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쓰겠습니다.
어릴 적 나는 어중간하게 글 좀 쓰는 아이였다. 국문학을 전공한 아빠의 유전자를 이어받아서인지, 나는 책을 별로 읽지 않는 편이었음에도 학창 시절 백일장이나 독후감 대회에서 곧잘 상을 탔다. 어중간하다고 표현한 이유는 대부분 장려상을 수상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내가 네 살 무렵 썼던 ‘개구리’와 ‘똥’이라는 제목의 시를 읽고 내가 천재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 정도 나이 자녀를 둔 부모들은 모두 아이가 천재나 영재가 아닐까 생각한다지만… 엄마는 내가 기대만큼 천재적으로 자라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하며 아직까지도 틈만 나면 내게 그 이야기를 한다. 지금이라도 소설이든, 각본이든, 시든, 가사든, 칼럼이든 장르를 가리지 말고 뭐라도 써보라고 부추긴다. 신기한 것은 엄마의 성화를 차치하고서도 나 역시 자신이 언젠가는 제대로 된 글을 써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다짐하고 생각했던 것으로 따지자면 벌써 유명 작가가 되었거나 적어도 나만의 글을 써서 밥벌이를 하는 정도는 되어 있어야 할 것만 같다. 그런데 현재의 나는 그저 평범한 직장인일 뿐, 작가로서의 제2의 삶은 그저 꿈만 꾸는 상태다. 일단 게으름이 문제다. 글을 쓰고는 싶지만 막상 쓰다 보면 귀찮아진다. 고된 업무를 마치고 주어지는 저녁 시간에는 운동과 집안일과 영상 감상(넷플릭스와 유튜브를 5:5 정도로 본다)만 해도 자야 할 시간을 훌쩍 넘기고, 주말은 한 주 동안 고생한 나를 위로하며 빈둥거리기에 바빴다. 마음을 잡고 시간을 내서 글을 쓰다 보면 또 다른 벽에 부딪혔다. 내가 쓴 글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작용했던 것이다. 대학도 자연스럽게 국어국문학을 전공해 지금까지 주변인들의 글을 읽거나 첨삭할 기회가 많았는데, 그때마다 수필은 물론이고 시나 소설에서까지도 쓴 사람의 정체성이 꽤나 많이 묻어 나온다는 것을 느꼈다. 나의 글을 남에게 보여준다는 것은 곧 나를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관종의 정반대 성격으로 관심받는 것이 싫고 자신에 대해 알리는 것을 꺼렸기에, 누군가 내 글을 읽는 것 이 부담스럽기 그지없었다.
글쓰기를 방해하는 이런 요인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굳이 글을 쓰려고 하는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봤다. 마땅한 이유는 떠오르지 않는다. 그냥, 앞에서도 신기하다고 썼듯이 마치 날 때부터 그런 운명을 타고난 것처럼 글을 쓰는 것은 나에게 묘한 사명감을 준다. 운명에 이끌리듯 나는 현재 기업 홍보실에서 보도자료 등을 써내며 나름대로 글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내가 본업 외에 자기 계발을 한다면 그것도 글과 관련된 것이어야 한다고 마음속의 누군가가 외치고 있다. 그건 아빠에게 받은 유전자이기도 하고, 네 살 딸의 동시를 잊지 못하는 엄마의 목소리일 수도 있겠다. 더 이상 귀찮거나 공개하기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글쓰기를 미루지 않고 이 글을 쓰게 해 준 친구의 목소리도 있다. 그와는 유유상종으로 대학시절에 만나 각자의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해왔다. 앞으로는 서로 북돋아가며 꾸준히 글을 쓰는 연습을 하기 위해 마감 요일을 정하고 주마다 한 편의 글을 써내기로 했다. 게으름과 부끄러움을 극복하고 시도하는 이 주간 글쓰기가 훗날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글을 쓰기 위한 첫걸음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