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0일 히스테리안 워킹클럽 <어떻게 읽을 것인가 시즌2> 마지막
「제한경제학에서 일반경제학으로」
시각예술 연구 단체이자 출판사인 '히스테리안'에서 진행한 <어떻게 읽을 것인가: 시즌2>의 마지막 강의입니다. 본 강의는 데리다의 『글쓰기와 차이』에 수록된 「제한경제학에서 일반경제학으로」를 2시간 강의 진행하였습니다. 아래의 내용은 해당 강의의 녹취를 정리했습니다. 관련해서 궁금하시거나 말씀하실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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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주 동안 바타유를 가까우 두고서 그의 예술철학을 읽었다. 오늘 마지막 강의는 바타유에서 조금 떨어져 그를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하고자 한다. 시리즈는 4강으로 구성되어 있고, 가장 마지막 강의는 '적과 함께 사유'라는 코너의 이름으로 시작한다. 이 코너의 의도는 시즌 동안 가까이 했던 사상가를 비판하는 작업이다. 그렇게 선정된 바타유의 '적'은 데리다이다.
오늘 살펴볼 자크 데리다의 「제한경제학에서 일반경제학로」의 부제는 '무조건적 헤겔 철학'이다. 제목만 보면 데리다와 바타유가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누는 듯하지만, 사실 이 둘은 서로 적이라고 부르기엔 다소 애매하다. 왜냐하면 데리다는 바타유를 꽤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고, 특히나 20세기 후반 혹은 68혁명 이후 프랑스 사상가들 사이에서 바타유는 하나의 공통분모와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엄밀히 말해 '적'은 아닌 셈이다. 오히려 바타유와 데리다의 공통된 적은 헤겔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데리다는 「제한경제학에서 일반경제학로」에서 바타유가 전개하는 사상 속 헤겔의 영향력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바타유를 하나의 헤겔주의자로 읽는 독해를 시도한다. 마치 바타유(또는 바타유의 독자)에게 "당신은 헤겔의 그 무거운 짐에서 그렇게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라고 약간의 도발을 던지고 있다. 헤겔이란 거대한 철학적 산맥이 '적'으로 소환되고, 데리다는 바타유 글 속에 새겨진 헤겔의 흔적을 좇는다. 그렇게 헤겔이란 적을 뛰어 넘고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한계 내에서 그와 더불어 전개한다.
사실 바타유를 이야기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적이고 그로테스크한 문학적 이미지를 먼저 떠올린다. 바타유의 작품은 종종 도착적이고 변태적인 욕망을 드러낸다고 해서 롤랑 바르트가 "변태적 문학"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가 진짜 주목할 부분은 단순한 섹스나 성적 일탈이 아니라 성(聖)과 성스러움 사이의 깊은 관계다. 바타유는 노동과 언어, 지성 같은 세속적 영역(제한경제)에서 벗어난, 에로티즘이나 예술, 희생제 같은 '성스러움'의 범주를 깊이 연구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금지된 영역을 넘어서는 경험'이며, 그것은 제한경제학이라는 안전하고 의미 중심적인 영역을 넘어서는 '일반경제학'으로 나아가는 모험이다.
여기서 제한경제학이 노동과 생산, 닫힌 체계와 의미라고 한다면, 일반경제학은 반대로 파괴와 소진, 그리고 어떤 의미의 초과와 위반을 끌어안는 영역이다. 바타유에게 세계는 그 자체로 부족(결여, 결핍)하지 않고 오히려 에너지가 넘쳐(과잉, 잉여)난다고 보았다. 태양으로부터 끊임없이 유입되는 과다한 에너지를 소비하고 소진시키는 것이 오히려 일반적인 경제적 원리이다. 이 때문에 바타유는 금기와 위반, 제한과 일반이라는 대립 속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폭을 넓히려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바타유는 근대성의 한 극단이자 문턱일 것이다.
데리다는 이러한 바타유의 시도를 긍정하면서도, 동시에 날카롭게 문제를 제기한다. 데리다가 보았을 때 바타유는 헤겔의 체계와 언어 속에서 그를 초과하려고 한다. 바타유는 끊임없이 헤겔을 비판하며 헤겔
적 이성과 의미의 틀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는 헤겔의 언어(특히 지양과 관련해서) 안에서만 위반과 초과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데리다의 지적이다.
바타유가 헤겔과 대결하면서 가장 주목하는 것은 그의 죽음 개념, 즉 부정성이다. 헤겔의 순수 존재에 대한 물음은 무(無)와 맞닿아 있다. 존재는 처음부터 뚜렷한 정의를 가지지 못한 채 추상적으로 남있고, 오히려 그 자체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자기)부정을 통해 구체성을 전개한다. 예컨대 우리의 자아가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또 부정하면서 진정한 자신을 찾아가는 것과 같다. 하지만 헤겔은 이런 부정성과 죽음이라는 강력한 개념을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죽음(부정성) 앞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선다는 비판받는다. 데리다는 이것을 우스운 것(코메디)이라 말하며 바타유와 니체가 대변하는 '웃음'과 구분한다.
바타유는 「라스코 혹은 예술의 탄생」에서 호모 사피엔스의 출현을 최초의 웃는 존재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이전에 진행했던 「라스코 혹은 예술의 탄생」강의를 참고해본다면, 여기서 웃음이란 의미, 효능, 지식의 소진과 같다. 절대적 소진이란 의미의 무화 속에서 웃을 수 있는 역설적 존재가 인간이라 한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헤겔은 죽음(부정성)과 대면하지만, 오직 투자(도박 또는 운이 아니다)와 삶의 경계로서 죽음을 바라볼 뿐이다. 그러므로 죽음을 사유한다고 하지만 죽음의 절대성은 부분적으로만 수용하고 결국 삶으로 뒷걸음질 치는 코메디 같은 상황이 연출되고 만다.
죽음을 마주하고 벌이는 이 목숨을 건 도박에서 바타유의 '지고(주권)'와 헤겔의 '지배'를 구분할 수 있다. 헤겔의 지배 개념은 철저히 제한경제적이어서, 항상 목적을 가지고 안전과 생산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렇기에 데리다의 시선에서 헤겔의 '목숨을 건 투쟁'은 여전히 제한 경제의 효율과 계산의 영역 안(이 역설이 데리다는 코메디로 본다)에 있는 셈이다. 그렇기에 이것은 도박보다 투자에 가깝다. 반면 바타유가 말하는 '지고'는 철저히 목적 없이, 계산되지 않으며 실패를 각오하는 개념입니다. 이 지고성은 사실상 불가능성의 영역을 계속 맴도는 모험이며, 완벽히 성취될 수 없기에 데리다는 이를 '운'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데리다는 지양을 둘러싼 담론 속에서 헤겔과 바타유를 교차시킨다. 바타유는 헤겔 식의 담론으로부터 탈주를 시도하지만, 여전히 의미의 영역으로 다시 떨어지고 만다. 헤겔의 지배 개념이 아닌 지고성은 비-예속성일 터인데 어떻게 속박되지 않은 채 말해질 수 있을까. 데리다는 바타유의 철학으로부터 그의 글쓰기론을 추출하고자 한다. 이때 데리다는 '일반 글쓰기'라는 독특한 개념을 도입한다. 우리가 텍스트를 읽을 때 어떤 하나의 확정된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라, 읽을 때마다 다른 의미로 미끄러지는 과정 속에서 의미 자체의 불가능성을 체험하게 된다. 이때 데리다는 이해와 읽기를 구분하는데, 이해는 쓰여진 것의 의미가 미끄러지지 않게 고정시켜 소유하는 일이다. 반대로 읽기는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언어 효과 속에서 유영하는 것과 같다. 바타유의 글쓰기가 결국 의미의 체계로 다시 돌아가는 위험을 항상 안고 있듯이, 데리다의 글쓰기는 텍스트의 끝없는 모험과 실패의 반복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는 독서를 '불가능한 것'이라고 선언하고, 완벽한 이해가 아니라 계속해서 오독과 재해석을 유발하는 과정이라고 강조한다.
이러한 데리다의 '읽기'는 결국 바타유가 말한 초과와 위반의 철학을 더 확장시키는 역할을 한다. 담론의 파괴는 단순히 말을 없애고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말과 논쟁을 유발하며 기존 담론의 경계를 흔드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불가능성을 향한 모험을 떠날 수밖에 없으며, 바로 그것이 데리다가 말한 글쓰기와 사유의 진정한 운(명)이다.
결국, 데리다와 바타유의 논의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진정한 의미의 바깥, 완전한 초과로 나아갈 수는 없다고 해도, 담론의 한계를 끝없이 시험하고 흔드는 것이야말로 사유의 본령이 아닐까? 우리의 삶과 글쓰기가 이 불가능한 도전을 계속하는 한 그것은 어떤 기술이나 체계가 아니라, 매 순간이 불확실한 모험이자 운과도 같은 사건이다.
헤겔-바타유-데리다의 철학적 대화 사이에서 어떤 새로운 읽기를 시작할 수 있을지 자문할 수 있겠다. 이것이야말로 '적과 함께 사유'한다는 제목이 던져주는, 가장 의미심장한 철학적 모험일 것입니다. 데리다의 한 문장은 대단히 인상적이다. 그에 따르면 글쓰기는 기술이 아닌 운이다. 그렇기에 한계를 시험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