 그런 소녀가 우리 아랫집 어딘가에 살고 있다.
수학만 잘한다던 우리 딸은 고3 올라와서 수학마저 성적이 떨어지고 있다.
뭐 다음번엔 괜찮겠지 하고 사실 크으게 신경은 안 쓰고 있었는데. 어쩐 일인지 요즘 내 머리가 듬성듬성 빠진다. 빠져도 그냥 빠지는 게 아니라 아이 낳은 산모가 머리 감을 때마다 한 움큼씩 빠지는 그거처럼 샤워 뒤 목욕탕에 물이 안 빠질 정도로 머리가 우수수다.
괜찮은데. 나 맘을 많이 내려놓고. 전형을 정해놓고. 그저 어디든 전공 적성 맞는데 가면 되는 건데. 왜 이러지 하면서 아까 낮에는 탈모방지 앰플 같은 거를 주문했다. 지난번에는 비오틴이 좋다고 해서 그거도 사놨었는데. 아 먹는 걸 까먹었네.
어지러운 마음을 다스릴 때는 스도쿠를 하는데. 내 기록을 내가 못 깨고 있다.
예전에 아이를 임신했을 때 집에 틀어박혀 할 게 없어 우연히 집어든 책자가 스도쿠였어서 시작하게 됐던 건데. 임신기간 내내 그 책을 지웠다 채웠다를 반복하며 책이 너덜 해질 정도로 풀어댔었다.
아. 그 바람에 저 아이가 수학을 잘하는 건가. 내 덕이네. 근데 다른 것도 좀 할걸 그랬지. 너무 극이과라 곤란하다.
암튼. 지금 근 18년 만에 이 스도쿠를 다시 하는 이유는 오로지 잡념을 없애고 마음을 다스리기 위함이다.
처음부터 가장 높은 레벨인 "악몽"레벨로 시작했는데 처음엔 20분을 넘겨야 겨우겨우 다 채울 수 있던 것이. 지금은 최고 기록이 2분 26초이다. 이걸 얼마나 해댔는지 처음 시작할 때는 하루 2시간도 넘게 했던 것 같다. 맘 다스릴 일은 많고. 실은 별 할 일도 없고 해서 시작했는데 몇 달이 지나도록 매일 하는 걸 보면 이제 내 취미가 된 것 같다. (스도쿠 대회 없나요. 혹시)
문화센터도 끝자락이 되니 슬슬 지겨워서 샌드위치 수업은 이번주 빼먹었고. 엑셀 수업은 재밌는데 2번을 못 나가다가 오늘 다녀왔다. 강사님이 무슨 일 있으셨어요 하고 물어오시길래 깜놀했는데 뒤를 둘러보니 학생들이 거의 빠지고 남은 인원이 6-7명 정도밖에는 없었다. 나는 맨 앞에 앉아 가장 열심히 듣는 학생인데 그나마 안 나오니 궁금하셨나 보다. 강사님을 붙들고 저희 애가 고3이에요 선생님. 지지난번엔 6모(6월 모의고사) 전날이라 애 챙긴다고 못 왔는데 글쎄 시원하게 말아먹었지 뭐예요. 그리고 지난주에는 애가 머리가 아프다고 조퇴를 해가지고 돌보니라고 오질 못했어요. 애가 학교 다니면서 한 번도 조퇴를 한 적이 없었는데 아 글쎄 너무 아파하길래 걱정이 돼가지고요.. 알고 봤더니 그 6모 성적표가 나와 스트레스를 받아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던 모양이더라고요. 근데 그 성적표 보고 저도 실성을 해가지고....라고 주절주절 떠들고 싶었으나. 상대가 고3엄마가 아니라면 날 과연 얼마만큼이나 이해를 하겠는가.
지난번 글에 댓글을 보니 본인도 고3엄마라고 이해한다고(아닌가요? 이해하신다고 하신 거죠..?)하셔서 맘이 뭉클했다. 나도 그분들을 알진 못하지만. 그저 같은 고3엄마라는 것만으로도 토닥토닥해드리고 싶은 심정이었고. 진심으로 우리 모두 힘내자고 말씀을 드렸었다.
놀랍게도 그 글은 갑자기 조회수가 막 올라 하루 35000을 넘더니. 다음날도 20000이 넘고 해서 좀 무서웠다. 아주 가끔 조회수가 막 터지는 날이 있는데 도대체 어디에 노출이 된 건지 알 수가 없으니 좋으면서도 좀 불안하다.
3-4일 조회수가 터지다 내려왔는데 생각해 보니 전국의 고3들이 30만 정도 될 터인데. 저 정도의 사람들이 읽었다면 고3엄마 중에 5분의 일 정도가 읽었다는 얘기인 건가.. 나 너무 나댔나. 알아보면 어쩌지. 좀 그랬었다. (어찌 됐든 읽어주신 많은 분들 감사. 그분들이 모두 고3엄마는 아니시겠지만)
글을 쓰다 보면 꼭 의식의 흐름대로 두들기고 있는데. 오늘 좀 심하게 왔다 갔다 하는군.
뭐 이리 글이 산만해. 하며 나를 건드리지 마라. 오늘도 샤워하며 머리 한 움큼씩 빠지는 고3엄마다.
이 와중에 출장 가 있는 신랑이 또 기름진 사진들을 보내며 배 터져 죽겠다고 카톡을 보내오는데.
약간의 우울감으로 정상인과 비정상인의 라인을 오고 가는 나에게. 일 따위, 출장 따위, 손님 따위 다 우습게 느껴진다. 신랑아. 출장과 상사와 외국어와 업무로 스트레스가 많겠지만. 그게 나은 거다. 고3엄마보다는.
마음이 시끄러워 다음학기 문화센터는 다 그만둘라고 했었는데. 그나마 수업마저 없으면 난 뭐를 붙잡고 살까 싶어 이번엔 나만의옷만들기를 신청하려고 한다.
내가 목공에 요리에 자수, 그림까지 웬만한 건 다 배워봤는데 옷 만들기, 가죽공예까지 하면 문화센터는 다 졸업하게 생겼다.
전국의 고3엄마들과 그녀의 자식인 자들.
참 파이팅이 점점 더 힘들지만. 그래도 우리 파이팅.
나는 꿋꿋한 고3 엄마다. 헛.헛.헛.(기압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