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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영 Jan 23. 2022

어중간히 드러내기

책의 몸을 즐기는 법

 어중간히 드러내기

같은 종류의 종이라 하더라도 두께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 종이의 종류보다 종이의 그램 수가 종이의 성격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종이의 두께는 다소 두꺼운 게 좋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명함도 평량이 250그램은 넘어야 좋고, 책 내지는 100그램은 되면 좋겠다고, 그러면 책등도 더 두꺼워지니 금상첨화라고 생각했었다. 두꺼운 것들은 대체로 견고해서 잘 구겨지지 않고 고급스럽게 여겨져 한 때 자주 사용되었다.


근래에 와서 나는 얇은 종이의 맛에 빠져 있다. 얇다가 더 얇아져, 아예 뒷면의 활자나 드로잉이 앞면에 비쳐도 나름 좋다. 종이가 매우 얇아지면 뒷장까지 투영되고 여러 겹의 중첩 이미지가 생긴다. 농담의 차이로만 그려지는 한국산수화처럼 투명도의 차이로 평면은 깊이 있는 삼차원 공간을 만든다. 무엇보다 신체를 어중간히 은폐한 가리개는 호기심과 도발성을 동시에 호출한다. 가려진 몸의 연약하고 섬세한 이미지는 감각을 자극한다. 들릴듯 말듯한 작은 속삭임은 간질간질하다. 



선물 포장 같은 반투명 지면은 주역은 아니더라도 본편이 있기 전의 예고편처럼 심박수를 올려놓는다. 오래전 구입한 책 중에 『유혹의 학교』(이서희, 한겨레출판사,2016)가 있다. 표지의 흑백 사진을 덮고 있는 진홍과 보라의 반투명 종이가 얼마나 관능적이었던지. 책에 대한 호기심을 곱절은 끌어 올려준 것 같다. 흑백사진의 포즈와 흐릿함도 꽤 유혹적이었다. ‘반은 가린다. 반만 드러낸다’는 의상에서나 책에서나 여전히 몸에 작동하는 유혹의 장치다. 

우리 서점에서는 비침이 있는 유산지-빵이나 제과를 포장할 때 쓰는 종이-를 포장용 종이로 사용하고 있다. 반투명의 은폐력 덕분에 내용물을 유추해 볼 수 있고, 면에 생기는 균질하지 않은 음영도 재미있다. 실크스크린 책을 만들 때도 유산지를 사용했는데, 습기에는 너무 취약해서 다루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유혹의 학교』도 반신욕 하면서 봤더니 그 반투명 덧싸개가 습기로 인해 쭈글쭈글해지고 말았다. 


늘 울 수 있는 기회를 엿보고 있는 우울한 소녀처럼 극히 조심해서 다뤄야 하는 재질이다. 조금만 물이 닿아도 주름이 생기고, 조금만 소홀히 대해도 상처 입는다. 여러모로 내 상상력을 자극하는 부끄럼 많은 종이다. 


아무튼 사람이고 종이고 섬세하고 낯가림이 있는 것들이 왠지 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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