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7일 히스테리안 워킹클럽 <어떻게 읽을 것인가 시즌2>에서
시각예술 연구 단체이자 출판사인 '히스테리안'에서 조르주 바타유의 『라스코 혹은 예술의 탄생 / 마네』를 강의했습니다. 1시간30분 가량 강의 진행하였고, 이후 1시간은 공동 독해와 토론을 이어갔습니다. 아래의 내용은 해당 강의의 녹취를 정리했습니다. 관련해서 궁금하시거나 말씀하실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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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바타유의 「라스코 혹은 예술의 탄생」에서 후기 바타유 사유의 결정적 요소들이 더욱 선명히 드러난다. 그는 선사시대 동굴벽화를 단순한 예술적 대상이나 고고학적 유산이 아닌 인간이라는 존재의 탄생, 나아가 철학적 인간학의 전환점으로 간주한다. 이 강의에서 바타유는 예술의 기원을 철학적으로 탐구하는 동시에 인간이 ‘무엇으로부터 벗어났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인간의 본질을 새롭게 정의하려 한다. 역설적인 것은 인간은 인간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나야 지고성을 획득할 수 있다.
바타유에 따르면 라스코 동굴벽화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인간이 '동물'과 구분되는 첫 행위의 징표이다. 인간은 동물성과의 단절 속에서 예술을 생성하고, 이를 통해 자신이 동물의 세계와는 다른, ‘금지’와 ‘초월’을 수행하는 존재임을 증명한다. 라스코는 곧 인간이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을 극적으로 전환시킨 실천의 흔적이다. 따라서 이 벽화는 ‘선언’이다.
이 선언은 단순히 기술적 표현력의 발현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구조적 전환을 반영한다.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고 언어를 갖기 이전부터 이미 ‘금기’의 세계를 설정하고, 세계를 질서화하며, 그 세계에 ‘죽음’과 ‘노동’이라는 두 축을 도입한다. 바타유에게 있어 예술은 바로 이 질서화의 행위, 즉 인간이 세계를 ‘말할 수 없는 것’으로부터 횡단하고자 한 윤리적 실천이다.
이 강의에서는 바타유의 핵심 개념인 ‘금기(taboo)’와 ‘죽음’, ‘노동’이 인간 존재를 이루는 구조적 삼각형으로 제시된다.
금기는 동물과의 단절을 수행하는 첫 실천이며, 특히'죽음'에 대한 금기가 인간 공동체의 형성 원리가 된다.
노동은 공동체와의 관계를 전제로 한 생산의 영역이고, 금기를 바탕으로 작동하는 체계로서 예술과는 대립된다. 즉 노동은 금기 안에서 질서를 유지하려는 실천인 반면, 예술은 그 금기를 넘어서려는 위반 충동이다.
이 구조는 바타유의 일반경제 이론으로 연결된다. 제한된 경제로서의 노동은 유용성과 생존의 질서를 따른다. 반면 예술은 낭비, 사치, 과잉이라는 무용한 것의 구조를 따른다. 이는 곧 주권성(souveraineté)의 발현이며, 바타유는 예술에서 그러한 주권적 낭비의 윤리를 본다.
바타유의 일반경제 개념은 이 강의의 철학적 중추다. 그는 인간 사회가 생존과 재생산의 제한 경제에만 머물지 않고, 축적된 잉여를 낭비함으로써 '무용한 것'을 창조하는 존재임을 강조한다. 예술은 바로 이 ‘무용성의 정점’에 있는 활동이다.
라스코 동굴벽화는 아무런 실용성을 지니지 않으며, 누구에게도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최초로 표상하고, 죽음과 유한성을 직면한 결과물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심연에서 비롯된 무용한 낭비이며, 바로 그 무용성에 예술의 근원적 위상이 있다.
바타유는 이러한 무용한 행위야말로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게 하는 본질이라 주장한다. 따라서 예술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세계로부터 분리시키고, 동시에 그 분리를 다시 넘어서려는 반복된 시도이다. 금기의 완성은 위반이다.
바타유에게 문명 이전의 동물성은 극복하거나 배제의 대상이 아니다. 그에게 있어 라스코의 예술은 문명을 낳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명(금기의 세계) 이래 달아난 ‘절대성’ 혹은 ‘주권성’을 회복하기 위한 실천이다. 그렇기에 예술은 단지 고도로 정교한 기술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열광, 충동, 공포, 희생과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주권적 예술은 노동과 지식의 맥락과 다른 소진의 성격을 지닌다. 그에 따르면, 예술은 본질적으로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는 기능이 아니라, 그 질서를 잠정적으로 파열시키는 축제적 실천이다. 그렇지만 공동체의 단순한 파괴는 아니다. 그에게 있어 주권(지고성)은 곧 소통 가능성이고, 오늘날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공동체와 다른 형태의 공동체성을 탐구하게 한다.
바타유의 관점에서 예술은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초과의 징표이며, 그것은 결코 기능적이거나 도구적일 수 없다. 예술은 인간이 자신의 죽음을 의식하게 되었을 때 발생한 최초의 증언이며, 그것은 인간의 취약성과 고통, 열망을 드러내는 장이다.
이 강의는 예술을 단순한 형식의 기원으로 보지 않고, 윤리적이고 존재론적인 '탄생'으로 사유하려는 시도이다. 바타유는 예술을 통해 인간이 동물성과 더불어 그 분리의 고통을 감내하는 존재임을 증명하고자 한다. 그렇기에 예술은 인간 존재의 한계 경험, 즉 유용하지 않기에 더욱 인간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