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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고3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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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수 Aug 31. 2023

수능 전 77일

태풍 전 분홍하늘

 그 더웠던 여름이 슬슬 지나가고 이제 며칠 전부터 에어컨을 켜지 않고도 지낼 만큼 선선해졌다. 

 고3 아이들은 1학기 기말고사를 끝으로 내신관리 막바지에 이르렀고 생기부 보충도 8월 31일이 마감일이니 오늘이 바로 그 마감일이 된다.

 어차피 말아먹은 내신이라 내신관리와 상관이 없던 우리 집 고3학생도 기말고사 기간에는 좀 공부를 하시는 것 같았다. 기말이 끝나고 시작된 여름방학에도 학교 자율학습을 신청해서 오전에는 학교, 돌아와서 점심 먹고 바로 독서실에 갔다가 저녁에는 학원, 과외를 하는 생활을 지속했었다.

 이 더운 날 그래도 빠지지 않고 매일 반복되는 힘겨운 생활을 밝은 얼굴로 해내길래 어미 되는 입장으로 참 대견하고 고마웠었다. 밥이라도 잘 먹여야지 싶어 이것저것 궁리하며 점심, 저녁을 준비하고 배달음식도 좀 대령하긴 했으나 그건 그때마다 먹고 싶단 음식을 먹이기 위함이었다.


 8월 중순 여름방학이 끝나 개학을 하고 학교에 등교했다.

 드디어 마지막 3학년 2학기가 시작되는구나.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다. 조금만 더 달려보자 생각했으나.

 개학과 동시에 아이는 번아웃이 왔다.

 처음 이유인즉슨. 방학기간 내에 적어도 과학을 한 번씩 이상은 돌려서 완벽하진 않아도 마무리를 좀 해보려고 했으나 다른 학원에 다니며 숙제를 감당하니라 시작도 못했다는 얘기를 하며 줄줄 울기 시작한 것.

 정시 생각해서 시작했던 국어 과외가 부담이 된다길래 시작한 지 두 달도 안된 과외를 그만하기로 하고 과학공부에 힘을 써보자 애를 달랬다. 사실 국어 과외시간이 되면 숙제를 안 했네, 머리가 아프네 하며 슬슬 빠지기 일쑤였고 과외기간 두 달 중 거진 한 달은 그냥 날린 셈이 된 뒤였다.

 인강을 들으며 하겠다는 말을 믿고 그대로 맘을 놓았는데.

 7월 초부터 다니기 시작한 물리논술 학원을 그만 나가겠다고 했다. 이미 숙제를 못했네, 가기가 싫네 하며 한 달도 못 채운 상황이었다. 물리논술은 의대생이나 면접을 준비하는 학생들이 와서 듣는 수업이라길래 처음 해보겠다고 했을 때부터 좀 걱정이 되긴 했었다. 일반 과학공부를 시작하기도 전에 논술학원부터 다니는 게 가능은 할까 싶었지만 본인이 한번 해보겠다길래 보낸 거였다.

 어떤 날은 한 문제도 풀질 못했다며 줄줄 울기 시작하길래. 그래 알았어. 우리 수학에 집중을 하자 하며 받아들였다.


 어제는 영어 과외가 있는 날이었는데 과외 시작 2시간 전쯤에 우중충한 얼굴로 내 방문 앞에 서 있었다.

 왜. 할 말 있어? 하며 묻는데 불길했다. 지난주 영어 과외시간에 배가 아프다며 과외를 못했었다.

 영어 과외를 그만하고 싶어.

 영어 과외는 올 2월부터 시작했었고 수능최저를 위해서 등급을 올리자 하며 잡았던 과목이다. 영 가망 없을 것 같았던 영어가 그래도 슬슬 등급이 올라 이제 원하던 등급이 됐는데 지금 이걸 놓아버리겠다고 하니 맘이 쿵 내려앉았다. 그냥 수능 때까지 쭉 하는 게 낫지 않을까. 과외를 안 하면 그나마 하던 영어단어조차 거들떠보지 않을 텐데.

 혼자 해보려고 그래? 자신은 있고? 

 아이는 줄줄 울기 시작한다.


 아이가 싫다는 걸 억지로 붙들어봐야 이미 맘 떠난 과외수업을 성실히 할 리가 없다.

 면목이 없어 과외선생님께 장문의 문자를 보내고 그간 너무 감사했다고 마무리를 했다.


 


 일 관두고 들어와 아이 뒷바라지 하겠다고 집에 들어앉았던 1학기 초에는 그래도 문화센터 다니고 자격증 따니라 시간을 좀 흘려보내며 스트레스를 분산할 수 있었는데. 6월 정도부터는 맘이 어수선해서 신청했던 문화센터도 중단해 버리고 사람도 안 만나고 집에만 박혀 종일 유튜브를 보며 지냈다.

 아이 밥해주는 거 외엔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것도 없고. 가끔 날아오는 문자를 보며 설명회 신청해서 들으러 다니고 아이친구 엄마를 한 달에 한번 정도 만난 게 다였다.

 크게 우울함은 없었는데. 나 스스로 노인의 삶을 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식욕물욕 없고 사람 안 만나고 취미 없고 가고 싶은 곳도 없었다. 

 아이가 학교에 가고 신랑이 출근하느라 분주한 아침 시간에 일어나 아침 차려주고 설거지 하고 세탁기 돌리고 나면 식구들이 모두 나가고 없었다. 2-3일에 한 번씩 청소를 하고 기운이 딸리면 티비 켜고 밥에 물 말아 반찬하나 놓고 아침을 먹었다.

 활동이 없으니 배고픈 것도 없고 귀찮기도 해서 그대로 끼니도 건너뛰어 버리고.

 아이가 오는 4-5시쯤 두 번째 끼니를 대충 해결하며 그렇게 지내왔다.

 보던 책도 눈에 안 들어오고. 그나마 가끔 듣는 입시설명회는 재밌었는데 이게 재밌으면 뭐 하나. 대부분은 우리 아이와 상관없는 전형들이라 내게 소용 있는 알맹이는 없었다.


 생활이 단조롭고 스트레스가 쌓이자 뭐라도 좀 내게 즐거운 일을 만들자 싶어 종일 붙어 있는 소파를 보러 다녔다. 언제 샀는지도 기억이 안 나고 중간이 푹 꺼진 소파가 늘 맘에 걸렸기 때문이기도 했다.

 인스타에서 이리저리 뒤지다 발견한 소파가 있었는데.


 

 요런 느낌의 오렌지 빛깔이 도는 카멜색 소파를 갖고 싶었다.

 자꼬모 소파가 뭔지도 모르고 젤 큰 매장 찾아 저 소파를 찾으러 갔었지만 건물이 4개나 있던 그 본사 매장에도 저 디자인의 소파가 없었다. 가장 비슷한 색도 실제로 보면 그저 평범한 밤색의 소파라 도저히 눈에 차질 않았다. 여기저기 물어보니 나이 지긋하신 남자분이 사진을 보며 설명을 해주셨다.

 저 소파는 이태리에서 직접 가죽을 받아 소량으로 재작 해서 잠깐 팔고 말았었는데 금액도 비쌌었지만 지금은 다시 생산하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막상 저 소파가 없으니 딱 저 색깔의 소파만 갖고 싶어 져서 그 근처 다른 가구점에도 가봤으나 비슷한 모든 소파는 모두 "밤색"이었다.


 그렇다면 다른 소파점에 가보자.

 동네에 있는 까사미아 가구점. 

 비슷한 걸 찾았으나 밤색.


 사진이 오히려 색이 이쁘고 실제로 보면 밤색이다.


 그렇다면 한샘.


 오. 내가 찾던 색과 매우 유사하고 디자인도 맘에 들어 직원에게 물어보니 750 정도 한단다.

 소파가 750.

 이 소파가 이 매장에서 가장 비싼 소파란다. 이태리에서 만들어진 채로 통째로 들여왔단다.

 내가 다른 세상에 살다 왔나. 아니 언제 소파가 700이 넘는 세상이 됐나 싶어 놀라웠다.

 실은 지난번에 본 맘에 들지도 않던 소파가 300-400 한다길래 에이~ 뭔 소리야. 왜 소파가 300-400 이야 하며 싼 걸 찾아온 터였는데 내가 찾은 매장들이 하필 다 한 가격 하는 곳이었나 보다.


 저 소파 뒤로 큼지막한 대형 소파가 보였는데 우리 집에 놓을 사이즈도 아니었지만 가죽색이 쵸코랱색으로 매우 특이하길래 슬쩍 가격을 보았더니 1800 정도...

 나가세. 

 신랑을 잡고 밖에 나오는데 날은 무지 덥고 짜증이 나는데 눈치 없는 저 중생은 담배를 피우고 있다.

 아잇~! 덥다고!

 주섬주섬 담배를 거두고 중얼거리는 신랑. 눈만 높아가지고 보는 것마다 비싼 거만 보냐아..


 소파는 관두자. 집에 있는 소파 그냥 쓰고 나중에 이사 갈 때나 알아보던지. 



 시간은 흘러 드디어 우리 아이 학원에서 입시상담을 해준다길래 돈을 입금하고 며칠을 기다리다 화장 곱게 하고 선생님을 찾아갔었다. 수리논술을 준비하는 학생 입장에선 각종 설명회를 다녀봤자 얻는 정보가 거의 없었다. 심지어 4시간 반이나 진행했던 강동구청 무슨 설명회에서도 논술설명은 5분도 채 안 됐었고.

 어딘가에서 들었던 설명회에서는 논술에 대해 부정적인 얘기를 했었다.

 학교 담임선생님께도 상담요청을 드렸으나. 어머니 제가 너무 바빠서요.. 하며 잡아주신 상담일이 원서 쓰기 이틀 전 날짜였었다.

 아무 곳에서도 정보를 주지 않으니 나는 이 입시상담일이 너무 중요했다.

 7만 원에 20분.

 질문하고 싶었던 것들을 정리해서 입시책자들을 주렁주렁 달고 상담시간 30분 전에 도착했다.



 짧은 상담을 끝내고 나오는데 날이 화창했다.

 무척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한낮이었고 배는 고프고 맘은 울적했다.

 뜨거운 공기 탓에 몸은 끈적거리고 화장한 얼굴 위로 송글송글 땀이 맺혔다.

 아 더워. 

 지친 몸을 식히고 얼른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한데 저 길 앞에 가구점이 보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니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불고 그간 보지 못했던 3인용 소파가 보이는데 가격이 좀 저렴했다.

 "소파 사도 되나."

 오늘 입시상담을 가는 걸 알고 있던 신랑은 간절히 그 상담결과가 궁금해서 기다리고 있던 터였다. 상담 결과가 어땠는지 궁금해하던 신랑에게 아무 설명 없이 딱 한마디만 보냈다. 한 발자국 뒤에 서서 내가 종종 설명해 주는 입시얘기를 들으면 까먹고 들으면 까먹고 해서 눈을 부라리는 내 눈치를 보고 있는 상태이기도 했다. 내가 지금 건들면 안 되는 폭탄이라는 사실을 눈치챘을 것이다.

 "사라"

 카톡을 보냄과 동시에 답이 왔다. 


 나는 거진 한 시간 동안 그 3인용 소파를 노려봤다.

 딱 2개 있는 3인용 소파에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하며. 밝은 아이보리와 중간의 회색 소파사이를 왔다 갔다 했더니 설명하던 직원도 나중엔 멀리 떨어지더니 이내 사라져 버렸다.

 참 신기하게도 디자인이 똑같은 소파인데 4인용보다 3인용은 가격이 반이 채 되질 않았다.

 그럼 왜 여태 다른 가구점에는 3인용이 없었지.

 이 정도의 가격이면 나도 살 수 있다고. 

 애가 그만둔 학원에 과외비가 얼만데. 그거 환급한 돈만으로도 충분히 살 수 있다고.

 왜 숨겨뒀어. 

 우리 아이가 갈 수 있는 학교도 어디 숨어있나. 왜 선생님은 저렇게 안된다고 하시지. 그간 다니며 공부한 게 얼만데 이제 와서 되게 어려운 문제를 풀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니. 


 내게 처음 다가왔었던 친절한 직원을 찾아 저 소파를 사겠어요. 배달을 부탁드리고 결제를 하고 나왔다.

 아이가 좋아하는 써브웨이가 보이길래 샌드위치도 하나 사고. 이고 지고 갔던 입시책을 둘러매고 버스를 탔는데 버스 안도 시원했다.


 학교에서 돌아와 있던 아이가 궁금해하길래 최대한 부드럽게 상담내용을 전달해 줬다. 

 울적한 맘을 들키지 않느라 좀 과장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퇴근한 신랑이 상담내용을 물어오길래. 다음에 하자. 내가 오늘 그 내용을 두 번은 전달을 못하겠다고 했다.


 


 슬럼프에 빠진 건 우리 아이만이 아닌 것 같다.

 1학기 기말고사를 마치고 생기부 마감도 슬슬 다가오면 우주상향만을 외치던 아이들이 슬슬 바닥에 발을 붙이고 현실을 바라보게 된다. 그간 열심히 달려왔던 아이조차 자신이 열심히 했던 고생스러운 시간들에 비해 현실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걸 깨달으며 힘들어한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포기하지 못하고 저 멀리 하늘 높이 가보고 싶었던 대학들에만 원서를 쓰겠다며 우겨댄다.

 내신등급이 1등급 중반대인 우수한 아이들도 막상 수능최저(수시에서 쓰는 원서로 끝나는 게 아니라 수능점수도 반영이 되는 전형이 많다. 예를 들면 수능 5과목 중에 3과목 등급의 합이 6등급 이내라면 -> 수능최저 3합 6이라고 표현한다)를 못 맞춰 떨어지는 친구들이 생기고. 

 수리논술도 대체로 수능최저가 있는 데다가 쓸 수 있는 학교도 과도 그리 많지 않다.

 보통 한 자릿수로 5명, 7명.. 많아야 12명 뭐 이런 정도라 수학 좀 한다는 친구들이 수만 명일걸 생각하면 참 암담하다. 게다가 재수, 3 수생들은 한 장씩은 쓴다고들 하니 과연 6장 중에 한 장은 붙을 수 있을 것인가.


 


 다시 맘을 다 잡는다.

 요즘 신랑이 종종 하는 말이 매사에 감사하며 살자. 며 우리 딸이 얼마나 건강하고 잘 먹으며 반 아이들을 때리지도 않고 고3치곤 밝고 씩씩하냐며 감사하자고 한다. 고3치곤 밝다는 건 아이가 줄줄 우는 걸 못 봐서 하는 소리겠다만 대체로 밝고 잘 먹고 건강하니 감사하기로 하자.

 뭐 번아웃이 올 수도 있지. 얼마나 막막하고 무섭겠어. 이제 80일도 채 안 남았는데 공부 안 한 과목이 더 많고 9월 모의고사도 다음 주이고. 다다음주면 대학 원서도 쓰는데 머리에 공부는 안 들어가고 자꾸 노래방 생각만 나니 본인도 답답하겠지.

 저 아래 공부 잘하는 아랫집 친구도 최근에 인터넷으로 옷을 20만 원어치 사대다가 엄마한테 혼이 났다는데 종국에는 50만 원짜리 명품지갑을 사고 오랫동안 모아 왔던 통장 잔고가 텅텅 비었다던 비밀을 전해 들었다. 

 이 친구는 털털한 친구라 평소에는 한 번도 이런 행동을 한 적이 없었는데 공부 잘하는 이 친구도 이 정도로 제정신이 아닌 상태이니 공부 안 했던 우리 아이의 맘은 오죽이나 불안하겠는가.


 학교가 전분가. 인생의 과정이고. 나는 그저 아무 학교라도 들어가서 니 좋아하는 게 뭔지 더 찾아보다 복수 전공도 해보고 연애도 하고 사회생활도 해보라는 거지 뭐 더한 기대나 욕심은 하나도 없다.

 내가 대학가던 그 시절에 학교 라인을 찾아보니 그 시절에는 학교별로 딱딱 10점씩 점수가 나뉘어 있던데(수능 200점 만점 시절이었다) 요즘도 그렇게 심플하면 오죽 좋을까 해봤자 다 부질없는 짓이다.


 여기저기 연락해 보니 고3 엄마들은 다 죽을 맛이다.

 공부 잘했던 아이도 내신이 계속 떨어지고. 다니던 학원도 소용없다며 관둬버리고. 모의고사도 성적이 떨어지고. 번아웃이 온 고3들이 끼리끼리 모여 쇼핑을 하고 노래방을 다니고 있는 것 같다. 사연이 다 거기서 거기인데.

 올해만 벌써 2번째 대상포진이 왔다던 고3엄마랑 통화를 하다 서로 잘 살아남자며 위로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자. 이제 77일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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