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omplexArea Jan 09. 2022

[독서노트] 프란츠 카프카, 「가장의 근심」

카프카의 오드라데크와 '숨-탄-것' 그리고 히스테리안



(Disegno originale dell'artista Elena Villa Bray)


“그 웃음은 폐를 가지고는 만들어낼 수 없는 그런 웃음이다. 그것은 마치 낙엽의 바스락거리는 소리처럼 들린다.”
(프란츠 카프카, 「가장의 근심」)


오드라데크의 웃음은 폐가 낼 수 없는 소리가 아니다. 오히려 적극적인 의미를 지닌 웃음으로서 폐가 없기에 낼 수 있는 소리다. 인간과 비인간, 그뿐만 아니라 비유기체의 요소가 기묘하게 섞인 오드라데크의 웃음은 우리를 근심의 수렁으로 밀어 넣는다. 우리는 이 객체를 분명하게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명백히 오드라데크에게 교란당하고 있다. 이해의 규정 능력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인과성은 간접적이다.


하지만 의미가 절연된 곳에 오드라데크-객체를 두고 멀찍이 바라보는 것은 어쩐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이런 께름칙한 마음은 ‘사물’이란 개념 대신 ‘객체’를 선호하는 이유에서 온 것일 거다. 카프카의 단편 <가장의 근심>에서 화자(가장家長)는 오드라데크의 어원적 기원을 찾아 그 의미를 해석하려고 한다. 이 시도는 곧 난감한 실패로 돌아오지만, 유추 가능한 시사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기묘한 오드라데크의 외관처럼 어원의 형태도 여러 언어로 조합으로 보인다.

체코어(그리고 일반적으로 서부 슬라브어)에는 ‘odraditi’라는 동사가 있다. 이 단어는 ‘누구에게 무엇을 하지 않도록 충고하다’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어원적으로 독일어 ‘rat, Rat(고문관, 충고)’에서 유래한다. 슬라브어의 영향은 전철 ‘ob(ab, weg von, 부정 분리)’ 와 축소를 표현하는 후철 ‘ek’에까지 미친다. (중략) 독일어에서 오드라데크에 상응하는 형태는 아마 ‘무엇을 하지 못하게 하는 작은 것’일 것이다.
(빌헬름 엠리히, <프란츠 카프카>, 지식을만드는지식)


이 시적인 작은 물체가 지닌 의미는 모든 제한적인 의미를 파기하는 것, 모든 의미 해석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빌헬름 엠리히, <프란츠 카프카>)     


그 목적과 쓰임새를 유추하는 가장의 시선에서 오드라데크는 단순히 낯선 사물이 아니다. 인간의 규정 능력이 끝내 다다르기를 거부하고 반문하는 행위력-객체이다. <가장의 근심>에서 오드라데크는 규정폭력 아래 질문을 받는 자이기도 하지만 응수하는 투사이기도 하다. 그는 꽤 침착하게 우리와 말을 섞을 뿐이어서 대화라고 부를 것이 없다.    

  

“넌 이름이 뭐니?”라고 그에게 물을 것이다. “오드라데크” 하고 그가 말한다. “넌 어디서 살지?” “정해지지 않는 집” 하고 말하면서 그는 웃을 것이다.
(프란츠 카프카, 「가장의 근심」)



소설에서 질문하는 자는 오드라데크를 규정하려는 가장이다.  한 공간의 주인으로서 가장은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아래 오드라데크를 놓고자 그에게 질문한다. 그러나 오드라데크의 ‘정체’를 밝혀내려 노력하자 끝내 실패를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카프카의 단편에서 오드라데크는 결코 반문하지 않는다. 하지만 근심 아래 자신의 존재를 골똘히 생각하는 자는 공간의 통제력을 잃은 주인이 된다. 가장은 인지능력이 잡아채지 못한 실패의 지점에서 근심에 빠진다. 연고와 쓸모 그리고 존재의 목적 역시 알  없는 오드라데크는 우리에게 이방인처럼 다가온다. 오드라데크는 가장의 질문에 적절한 답을 제시하지 않으며 오히려 곤란하게 만든다. 질문을 되돌려 주고 교란한다. 전제된 질문에 대답조차 되지 못하였을 때 질문은 수렁에 빠진다. 아랑곳하지 않고 질문을 끊임없이 되돌려 문장을 완성하지 못하게 한다. 말에 숨을 불어넣는 것이다.

  옳다. 하지만 이방인에 대한 문제는 취급해야 할 하나의 문제가 되기 이전에, 하나의 개념, 하나의 테마, 하나의 문젯거리, 하나의 프로그램을 가리키기 전에, 그것은 먼저 이방인이 제기한 질문, 이방인에게서 온 질문이고, 그리고 또한 이방인에게 보낸, 이방인에게 제기한 질문이다. 마치 이방인이란 우선 제일 먼저 질문을 하는 사람, 또는 사람들로부터 첫 질문을 받는 대상 이기라도 하듯이. 마치 이방인이란 물음으로-된-존재물음으로-된-존재의 물음 자체, 물음-존재 또는 문제의 물음으로-된-존재이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이방인은 또한 첫 물음을 제기하면서 나를 문제선상에 올려놓는 사람이다.
(자크 데리다, 남수인, <환대에 대하여>, 동문선)     


‘숨'은 단순히 생화학적 현상에 그치지 않는 보다 적극적인 행위자-행위성이기에 오드라데크에 생명이 깃든 것이냐고 물을 필요는 없다. 비인간 유기체에도 숨이 깃들어 있음을 알린 우리말 ‘숨탄것’이 있다. 숨탄것에는 인간중심주의의 한계가 엿보이지만, 비인간 유기체에게 행위력을 재분배하는 아이디어를 보여준다. 하지만 기후위기에 직면한 오늘날의 생태 문제는 더 이상 유기체-행위자만으로 쉬이 접근하기가 어려울 만큼 복잡해졌다. 숨탄것에도 시대에 맞게 의미의 확장이 필요하다.      

  우리 조상들의 생명존중 정신이 깃든 말이다. 야생 짐승이든 가축이든 ‘숨탄것’이라 하여 그 생명을 함부로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탄-’의 으뜸꼴인 ‘타다’는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인다. ‘말을 타다’, ‘재능을 타고 나다’, ‘커피에 설탕을 타다’, ‘상을 타다’, ‘가르마를 타다’, ‘가야금을 타다’, ‘부끄러움을 타다’ 따위의 표현에서 ‘타다’는 각기 다른 뜻을 가지고 있는데, ‘숨탄것’에서 ‘-탄-’은 ‘선천적으로 어떤 성질을 지니고 난 것’을 말한다. 넓은 뜻으로 사람은 물론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을 뜻하는 우리말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숨탄것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한 우리 말 풀이사전, 초판 1쇄 2004., 10쇄 2011., 박남일)     


이러한 고민 아래 숨탄것을  문자 그대로의 의의뿐만 아니라 그 외연을 넓혀 --(행위력-권리-객체)’으로 표기해 목록화되지 않은 행위자에게 행위력을 재분배하는 노력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숨-탄-것(오드라데크)은 인간, 동물, 자연, 석탄, 전기, 원자력 등 행위력을 지닌 객체를 뜻한다. 이러한 온갖 잡동과 생명이 뒤섞인 기묘한 오드라데크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오늘날의 가장(家長)인 우리는 이 숨-탄-것의 광경에서 쓰레기-더미의 형상을 찾아낼 것이다. 오드라데크는 가상의 객체라기보다 가장(假裝)의 객체이기도 한데 그런 의미에서 오드라데크는 보이지 않는 공간(Void)의 가장(假長)이다. 객체가 행위력을 잃고 보이지 않는 공간으로 밀려질 때 쓰레기가 된다. 오드라데크는 죽은 사물인 것일까? 가장(家長)은 고통스럽게 자문한다.      

나는 그가 어떻게 될까 하고 헛되이 자문해본다. 그가 도대체 죽을 수도 있을까? 사멸하는 모든 것은 그전에 일종의 목표를, 일종의 행위를 가지며, 그로 인해 그 자신은 으스러지는 법이다. 그러나 이 말은 오드라데크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오히려 폐가 없기에 웃을 수 있는 웃음소리. 쓰레기로 존속할 때 불멸하는 객체. 행위력이 공간을 주름잡는 주인에게 곤란함을 되던지는 이방인의 위력이라면 숨-탄-것은 히스테리안이 된다.

작가의 이전글 [독서 노트] 어니스트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