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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강의] 조르주 바타유 「마네」

4월 3일 히스테리안 워킹클럽 <어떻게 읽을 것인가 시즌2>에서

by ComplexArea

시각예술 연구 단체이자 출판사인 '히스테리안'에서 조르주 바타유의 『라스코 혹은 예술의 탄생 / 마네』를 강의했습니다. 이번 내용은 지난 「라스코 혹은 예술의 탄생」에 이어서 바타유의 「마네」에 대한 강의입니다. 본 강의는 1시간30분 가량 강의 진행하였고, 이후 1시간은 공동 독해와 토론을 이어갔습니다. 아래의 내용은 해당 강의의 녹취를 정리했습니다. 관련해서 궁금하시거나 말씀하실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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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 침묵, 정물성, 그리고 비개성의 미학

「라스코 혹은 예술의 탄생」은 선사시대 동굴벽화에서 시작해 예술과 인간의 기원을 질문하는 바타유의 작업이다. 바타유는 라스코 벽화를 논의한 후에 곧바로 마네에 대한 글로 넘어간다. 마네는 19세기 인상주의 화가, 보들레르의 친구, 근대 회화의 선구자로 불린다. 그러나 바타유는 미술사의 한 갈래로서의 마네가 아니라 예술의 절대성, 침묵, 정물성, 비개성의 극단으로서의 마네를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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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네는 누구인가: 보들레르의 개성과 바타유의 비개성

보들레르는 ‘현대성’을 “일시적이고 우발적인 것, 사라지기 쉬운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런 보들레르에게 예술가란 덴디이며, 시대와 불화하는 존재이다. 그는 도시의 몰개성화에 저항하고, 자기 삶을 미적으로 구성하며, 자기 표현의 의지를 지닌 자였다. 하지만 바타유는 마네에게서 그런 의지조차 찾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우유부단하고 불안해서 자신이 무언가 위대한 작업을 하는지도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는 “울부짖지도 않고, 자아를 부풀리고 싶지도 않았던” 자였다.

이것이 바타유가 강조하는 비개성이다. 마네의 작업은 자아를 드러내는 형식이 아니라 자아를 지우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 흔들림, 불안, 일관성 없는 선택들이 바로 마네 회화의 일관성이 현대성의 징후다. 바타유는 이것이 ‘표현’이 아니라 ‘소진’이며, ‘의지’가 아니라 ‘능동적 무심함’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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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금기와 위반: 마네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바타유 철학의 핵심은 금기와 위반이다. 금기를 아는 자만이 위반할 수 있다. 마네는 기존 회화 전통—아카데미의 규범, 고전적 구도, 영웅적 서사—를 완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인 뒤에 그것을 해체(탈구축)한다. 그는 서사를 지우고, 포즈의 규범을 파괴하고, 화면의 입체감을 제거한다. 콘트라포스토는 무너지고, 인물은 평면 위에 병렬로 배열된다.

병렬성은 단지 회화적 구성 방식이 아니라 철학적 태도다. 모든 것이 동일한 무게로 존재한다. 인물과 사물, 주체와 객체, 중심과 주변의 위계가 사라진다. 바타유는 이것을 ‘정물성’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 정물성은 단순한 무심함이 아니라, 언어가 강제하는 의미를 초월한 지고한 힘, 즉 주권의 징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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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침묵의 회화: 마네와 고야의 차이

바타유는 마네를 고야와 비교하며 두 가지 침묵을 구분한다. 고야는 울부짖으며 침묵했다. <5월 3일>(1808)은 죽음과 공포를 드러내는 웅변적 회화지만, 그 외침은 결국 침묵처럼 우리에게 도달한다. 반면 마네의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1867)은 사형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침묵 그 자체다. 감정의 과잉은 제거되고, 장면은 정물화처럼 무심하게 평면 위에 놓인다. “꽃 한 송이, 물고기 한 마리처럼.”

그런데 이 침묵은 단지 무(無)가 아니다. 오히려 작용한다. 감정을 억누르고, 의미화를 거부하며, 주제의 위엄을 무화한다. 바타유는 이것을 “웅변의 목을 죄는 행위”, “총체적 언어로부터의 해방”이라 부른다. 회화는 더 이상 기념비가 아니며, 더 이상 무엇도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침묵할 뿐이다. 그러나 바로 그 침묵이야말로, 가장 멀리 나아간 예술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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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올랭피아, 그리고 폭로되지 않는 신성

바타유는 <올랭피아>를 “폭로될 수 없는 신성”의 형상이라 부른다. 그녀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으며, 그저 거기에 있다. 그녀는 “아무것도 아니기에 존재한다.” 바타유는 말한다. “이 그림이 의미하는 것은 텍스트가 아니라, 그 텍스트의 지워짐이다.”

<올랭피아>는 사회적 계급, 매춘, 풍속, 성정치 등 수많은 해석을 불러오지만, 바타유에게 그것은 모두 무의미하다. 진짜 의미는, 해석의 실패에 있다. 바타유는 이 회화를 하나의 제의로 읽는다. 제의는 희생물을 파괴하지만 무시하지는 않는다. 마네의 회화 역시 주제를 그 자체로 부정하지 않는다. 바타유는 주제를 내파한다. 그것을 제거하거나 배타적 태도를 취하는 대신 의미가 정박할 수 없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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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주체의 해체: 병렬과 미끄러짐, 그리고 소통의 가능성

바타유에게 예술은 주체가 자기 표현을 통해 내면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무너지는 ‘내적 체험’의 순간이다. 마네는 바로 그 체험을 회화로 끌어온다. <밀짚모자를 쓴 청년> 속 인물은 하녀, 굴, 레몬과 동일한 무게로 배치된다. 그 어떤 것도 중심이 아니며, 어떤 것도 완전히 지시되지 않는다.

의미는 미끄러진다. 고정되지 않고 지연되며, 침묵 속에 머무른다. 이것이 바타유가 말하는 ‘비정형’이며, 소통의 조건이다. 「라스코 혹은 예술의 탄생」부터 이어지는 모든 외재적 목적—노동, 지식, 언어—에서 벗어난 그 자리에, 단 하나의 내재적 존재로서 인간이 놓이게 된다. 그때 예술은 지고의 순간에 도달한다. 주권은 그런 것이다. 지시 없는 존재, 의미 없는 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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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않음의 윤리, 비개성의 위엄

바타유에게 마네는 단지 인상주의의 문을 연 인물도 아니다. 그는 그저 회화에서 말과 의미, 주체와 객체, 중심과 외부, 개성과 표현을 하나하나 지워나간 자다. 그는 강한 자아로 세계를 뒤흔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유한성, 침묵, 무심함, 소진을 끝까지 끌고 나간 자였다.

이러한 마네는, 라스코 동굴벽화에서 최초로 나타났던 인간과 비슷하다. 위대함과 동시에 우스꽝스럽고 불완전한 존재. 그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로서 웃고 비틀거리며 침묵한다. 그리고 위반하고 죄의식을 느끼지만, 어느 순간 자신의 지고성을 획득한다. 마네는 회화는 인간의 사라진 지고성을 되찾으려는 시도다. 마네가 위대한 정물화가라면, 그 이유는 바타유가 주목하고자 하는 내재성(주체가 객체에 대해 우월하거나 초월적이지 않다)일 것이다. 그가 되찾은 것은 회화의 위엄이 아닌 폭로될 수 없는 신성, 침묵 그 자체였다. 그 침묵의 윤리야말로 바타유가 우리에게 ‘예술의 절대적 선물’로 남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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