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림의 색조를 잘게 인식했을 때 비로소 비애감은 움튼다.
물 속의 골리앗이 있다. 그런데 이 이미지는 김애란의 것과 그다지 상관이 없다. 최초의 탄생, 아마 김애란의 단편이 주요했겠지만 지금 물 속에 가라앉아 왕왕 거리는 소리는 그것과 사뭇 다르다.
간혹 잔잔한 비애감이 고요한 내 방 침대 아래에서 물안개처럼 핀다. 그럴 때면 새침해지거나 집중도 높은 눈빛을 뽐내곤 한다. 골똘히 생각하는 척 아니면 그러한 자기 모습을 떠올리는 골몰함. 주름진 미간이 보여주는 고뇌의 깊이는 문자 그대로의 미간의 깊이었을지도 모른다. 비애감이란 특별한 대상 없이 어떤 근본배경 같은 색조로써 다가온다. 미묘한 차이. 나 같은 사람은 느낌으로서만 알아차릴 그런 강도들. 이런 것들은 도무지 언어로 표착되지 않는다. 언어는 자기 한계의 언저리에서 울린다. 그리고 살갗이 그러한 떨림의 색조를 잘게 인식했을 때 비로소 비애감은 움튼다.
글을 쓰는 것이 항상 두려웠던 내가 무언가를 문자로 옮긴다는 사실이 어떤 신호겠거니 생각하다보면, 사실 별 게 아니다. 공들여 쓴 글이나 지금처럼 늘여놓은 글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삶에 있어 한 번도 극복하지 못한 상대가 주어로서의 '나'였다. 글쓰기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전투에는 승기랄 것이 없다. 물 속의 골리앗은 아마 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