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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미 Dec 15. 2022

너와 나의 거리

찬바람이 불면

생일은 오묘하다. 언젠가부터 그다지 신나거나 의미 있게 느껴지지 않는 그 하루에 밀린 다정함을 받듯이 축하를 받는다. 신나는 일이 좀 생겼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신나게 해 주려고 고심했다는 선물, 돌상처럼 디저트로 생일상 차려주는 오랜 인연들, 어색하지만 양가가 다 모여버린 가족 생일밥 등 너의 날이라는 메시지가 쏟아진다. 그 속에 있다 보면 꽤 감동적이었던 과거의 생일 속 장면과 그 안에 사는 과거의 인연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어쨌든 생일 축하는 네가 세상에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의미 있는 일이라는 고마운 알림이기도 하다.


아이를 학원에 보내고 애매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낯선 카페에 들어섰다. 카페 주인은 마침 어딜 잠시 다녀오려던 참이라면서 편히 계시라는 말과 함께 카페를 나섰다. 나는 묘한 책임감과 편안함을 동시에 느끼며 처음 와보는 카페를 지킨다. 테라스 자리에 누군가 앉더니 음악을 튼다. 카페의 재즈음악을 뚫고 슬픈 난 너에게 편지를 써...라는 익숙한 멜로디가 귀에 들어온다. 어느새 공간음을 걸러내고 그 노래에 집중한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카페를 떠날 때까지 카페 주인이 돌아와야 할 텐데 싶어 밖에 시선이 간다.


요즘 가사를 가만히 들여다보며 음악 듣는 게 너무 좋다. 마음이 복잡해 깊이 생각하기 어려운 시기를 지나 일상을 찾으려 노력하다 보니 가장 좋은 게 노래다. 인스타그램을 떠도는 누군가의 <한숨>을 들었다. 어디서 언제 갑자기 튀어나와도 내가 멈칫하게 되는 곡이다. 그리고 다시 유튜브로 또 다른 이의 <한숨>을 들었다. 그러다 나는 새삼 다시금 종현쓴 노래들을 계절의 습관처럼 즐겨 듣는다.


한때 나는 종현의 푸른밤을 꽤 챙겨 듣는 애청자였다. 한동안 듣지 않던 라디오를 켜게 된 건 우연이었다. 둘째가 생기고 날로 무거운 몸으로 첫째를 돌보던 그 무렵의 나는 우울감이 심했다. 스스로의 컨디션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없었지만 지금 돌아보면 모든 감정이 금세 끊어질 듯 가느다란 끈 같았다. 아무래도 그릇이 안 되는 것 같은 내게 주어진 어린아이와 뱃속의 아이, 일에 파묻혀 한결같이 바쁜 남편의 부재는 어쩐지 자연스러웠고 어차피 내가 견뎌야 하는 시절이라고 받아들였다. 머리로 받아들이는 것과 감정은 또 다른 문제인지라 아이의 소리가 가득한 하루에 어른의 목소리가 견딜 수 없이 그리워 라디오를 켰다.


방방 들뜬 방송은 들을 자신이 없어 선택한 한국의 라디오. 푸른 밤에서 처음 종현의 목소리를 들었다. 푸른 밤은 알지만 대체 종현은 누군데?로 시작한 첫 청취는 어쩌다 매일 이어졌다. 처음 들었을 때부터 다른 방송과 달리 묘하게 불편함이 거둬진 느낌. 아주 솔직히 말하면 그의 감정 또한 가느다란 끈에 의존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건 다른 라디오 방송과 참 달랐던 위로의 방식 때문이다. 섣불리 공감하는 척하지 않으려고 이해하는 척하지 않으려고 조심하고 애쓰는 말들이 항상 느껴졌기 때문이다.


정석대로 나오지 않는 그의 위로는 특이했다. 제가 어떻게 이해한다고 할 수 있겠느냐, 제가 나름대로 생각해 보면 이랬을 것 같은데 그렇다고 완전히 알 수는 없겠지만. 이런 식의 소심한 표현을 주렁주렁 달고 나름의 위로를 건네려는 말들. 그대로 받아들이면 지금 대체 이 사람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싶은 그의 서론이 그때의 나에게는 참 사려 깊게 들렸다. 나는 너의 어려움을 완전히 알 수는 없지만 참 위로하고 싶다는 메시지. 위로가 되지는 않겠지만 사연을 보낸 그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고 싶다는 바람. 저리 생각이 많은 만큼 마음에 뭘 담고 있는 젊은이(?)인가 싶었다. 그는 자신의 마음 또한 타인에게 온전히 이해받을 수 없다고 여기는 건 아닐까 생각하게 했다. 그가 계속 라디오를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쩐지 그 생각이 자꾸 들었다.


내게는 아침시간이었던 푸른 밤들을 보내며 몰랐던 그와 샤이니의 곡들을 알았다. 그룹의 이름은 알았지 샤이니의 곡을 특별히 더 즐겨 들었던 적은 없는데 많은 수록곡들이 내 취향이기도 했다. 샤이니 온유의 목소리가 좋아 최애 가수로 꼽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다. 어쨌든 종현은 나보다 어릴 텐데 생각이 참 많은 사람이구나. 으레 할 법한 위로도 돌리고 돌려 조심스레 건네는 나막한 목소리에서 오는 적당한 거리감으로 인해 되려 안정감을 느끼며 방송을 챙겨 들었다. 그는 소란과 커피소년이 나오는 날에는 그냥 틴에이저처럼 귀가 따가울 정도로 시끄러웠고 나인이 나오는 날에는 인생 2회 차처럼 툭툭 잔잔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죽음은 아무래도 내가 살면서 지인이 아닌 누군가로 인해 느낄 수 있는 가장 충격적 사건 중 하나라고 인정해야 할 듯하다. 그 시절 내 매일의 모습을 재생시키는 기억의 버튼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동안 라디오를 듣지 않았다. 분주하게 살다 문득 알게 된 그의 하차 소식에 나는 마지막 방송을 찾아들었다. 그는 작별을 하는 사람이라기보다 뭘 잃어버린 사람처럼 서럽게 울었다. 나는 지금도 혼자 생각한다. 혹시 라디오를 계속했다면 아직 세상에 있을 것 같다고. 내일도 쉬러 오라던 자신의 엔딩 멘트 때문에라도 살아내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나 혼자만의 확신처럼 있어 슬프다.


<한숨>을 들으면 여전히 가슴이 쿵 한다. 큰 숨이 잘 안 쉬어지는 증상 때문에 내 얘기 같기도 하고, 그 가사가 내 기억 속 푸른 밤 속 종현과 너무 똑같기 때문이기도 하다. 월이라고 하기에는 미미한 팬이지만, 나는 그와 샤이니의 노래를 듣고 기억할 수밖에 없다. 이해할 수 없겠지만 괜찮으니 안아주겠다는 위로의 노래가 얼마나 진심인지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를 품은 채 아직 단단하게 서서 노래하고 있는 샤이니 또한 여전히 내게 위로이기도 하다.


불행을 안는 방식은 모두가 다르지만, 서로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정말 힘들 때 네 마음 안다는 위로의 말이 되려 위선으로 오는 건 너에겐 나와 똑같은 조건의 고통과 상처가 없지 않냐는 고요한 반발이기도 하다. 내가 병원에서 보내던 시절 한동안 쉼 없이 느꼈지만 누르고 덮던 숨은 감정이기도 하다.


<너와 나의 거리>를 듣는다. 종현의 목소리로, 때론 울컥한 온유의 목소리로. 라디오 속 디의 목소리는 아직 다시 재생하지 못했다. 하지만, 문득 돌아본 나의 30대에는 푸른 밤이 내게 소개해준 샤이니의 노래가 가득했다. 나는 찬바람이 불면 의식처럼 그 목소리를 더 많이 찾아 듣는다. 미처 닿지 않겠지만, 언젠가 나를 위로하던 목소리를 부른다. 고마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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