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에 관하여"
브런치 작가서랍에 담겨 있던 2023년 10월의 어느날 글입니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글이었는데, 그 때는 이 에세이를 내놓기 창피했었나 봅니다. 시간이 꽤나 흘러 이제는 손을 떠난 원고가 되었습니다.
그대로 올려야겠습니다.
일기를 쓰는 일은 내게 어려운 일에 속합니다. 글의 목적과 내용의 불확실성, 거울처럼 비춘 욕망의 제 얼굴을 통제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 비롯됩니다. 무릇 에세이의 빈번한 전형으로 일기를 떠올렸고, 저는 글을 쓰고 싶단 욕망이 일 때는 가장 먼저 일기(日記)를 떠올렸습니다. 하루를 기록하는 글에 대한 가지런한 태도는 그다지 먼 기억의 요청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일기에 대한 의식이 가장 또렷했을 때가 스스로에 대한 열등의식으로 마음을 다잡았던 시기와 겹쳤고, 그 과거는 오늘날 제 기억의 근(近)과거입니다. 가깝다는 뜻은 숫자로 환원되는 기계적 시간상 의미가 아닙니다. 유독 지독하리 만큼 부러진 손톱처럼 쓰라린 오래된 인상들이 있고, 바로 어제 누군가를 바랐던 마음은 짙은 바다 위 바람에 실려가는 부드러운 모래처럼 가볍고 머나멉니다.
일기는 시간의 굴곡 너머 지나간 인상을 단순 반복하지 않고,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심원한 경험으로 다시 나타나기 일수입니다.
일기는 시간의 굴곡 너머 지나가버린 인상을 반복하지 않습니다. 지난 날 있었던 어느 순간보다도 더 심원한 경험이란 비로소 흘러간 후 등장하는 소원한 감정일 것일 텐데, 저는 이것을 원(原)경험이라고 부릅니다.
원경험에서 발원하는 이 심상 덕분에 일기에서 '나는' 감정을 통제하고자 하는 욕망의 주체가 됩니다. 감정은 그 자체로 복잡하고 다양하여 바라보는 일면마다 해석의 지평이 상이합니다. 천차만별인 그곳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렁이는 감정은 정서, 기분, 동요, 정동 등 다르게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그곳에 진입하는 강도 역시 천차만별이기에 감정은 정서, 기분, 동요, 정동 등 넓게 번역될 수 있다. 이러한 어려움은 단순히 이론적 구분에서 문제화되지 않고 오히려 하루를 견뎌내는 미숙함에서 나타난다. 그러니 이 난해함이란 이론과 인식의 문제라기보다 삶을 부서뜨리는 힘이 우리에게 강제하는 숙고, 태도의 어려움이 될 것입니다. 하루를 견뎌내는 일은 생각보다 순탄치가 않아요. 하루가 내게 벅차고 난해한 '상황'이 될 때 비로소 "탈출에 관하여" 생각한다. 일기는 이러한 힘으로부터의 탈출, 잠시나마 운명을 통제하고 싶을 때 생각나곤 합니다.
프랑스 철학자 레비나스는 1935년에 짧은 에세이 하나를 출간한다. 이 에세이에는 인상적인 개념이 있는데 그것은 구역질, 즉 '구토'이다. 김동규 번역자는 사르트르의 <구토>와 구분하기 위해 '구역질'이라 번역했지만, 사실 레비나스의 개념이 먼저 발표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둘 다 현상학자이자 실존에 대한 고민이 짙었고 타자성에 대해서 사유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 철학자가 공유하는 '구토'는 그 바탕이 너무나 달랐는데, 잘 알고 있듯이 사르트르의 구토가 '뿌리 없음'에서 비롯된 현기증이라면 레비나스는 그 반대였습니다.
존재란 다른 어떤 것과도 관계하지 않으면서 확증되는 절대이다. 이것이 바로 동일성이다. (중략) 자아의 동일성 안에서, 존재의 동일성은 그 결박상태의 본성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그 동일성은 고통과 탈출로의 초대라는 형식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또한 탈출은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날 것을, 다시 말해 가장 근원적이면서 용서할 수 없는 결박상태, 자아가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의 결박상태를 깨트릴 것을 요구한다.(엠마누엘 레비나스, 김동규, 『탈출에 관하여』,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32쪽)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일탈과 탈출을 상상할까요? 단한순도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단단한 뿌리. 결코 저항할 수 없는 동일자의 회귀, 그것은 나라는 자아가 갇힌 존재의 동일성은 아닐까요? 가끔 하루를 한탄하고 지난 날을 후회하며 그 순간을 돌이켜 볼 때 느끼는 막막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다시금 반복하더라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라는 필연성에 대한 암담함과 깨달음을 안고 어쩌면 다른 결과를 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천진한 웃음을 짓습니다. 그럼에도 속일 수 없는 사실은 언제고 이 삶을 통제하는 것은 '저'라는 사실입니다.
글에 강박증이 있는 저는 '백지공포증'이라고 불릴 정도는 아닙니다만, 글쓰기에 큰 부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결코 제가 전개할 수 없었던 양식이 이 '일기'라는 에세이 형식입니다. 속일 수 없는 삶의 질긴 뿌리인 '자아'에서 한순간도 벗어난 적이 없는 저로선 일기가 제시하는 '솔직함'이란 제겐 기만과도 같았습니다. 어떤 글의 형식보다도 내밀하고 진실을 투영한다고 하지만, 저는 글 앞에서 한 번도 솔직한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언표 주체와 언표하는 주체라고 불리는 두 발화자가 있습니다. 글을 쓰는 나와 그렇게 일기에서 말하는 내가 있습니다. 이 둘 사이에 어떤 간격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저는 느껴보질 못했습니다. 삶에서도 짊어지지 못했던 말과 생각들을 어떻게 글 속의 '그'에게 넘길 수 있을까요? 검열과 방어기제(자아)가 작동하는 이곳에서 발하지 못했던 꽃을 어떻게 글 속에서 피운단 말입니까. 그렇게 일기를 쓰는 건 가면 쓴 삶에 한 번더 덧대어 가상을 꾸미는 일이라 여겨졌고, 그 순간 순간들이 힘겨운 나날이었습니다.
일기는 탈출을 꿈꾸되 한 발도 나갈 수 없는 뿌리 깊은 나무의 탄식이 되어 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