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일기장
이건 조른다고 될 일이 아니에요.
초등학교 첫 해에 너무 학교 가기 싫다는 내용으로 점철된 아이의 주말 일기를 봤던 날, 너 지금 이걸 일기라고 쓴 거냐는 말이 목구멍을 넘어 툭 튀어나올 뻔했지만, 다시 쓰라고 하는 건 아이의 솔직한 일기를 검열하는 셈이라 내키지 않았다. 아이를 재우고 곰곰 생각해보았다. 내가 선생님이라면 이 용감한 일기에 어떤 코멘트를 달까? 나는 아침이 밝자 최대한 부드럽게 조언을 하나 건넸다.
"선생님이 왜 학교 가기 싫은지 궁금하실 것 같아. 왜 가기 싫은지 한 줄만 덧붙여볼까?"
"네~"
아이는 내 말이 납득이 가는지 군말 없이 한 줄을 추가하곤 일기장을 챙겨 넣었다.
- 나는 학교 가기 전이 너무 싫다. 왜냐면 놀다가 공부하려니까 힘들다.
아이가 말하는 학교가 싫은 이유를 더 자세히 풀어보자면, 학교의 수업은 유치원보다 직접 하는 게 줄어들었고 대신 가만히 앉아서 계속 들어야 하는 게 많다는 것이다. 담임 선생님으로부터는 녀석의 학교생활이 그렇게 적극적이고 열심히 한다는 피드백이 오는데 막상 본인은 재미가 없다는 말에 어쩐지 가슴이 철렁했다. 과목도 별로 없고 수업도 금방 끝나는 저학년인데 벌써 재미가 없으면 나중엔 괜찮으려나 싶은 걱정도 스쳤다.
어릴 때도 스티커북 하나 펼쳐주면 내가 옆에 앉혀놓고 성경공부를 해도 될 정도로 차분했던 아이는 어느덧 커버린 몸집만큼 초등학생 다운 모습으로 변모했다. 2학년이 되어 쓴 일기엔 한동안 곤충이 대부분의 지분을 차지하며 곤충박사로 불리더니 이제 다행인지 불행인지 일기장 지분엔 포켓몬이 독보적이다. 포켓몬고 게임으로 뭐 잡은 이야기, 무슨 띠부씰이나 무슨 카드가 생겼다는 이야기, 카드는 뭐가 좋고 중고 거래하면 얼마인지까지 적어 내려 간 일기장은 내가 알 수 없는 수많은 포켓몬 캐릭터 이름들로 가득하다.
어느 날부턴가 아이는 일기를 최대한 미뤘다가 쓰기 시작했다. 포켓몬으로만 가득한 탓에 선생님께서는 게임 이야기 말고 다른 걸 써보자고 하신 모양이다. 게임 얘기를 빼니 미루다 보니 일기에 뭐 쓸지 몰라 소재를 찾아 헤매는 우리 집 하이에나. 학교 제출용과 개인 일기장을 따로 구비해 쓸 정도로 일기에 진심인 초등학생이었던 내게 괴발개발 알아볼 수 없는 내 아이의 일기는 솔직히 많이 거슬린다. 글씨가 점점 날아가는 부분에 대한 염려는 담임선생님과의 상담 전화에서도 내비친 바 있다. 게다가 양은 어찌나 박한지 누가 봐도 즐겨 쓰고 있지 않는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엄마, 저는 월요병이에요!"
"우와, 벌써? 빨리 걸렸는데?"
월요병: 월요일 아침에 특히나 피곤한 상태를 말한다. 주말에 쉬고 월요일에 다시 출근, 등교를 하는 직장인들과 학생들에게 나타난다. 심리적인 증상으로서 주말 토요일과 일요일에 휴식을 취한 뒤에 새로 출근하여 일을 시작하는 월요일에 느끼게 되는 권태감 내지는 무력감을 말한다. (출처: 위키백과)
어디서 월요병이라는 말을 배워와서는 이렇게 자꾸 월요병이라고 하는 걸 들은 둘째는 형한테 그새 배워서 자기도 월요병이란다. 즐겁게 놀다가 맞이하는 월요일이 반갑지야 않겠지만 그래도 아직 나쁘지 않을 시절 이건만.
"일기는 왜 써야 하는 거예요?"
"기록하는 습관은 도움이 되거든. 게다가 뭔가 글로 표현하는 건 네가 나중에 뭘 하더라도 꼭 필요한 거야."
"아, 쓰기 싫은데 나중에 쓰면 안 돼요?"
"지금 쓰면 안 될까요?"
이건 조른다고 될 일이 아니란다. 어차피 쓸 거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터는 게 좋겠어. 일요일 저녁에는 쓰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