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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mplexArea Jan 08. 2019

[에세이] 층운

편지는 나를 녹이고, 엽서는 나를 굳힌다. 다녀오세요, 엽서에 새겨야 할 말이다. 저 다섯 자에 나를 빚어낸다.  안개는 나를 잘라내고 형상을 그곳에 남는다.

스위스에서 한 장의 사진이 도착했습니다. 유럽의 전경을 담은 엽서처럼 P가 보내준 사진에는 파스텔 색 향기로 가득합니다. 구름 가득한 하늘 그곳 바로 아래, 몇몇의 지붕들만이 도드라져 있습니다. 나는 이 색 대비가 익숙하지 않습니다. 구름이 미간을 내리 간지릴 만큼 가까워 기묘한 불안감이 듭니다. 혹시 영화 <미스트>를 아시나요? 이 구름이 이리도 가까이 마중나왔는 사실에 나는 심장이 쿵했습니다.

 섬칫 놀라게 할 만큼 고개를 뺀 채 안개라는 얼굴. 시선은 시각과 달리 포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러분도 알고 계실 것이라 생각됩니다. 시선은 구름에게 있고, 나는 노출되어 있습니다. 사로잡힌다는 말은 바로 이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요? 


오늘 층운이란 말을 처음 들었습니다. 

듣자마자 매료되었습니다. ‘층’이 잘라버리는 그 단면도 내가 즐겨 사용하는 이미지를 잘 표현해주지만, 그것을 품에, 그것도 살짝 먹으며 감싸안은 ‘운’은 또 어떻고요. 기표가 지시하는 의미보다 더 멀리 내지르는 "층운" 이럴 때면 소쉬르가 우습습니다. 보세요. 산머리를  삼킨 구름을요. 구름이 삼켰음에도 내게는 ‘잘림’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스위스의 구름을 끌어모은 P의 사진에서 기호 아닌 언어를 찾고 있습니다.


엽서를 닮은 사진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진 프레임 안에선 P를 찾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풍경은 엽서처럼 존재를 알립니다. 한 컷의 사진이 그저 스위스만을 담은 것은 아니니까요. 어쩌면 무엇보다도 압도했던 것은 이리도 가까이 코내민 구름이 아니라, 그곳에 누군가가 있었다는 사실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층운이라는 말을 사전에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다 이 한 문장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나는 가끔 기호학을 놀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층운으로부터는 가끔 안개비가 내리기도 하는데 이보다 강한 비는 기대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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