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니스트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 문학동네(이인규 번역)
만약 산문 작가가 자신이 쓰고 있는 것에 대해 충분히 잘 알고 있다면 그는 그가 알고 있는 것을 생략할지 모르고, 독자는 작가가 충분히 진실하게 글을 쓰고 있다면 마치 작가가 진술한 것처럼 그 사건을 강렬하게 느끼게 될 것이다. 빙산이 위엄 있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직 8분의 1만이 수면 위에 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잘 모르기 때문에 생략하는 작가라면 그의 작품에 공간만을 만들어 낼 뿐이다. (헤밍웨이, 『오후의 죽음』)
글쓰기에는 어떤 트렌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최근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는 글쓰기 훈련은 욕망과 관련이 깊어 보입니다. 글쓰기가 자기 서술의 표현 수단에서 그치지 않고, 억압으로부터 자신의 욕망을 해방하는 글쓰기가 있스비다. 하지만 예전에는 분명 ‘단문’을 강권하는 글쓰기 추세가 있었습니다. 글을 쓸 때 형용사/부사는 걷어내야 하는 거추장스런 장식, 쉼표는 문장을 복문으로 만들어 쓸데없이 복잡하게 한다고 배웠습니다. 간결하고 의미가 쉽게 전달해야 하는 정확한 글쓰기, 그러한 문체를 ‘하드보일드’ 양식이라 부릅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이 하드보일드 양식의 세계적인 거장이기도 합니다.
하드보일드는 불필요한 수식을 일체 빼버리고, 신속하고 거친 묘사로 사실만을 쌓아 올리는 이 수법은 특히 추리소설에서 추리보다는 행동에 중점을 두는 하나의 유형으로서 ‘하드보일드파’를 낳게 하였고, 코넌 도일(Arthur Conan Doyle) 류의 ‘계획된 것’과는 명확하게 구별된다. 원래 이 장르는 1920년대 금주령시대의 산물이라고 하며,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도스 파소스(Dos Passos) 등 미국의 순수문학 작가들의 문학적 교훈을 적용시키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하드보일드 [hard-boiled] (두산백과)
헤밍웨이는 『오후의 죽음』에서 글쓰기 철학에 대해 인상적인 글을 남겼습니다. ‘빙산 이론’이라 알려진 헤밍웨이의 글쓰기론은 절제된 이미지를 시적인 운율에 실어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헤밍웨이의 문장엔 빠르고 리듬감 있는 이미지들이 마치 스카타토 기법처럼 이어지는데, 몇몇 사람들은 이러한 헤밍웨이의 글쓰기가 세잔에게 영향받은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세잔은 고전적인 회화에서 원근법이 강제한 ‘깊이’를 걷어낸다. 이것은 회화를 더욱 평면적으로 만드는 것이며 깊이보단 ‘표면’을 강조하는 양식으로 발전한다. 빛이 가져다주는 ‘표면/색채’가 주요 구성요소, 즉 인상을 회화의 전면적인 양식으로 나타난다.
딱딱하고 빠른 필치의 힘이 느껴지는 헤밍웨이의 문체는 정직·진실·극기·우정 등 보편적 휴머니즘 요소가 연상됩니다. 『노인과 바다』는 소설의 형식과 내용이 상당히 일치하는 편입니다. 예를 들어 청새치를 공격하는 상어에 맞서 분투하는 노인은 자신의 격렬한 감정을 단단하게 누르면서 말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어.” 노인은 말했다. “사람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언정 패배하진 않아.”(108쪽)
그런데 상어들이 밤중에 달려들면 이제 어떻게 하지? 뭘 어떻게 한다?
“싸우는 거지, 뭐.” 노인은 말했다. “죽을 때까지 싸우는 거야.”(121쪽)
내면에 대한 깊은 성찰을 만연체로 펼쳐놓는 프랑스, 러시아 소설과 달리 헤밍웨이는 마치 빙산처럼 내면의 일각만을 표현합니다. 그렇기에 고독과 척박한 환경에서 자신의 인간성을 시험하는 노인 산티아고의 목소리에서 우리는 외로움에 쇠약해져 가는 한 인간의 목소리만이 아닌 유한하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휴머니즘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책상에 있던 『노인과 바다』를 보고 한 친구는 “인간 찬가의 정수”라고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이 책은 실존에 대한 무궁한 격려가 있습니다. 또한 보편적 휴머니즘이 『노인과 바다』를 불멸의 고전으로 남겼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 독서 경험은 다른 시그널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역작에 다분히 드러나 있는 폭력성을 과연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격렬히도 박수를 보내는 그 ‘인간’은 도대체 누구일지 다시금 생각하게 됐습니다.
멕시코 만류를 따라 낚시하는 노인은 사냥꾼으로서의 난폭함과 물고기와 새를 다독이는 다정다감한 모습, 즉 야누스적인 양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컨대 청새치와 벌이는 사투에서 노인은 물고기를 자신이 죽여야 하는 적이면서도, 어부의 사명을 띤 자신의 존재를 확장하게 하는 존경받을 동지이기도 합니다. 만새기를 먹으며 허기를 달랠 때조차 낚싯바늘에 걸려 먹이를 먹지 못하는 청새치 걱정을 하기도 하고, 또 마치 권투 시합처럼 물고기가 휴식할 시간을 배려하기도 합니다.
지금은 놈을 가만히 내버려두는 게 좋아. 해질녘에 너무 자극하는 건 좋지 않아. 해질 무렵은 어떤 물고기한테든 힘든 시간이니까.(77쪽)
물고기를 포획의 대상으로 보는 것을 넘어 동등한 존재자로서 인정하고, 인간과 사투를 벌이는 대등자로 이해합니다.
놈이 왜 뛰어올랐는지 궁금하군, 노인은 생각했다. 마치 자기가 얼마나 큰지 보여주려고 뛰어오른 것 같기도 했다. 어쨌든 이제 놈의 크기를 알았어, 노인은 생각했다. 나도 놈에게 내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그러면 쥐가 난 손을 놈한테 들키겠지. 놈이 나를 실제의 나보다 더 강한 존재로 생각하게 내버려두자. 아니, 난 그렇게 더 강해지고 말겠어. 차라리 내가 저 물고기라면 좋겠군, 노인은 생각했다. 놈의 이 모든 힘에 맞서고 있는 게 그저 내 의지와 머리밖에 없는 형편이니 말이야.(67쪽)
해양생물들과 바다를 이해하는 노인의 모습에서 많은 사람은 헤밍웨이의 생태주의 혹은 범인류애적 가치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서술들은 보편적 가치 아래 교묘하게 억압과 폭력의 기치를 숨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알아?
가느다랗게 끓어오르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 뒤 그는 보란 듯이 웅덩이를 향해 양동이를 엎었다. 낚시바늘에 주둥이를 찢긴 물고기들이 피로 탁해진 물과 함께 웅덩이로 주르륵 흘러들었다. 앨리시어는 낚시의자 뒤편에 서서 노인이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중략) 알아? 너는 모르고 나는 안다는 식으로 그는 말하고 그게 그의 입버릇이지만 앨리시어가 보기에는 그는 미개하다. 입을 찢었으면 먹든가 죽이든가. 입을 찢어놓고 도로 놓아주며 가치 있는 목숨 운운하는 인간은 아무래도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황정은, 『야만적인 앨리스씨』)
뜬금없이 황정은 작가의 글을 불러오는 것은 한 작가에 대한 편애일지도 모르지만, 『노인과 바다』의 주요 행위인 ‘낚시’를 생각할 때면 항상 떠오르는 문장이 입니다. 앨리시어에게 “모든 생명은 존귀한 것이야”라고 훈계하며 아버지 자신은 낚아 올린 물고기를 방생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것을 목격한 앨리시어는 그 기만적 행위에 대해 날카롭게 얘기합니다. 마치 시혜를 베풀 듯이 생명에 대해 운운하지만 정작 그 피해 생물은 입안이 다 찢겨 피범벅이 되지 않았습니까. 잡은 물고기를 방생하는 낚시꾼의 행동은 도덕적으로 기만적인데, 폭력을 매개로 도덕적 우월을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째 『노인과 바다』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물고기야, 네가 날 죽일 작정이구나, 노인은 생각했다. 하지만 너도 그럴 권리가 있지. 나의 형제여, 난 너보다 더 훌륭하고 아름답고 침착하고 고상한 존재를 결코 본 적이 없다. 자, 어서 와서 날 죽여라. 누가 누굴 죽이든 난 이제 상관없다.(96쪽)
노인은 생각했다, 지금 놈이 나를 데려가는 건가, 아니면 내가 놈을 데려가는 건가? 내가 놈을 뒤에다 놓고 끌고 가고 있다면 그건 문제될 게 전혀 없다. 또 놈이 위엄을 모두 잃은 채 배에 실려 있다면 그 또한 문제될 게 전혀 없지. 하지만 놈이랑 배는 나란히 묶인 채 둘이 함께 나아가고 있단 말이야. 그러다가 노인은 생각했다, 까짓것, 놈이 원한다면 놈이 날 데리고 가는 걸로 하지, 뭐. 내가 놈보다 나은 건 꾀가 많다는 것뿐이고, 또 그런다고 놈이 나한테 무슨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니까 말이야.(104쪽)
심장에 작살을 꽂아 숨통을 끊은 어부는 물고기가 여전히 자신과 동등하게 항해하는 존재로 여깁니다. 물고기에게 대화를 하는 장면은 가히 무한한 힘인 대자연 아래서 두 유한한 피조물들은 하나의 형제처럼 자리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행위는 인간으로서, 더 정확히는 어부로서의 자아를 물고기라는 타자를 통해 확대하는 것은 아닐까요? 시종일관 자연에 대해 찬가를 부르지만, 그 모든 행위는 영웅이 되고 싶은 한 유한자의 극기에 대한 자기 찬미는 아니었을까요? 자기 자아를 확대하기 위한 거울로써의 타자는 서구보편주의에 각인된 유구한 역사입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엔 이 거울이론이 아주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여성은 지금까지 수 세기 동안 남성의 모습을 실제 크기의 두 배로 확대 반사하는 유쾌한 마력을 지닌 거울 노릇을 해왔습니다. 그 마력이 없었다면 지구는 아마 지금도 늪과 정글뿐일지도 모르지요. 온갖 전쟁의 위업은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고 우리는 아직도 양의 뼈다귀에 사슴의 윤곽을 긁어놓거나 부싯돌을 양가죽이나 미개한 취향에 걸맞은 단순한 장식물과 교환하고 있을 겁니다. 문명사회에서 거울의 용도가 무엇이건 간에, 거울은 모든 격렬하고 영웅적인 행위에 필수적인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나폴레옹과 무솔리니는 여성의 열등함을 아주 힘주어 강조합니다. 만일 여성이 열등하지 않다면 거울은 남성을 확대시키기를 그만둘 테니까요. 그것은 여성이 남성에게 무척 빈번히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는 데 일면 도움이 됩니다. 남성이 여성의 비판을 받고 안절부절못하는 것도 설명해 주지요.(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영웅적 자아의 비대함을 강조하기 위한 폭력은 직접적으로든 은연중에든 타자에게 가해집니다. 어부라는 직업적 소명은 노인의 존재근거이며, 그것만이 바다 위에서의 크나큰 시련을 견디게 했을 뿐만 아니라 도전하게 했다.
네가 저 물고기를 죽인 건 단지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먹을거리로 팔기 위해서만이 아니었어, 노인은 생각했다. 넌 자존심을 위해서 그리고 어부이기 때문에 저 물고기를 죽였어. 넌 물고기가 살아 있을 때 녀석을 사랑했고 또 죽은 뒤에도 사랑했어. 네가 녀석을 사랑한다면 죽이는 건 죄가 아냐. 아니, 오히려 죄보다 더한 것이 되나?(110쪽)
상어들의 공격으로 처참하게 뜯긴 청새치가 그 위엄을 잃어가는 모습을 보며 노인은 가슴 아파합니다. 어떤 때는 “너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나 나오질 말았어야 했어. 미안하구나, 물고기야.”라고 말하며 먼바다에 나와 고생 끝에 성공한 낚시를 부정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마치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기 위해 거울을 소중히 다루는 것 이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예컨대 이러한 범인류애적 우정이 상어들에게도 유효했을까요? 쿠바로 돌아가는 여정에서 수차례의 상어들과 싸워 죽입니다. 처참한 몰골로 죽어간 상어에 대해 힘의 과시는 느껴졌어도 우정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상어는 노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자아감을 확대하는 거울이 아니었던 셈입니다.
결코 노인의 작은 돛단배는 낭만적이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결국 그 배 위에 놓인 도구들이란 살을 뚫는 살육 도구들이며 그 갑판은 참혹극이 벌어지는 무대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만약 노인이 이러한 시련 끝에 자신이 자행한 살육을 철저히 반성했다면 아래와 같이 말할 수 있었을까요?
좋은 고기잡이용 창을 하나 마련해서 배에 늘 가지고 다녀야겠어. 창날은 낡은 포드 자동차에서 뜯은 스프링 판으로 만들 수 있을 거야. 과나바코아에 가서 갈아오면 될 테고. 날은 날카로워야 하는데 담금질을 너무 많이 하면 안 돼, 잘 부러질 수 있으니까. 내 칼은 부러지고 말았단다.(130-131쪽)
여기서 말씀드리고 싶은 건 어부로서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거나 부도덕하다고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헤밍웨이의 글에 드리운 휴머니즘의 그림자가 폭력적 인식들을 따뜻한 인류애로만 전도시키는 분위기를 경계하고자 했습니다. 분명 서구 엘리트 문학의 거장인 헤밍웨이의 세계시민주의는 우리에게 어떤 귀감을 주고 있습니다. 20세기의 파국이란 역사를 짊어진 헤밍웨이는 이 소설에서 파괴된 인간성을 다시금 모색하고 있습니다. 영미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당시 실존주의 문학들이 많이 쓰이고 읽혔던 것은 악마화된 인간의 역사 속에서 여전히 인간임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어." 노인은 말했다. "사람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언정 패배하진 않아."(108쪽)
그러한 보편적 힘들이 문학에 투영되어 문화권을 불문하고 그토록 사랑받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럼에도 이 독서노트의 주안점은 서구인(노인 산티아고)의 푸른 눈동자에 비친 세계가 보편적 세계 자체는 아닌 것처럼 고전을 의심하기를 그쳐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노인의 모든 것이 늙거나 낡아 있었다. 하지만 두 눈만은 그렇지 않았다. 바다와 똑같은 빛깔의 파란 두 눈은 여전히 생기와 불굴의 의지로 빛나고 있었다.(10쪽)
이와 관련해서 소설의 배경이 쿠바인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는 스페인계 쿠바인이었습니다. 콜럼버스 이후 쿠바가 400년 동안 스페인의 식민지배를 받았고, 그 이후 다시 반세기를 미국의 정치적 지배를 받았습니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대는 20세기 초는 그 갈등이 극에 달하고 있었을 때입니다. 하지만 소설 그 어디에도 푸른 눈의 노인의 실존을 증명하는 것 외에 식민역사는 드러내는 문장은 없습니다. 또한 “그는 멕시코 만류에서 조그만 돛단배로 혼자 고기잡이를 하는 노인”(9쪽)이었지만, 멕시코 만류의 처참한 식민역사를 서술하지 않습니다. 쿠바는 스페인계 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노예식민지였을 뿐만 아니라 19세기에는 노예를 수입하는 주요 국가였습니다. 대서양을 통과한 노예선들은 멕시코 만류를 타고 아프리카 노예를 실어 날랐습니다. 멕시코 만류는 참담하게 바다 위에서 죽어간 노예 무역항로였습니다. 그런 역사를 뒤로한 채 아프리카를 상상하는 헤밍웨이의 노인에게서 아프리카는 노예도, 흑인도, 식민주의도 없이 그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 사자만이 있을 뿐입니다.
사자에 관한 꿈은 처녀지로서의 아프리카, 푸른 눈의 시선으로 여전히 끝마치지 못한 탐사를 열망합니다. 실제 식민주의의 역사가 제거된 이 아프리카는 하나의 이미지, 마치 프로이트가 여성의 욕망을 이성의 빛이 투과되지 않는 '검은 대륙'의 검은 숲이라 불렀던 비유와 유사하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