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몸을 즐기는 법
- 등이 없는 등
책이 되는 조건은 무엇일까? 출력하여 쌓아둔 종이뭉치는 책일까? 큰 종이를 접어서 만든 형태는 책일까? 책의 원류를 찾아 파피루스나 죽간, 아니 점토까지 거슬러 가야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핵심만 이야기하자면 서양의 역사에서 책Book은 코덱스가 조건이다. 동양의 책冊은 상형문자의 형태에서 짐작하듯이 엮인 상태의 것, 즉 대나무를 세로로 배열하고 가죽끈으로 엮은 죽간부터 책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책의 공통점은 제본으로 묶여야 한다는 점이다. 단 두 장의 종이를 묶어도 책이다.
낱장의 종이를 묶는 제일 쉬운 방법은 중철*가운데매기이다. 독립서적 중에는 중철이 많다. 가볍고 단순한 공정으로 쉽게 만들 수 있다. 독립서적은 형태에 있어 자유롭다. 나의 서점에도 얇은 책들이 많다. 중철 서적은 매대에 놓였을 때는 다른 책과 별다르지 않지만, 꽂아두면 등이 없기 때문에 책을 찾기 어렵다. 책에게 등은 명패다. 나는 얇은 책들은 따로 모아서 꽂아둔다. 여러 권의 중철 책이 모이면 두터운 책 등 같은 효과를 내기 때문에 궁색해 보이지 않고, 두꺼운 책틈에 끼여 책이 사라지는 것도 막을 수 있다.
근데 유심히 보면 중철에도 격이 있다. 중간에 찍힌 스테이플러의 위치도 다르고, 심의 굵기도 다르다. 재봉질로 묶인 것들은 실의 종류나 땀의 간격에 차이가 있다. 세 개의 구멍을 뚫어 실로 엮기도 한다. 가장 간편한 제본방식이다. 그렇다보니 중철은 아무래도 일시적이고 임시변통 같은 느낌이다. 소규모 단체나 개인이 수작업으로 만든 B급 책이나 무료 홍보물에서 많이 사용된다.
중철이 얇은 것만은 아니다. 꽤나 많은 양의 페이지를 중철로 묶은 것도 있다. 두툼하다. 등이 있어야 할 책 분량이지만 책등이 할당되지 않고 앞뒤 표지가 등의 역할을 한다. 등에는 따로 책제목이 없다. 표지와 등이라는 경계를 벗어났기 때문에 느슨하고 예술적이다. 중철은 으레 32페이지 내외에 사용하는 가벼운 방식인데, 200페이지를 묶는 육중한 중철을 만드는 것이다. 진지하고 무게 있는 사람이 반바지를 입고 나온 것처럼 명랑해보인다. 경계를 슬쩍 넘어가는 위트와 자신감이 좋다.
나도 자주 경계를 넘어가려고 나름의 노력을 하고 있지만 쉽지 않다. 여차 하다가는 보기 싫은 부조화나 무례함이 되기 쉬워서, 역시 그 경계에서 노는 건 고수나 하는 건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