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9일 무아레 서점 [두더지북클럽] 미셸 푸코 강의 중에서
서울 동대문구 장한평에 있는 '무아레 서점'에서 [두더지북클럽] 첫 번째 주제로 '헤테로토피아' 강의를 진행했습니다. 첫 번째 시간은 <푸코의 회화론과 헤테로토피아>라는 주제로 시작했습니다. 2시간 정도 강의를 진행했고 이후에 질의와 대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래의 내용은 해당 강의의 녹취를 요약했습니다. 관련해서 궁금하시거나 말씀하실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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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오늘 이야기하게 될 것은 푸코의 공간 개념, 그중에서도 ‘헤테로토피아’라는 개념인데요. 본격적으로 헤테로토피아를 이야기 하기에 앞서 푸코의 회화론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왜 우리는 회화론, 다시 말해 푸코가 회화를 어떻게 사유했는지를 먼저 보아야 할까. 아마 그것은 단지 푸코 철학에서 ‘배경 지식’으로 필요한 게 아니라, 오히려 그의 철학과 더불어 헤테로토피아 개념을 이해하는 데 있어 회화론이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푸코는 그의 많은 책들을 회화적인 이미지로 시작한다. 이건 단순히 ‘장식’이라기엔 이상할 정도로, 너무 의도적이다.『광기의 역사』의 첫 장의 제목은 보쉬에의 <바보들의 배>를 참고한 흔적이 역력하다. 광인들의 배, 미치광이들의 배, 바보들의 배… 번역도 다양하지만, 어쨌든 그 이미지로 그의 철학은 시작한다.
또 푸코의 『말과 사물』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에 대한 유명한 비평으로 시작한다. 책의 원고 중 가장 마지막에 쓰여진 것으로 알려진 이 유명한 도입부는, 아주 유효했다. 푸코는 이 그림을 통해 ‘재현(고전주의 시시대의 에피스테메)’이 어떤 질서를 가능하게 했는지 묻는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은 고전주의의 에피스테메를 잘 보여주는 회화 작품인 것과 동시에 그 에피스테메의 질서가 무너지는 어떤 순간을 감지하고 있다. 그렇기에 <시녀들>은 『말과 사물』이 주장하고 있는 에피스테메의 불연속을 미학적으로 보여주는 데에 있어 아주 탁월한 작품인 것이다.
그리고 『감시와 처벌』에서는 직접 회화를 인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이미지가 중요하다. 다미앵(국왕 암살 미수범)에 대한 고문과 공개 처형 장면을 아주 길게 묘사한다. 그건 거의 연극적, 아니 영화적인 이미지로 전개된다. 잔혹하고 비명과 절규가 얼룩진 스펙타클을 푸코는 그려내고 있는데, 이것은 신체형으로 대표되는 권력 이미지를 극대화하고 있다.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푸코가 이해하는 (근대)권력은 '생사여탈권'으로 이해되거나, 인간 또는 주체를 억압하고 부정적 능력이 아니다. 그는 권력 담론의 전환기(어쩌면 에피스테메의 단절)를 '다미앵'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재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푸코는 언제나 이미지를 통해 철학을 연다는 걸 알 수 있다. 세르토 같은 사람은 그래서 푸코를 “회화적 글쓰기의 철학자”라고 불렀다. 이건 단지 미학적인 문체를 염두하진 않았을 것이다. 푸코에게 회화(이미지)는 그의 철학적 전략(고고학과 계보학)을 보다 잘 드러내는 하나의 전술일 것이다.
처음에 푸코는 『말과 사물의』은 '세계의 산문' 또는 '사물의 질서'란 제목으로 출판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첫 번째 제목은 다른 철학자(메를로-퐁티)의 원고와 제목이 같아 포기했고, 두 번째 제목는 편집자와 상의 끝에 포기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말과 사물』은 푸코가 가장 바랐던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특히 푸코는 '사물의 질서'라는 제목을 아꼈는데, 아마 이 표현이 『말과 사물의』의 주제를 가장 간명하게 표현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말(언어)이 행사하는 권력 효과는 사물(자연뿐만 아니라 인간의 품행까지 포함된 모든 존재자들)의 배치를 통해서 나타나고, 푸코에 따르면 이러한 배치의 질서는 시대(에피스테메)마다 다르다. 푸코가 언급하는 네 개의 에피스테메(20세기의 에피스테메는 잠정적이지만) 중 가장 주요한 에피스테메는 바로 '고전주의' 시대다. 이 시기의 에피스테메는 '재현'인데 사실상 이번 푸코의 회화론을 다루는 데 가장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이다. 푸코의 회화론을 이야기 하기 위해 『말과 사물』을 우회하는 것도 이 '재현'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이 책의 서문에는 그 유명한 보르헤스의 '중국 동물백과사전'에 대한 푸코의 논평이 있다. 말도 안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백과사전의 분류는 '사물의 질서' 또는 '말과 사물'이 내포하고 있는 푸코의 문제의식을 간단하게 보여준다. 우리가 무언가를 설명하거나 인식할 때 항상 어떤 표, 어떤 틀, 어떤 분류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이러한 분류 안에 포함되는 것을 정상, 상식 또는 지식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지식이라고 구분하는 이러한 구조와 분류는 나름의 질서를 갖고 있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예를 들어 “이건 포유류”, “이건 조류”라고 말하는 표, 체계화된 분류. 그런데 동물을 분류하고 배치(포유류, 조류, 양서류 등 각각의 자리와 경계가 명확한 질서)가 만약 우리가 사용하는 질서와 완전히 다르다면 어떨까. 보르헤스의 예처럼 ‘방금 물을 마신 것처럼 보이는 동물’이라는 항목이 있다면? 현재 서구의 학문 체계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그 사물의 질서가 당혹스러울 것이다. 그리고 비과학적이고 신비주의라고 생각하며 '지식'으로 승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말과 사물이 '동일한 자리'에 놓일 수 있다는 전제, 이게 바로 푸코가 『말과 사물』에서 에피스테메를 말하면서 해체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 배치의 예시는 우리의 규범을 통해서도 이해할 수 있다. 예컨대 처음 보는 다섯 명의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는 상항을 떠올려보자. 그들은 처음 만났으므로, 서로 가지고 있는 전제들을 일일이 하나씩 검토해가며 대화하지 않을 것이다. 많은 경우 '상식'과 '규범'이라는 코드의 암묵적 전제로 대화를 나아갈 텐데 이것이 바로 '말과 사물'의 효과 중 하나이다. 그러니까 푸코가 문제화 하고 있는 말의 배치 효과(권력 효과)는 부정과 타파의 목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식과 행위와 소통의 조건으로서 작동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물론 푸코는 이러한 구조의 불연속성을 강조하고, 이후 70년대 저작들에서는 권력의 문제를 탐구하며 배치의 변형 가능성과 '전략'이란 관점에서 자신의 철학을 급진화 시킨다.
이러한 의미에서 '말과 사물'의 공통된 질서로서 고전주의의 에피스테메인 '재현'을 주목하면서,『말과 사물』의 1장이 벨라스케스의 회화로 시작한단 사실을 살펴봐야 한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은 얼핏보면 궁정 생활을 잘 재현한 회화처럼 보인다. 공주가 있고, 그 옆에는 시녀와 화가가 있다. 복슬한 털을 지닌 강아지와 난장이 등 동시대에 궁정 생활에서 익히 볼 수 있는 인물뿐만 아니라 다양한 '오브제'가 배치되어 있다. 그런데 벨라스케스의 이 작품을 바라보고 있으면, 무언가 불편한 구석이 있다. 이 기묘한 이질감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시선(응시)이다.
<시녀들>은 전통적인 르네상스의 원근법 구조를 지니고 있다. 회화의 중심에는 공주와 거울이 있다. 이 배치로 인해 우리는 이 작품의 주제가 마르가리타(공주) 혹은 국왕 내외(거울에 반영된 인물)에 대한 재현으로 생각하게 된다. 명백히 원근법으로 짜여진 공간인 듯하지만, 푸코는 이 견고한 구조 안에서 오히려 재현의 불가능성을 지적한다. 일반적으로 르네상스 회화에서 관람자 —즉 보는 자, 단순히 보는 자가 아니라 몸이 없는 정신적인 눈으로 보는 관조자—의 위치는 고정되어 있고, 회화의 모든 요소는 그 관점을 기준으로 배열된다. 중심 시점, 소실점, 원근의 깊이,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이상적 시점 아래 수렴한다. 그리고 그 시점은 대체로 관람자의 눈높이, 다시 말해 세계와 인간이 일치하는 자리에서 작동한다. 그런데 <시녀들>은 그 구조를 따르는 것 같으면서도 아주 묘하게 비틀고 있다.
고전주의의 에피스테메가 흔들리는 불길한 징도는 벨라스케스의 <시녀들>과 유사한 소재와 구도를 보여주고 있는 쿠르베의 회화와 비교해보았을 때 더욱 드러난다. 쿠르베의 회화에서 관조자의 시선은 캔버스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조망할 수 있는 특권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 누구도(캔버스 안에 배치 오브제) 관람자 시선을 충돌 ─응시의 기본 성격은 주체가 보는 것이 아니라 오브제가 주체를 보는 것에서 발원한다─ 하지 않는다. 반면, 쿠르베의 회화 반대로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은 관람자의 위치가 응시를 통해서 노출되고 있지만, 관람자가 지니고 있는 특권을 누리지 못한다. 모든 장면을 속속들이 알아야 캔버스 '밖의' 관람자는 실제로 '캔버스'의 뒷면만 바라볼 뿐이어서, 무엇이 재현되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즉, 캔버스 '안에서' 배치된 오브제의 위치에서만이, 화가가 그리고 있는 '캔버스'의 재현을 확인할 수 있다. 회화의 구도를 결정하고 재현의 강력한 권위를 부여하는 관람자는 역설적으로 무엇이 재현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없다. 이 지점에서 그림 안의 거울이 의미심장하다. 그 거울은 왕과 왕비를 비추고 있는데, 그들은 우리가 서 있는 자리, 관람자의 자리, 그림 바깥의 자리, 재현 바깥의 자리에 있다. 이 그림의 구도는 전통적인 고전주의 양식에 따르고 있다. 재현의 바깥에서, 모든 재현을 구조짓는 특권적 자리를 전제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자리에서는 캔버스 위에 무엇이 재현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특권적 주체는 재현을 거울에 반영된 가상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회화 사건을 파악알 수 있다.
여기서 푸코가 말하고자 했던 건 바로 단단하게 묶여 있는 사물의 질서(배치)가 필연적이지 않다는 사실이다. 르네상스적 재현이 전제한 단일한 시점, 단일한 관찰자, 단일한 질서가 재현의 구조 안에서 흔들리고 있다. 푸코는 <시녀들> 안에서 말과 사물, 원본과 재현, 지시와 지시되는 것 사이의 질서가 붕괴되는 순간을 포착한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은 고전주의적 재현의 정점이자 붕괴의 전조이며 그 틈에서 푸코의 철학이 시작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말과 사물』의 내용은 이 <시녀들>에 대한 비평 속에서 그 함의가 가장 날카로우면서도 아름답게 제시되고 있다.
이제 푸코의 회화론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 중 하나인 마네로 보고자 한다. 『말과 사물』 1장에서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은 고전주의적 재현의 구조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것의 붕괴를 예고한 회화였다면, 마네는 이제 그 붕괴가 실제로 도래한 회화라고 볼 수 있다. 조르주 바타유뿐만 아니라 푸코도 마네를 단지 인상주의 회화의 선구자로 보는 것에 불만을 표한다. 미술사에서 하나의 단절로 보는 것보다 보다 적극적인 위상(현대성의 문제)을 주고자 한다.
먼저 마네의 그림을 보면, 너무 답답한 느낌을 받는다. 회화의 배경이 꽉 막혀 있어 깊이가 표현되지 않는다. 여기서부터 우리가 익숙하게 봐왔던 르네상스적 원근법, 그 소실점 중심의 재현 구조가 작동하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서 원근법으로 대표되는 재현의 구조가 완전히 부정되거나 파기된 것은 아니다. 푸코와 바타유의 공통된 생각에서 마네는 전통을 단적으로 거부하거나 파괴하지 않고, 그것을 수용과 동시에 내파하는 전략을 선택한다. 원근법은 관람자의 고정된 시점으로 사물과 사건 그리고 행위를 배열한다. 미리 결정된 구도 안에서 가까운 건 크게, 먼 건 작게, 중요한 건 앞에, 덜 중요한 건 뒤에 놓는다. 이렇게 격자화된 공간 안에 사물을 배치한다. 그런데 마네는 이러한 구조를 망가뜨리는데, 수평과 수직선아 강력하게 드러내는 동시에 회화의 입체성(환영성)을 자아내는 깊이감을 오브제들로 틀어 막는다. 푸코가 주목하는 것은 전통적인 재현의 구조를 어긋나게 만들면서, 우리가 보고 있는 캔버스가 하나의 평면으로 구성된 '물질'임을 폭로하는 것이다.
캔버스는 천으로 만들어졌고, 두께를 가지며 거친 표면을 지니고 있다. 푸코는 회화의 가장 근본적인 조건으로 캔버스의 물질성 강조한다. 회화는 어떤 신화와 역사적인 것, 즉 영원한 사건을 재현하기에 앞서 하나의 '물질'이란 사실을 밝혀야 한다. 푸코는 이러한 관점에서 20세기 모더니즘 회화가 주목하고 있는 매체성에 관한 주목과 비슷한 문제 의식을 공유한다. 그러나 그린버그로 대표되는 매체성에 대한 강조와 푸코가 다른 점은 마네의 회화는 단지 평면성을 강조하는 것을 넘어 캔버스의 물리적 '조직', 캔버스 천 표면에서 드러나는 올까지도 회화 사건에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다음은 마네의 회화에서 조명(빛)의 문제로 이동하려고 한다. 마네는 조명을 두 가지로 나눠 보여주는데, 하나는 내부에서 오는 빛(영원한 빛과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이성으로서의 빛)과 캔버스 바깥에서 관람자의 시선을 노출시키는 빛(관조적이지 않고 노골적이며 영원하지 않고 물질적 사실을 뜻하는 빛)을 구부한다. 전자의 빛은 <풀밭 위의 점심식사> 중심과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는 한 여인에게 입체감(몸의 부피를 드러내는 그림자를 생성하고, 주변의 오브제와 인물을 구분하고 부각시키는 빛)을 선사한다. 이것이 고전주의의 영워한 빛이다. 반대로 정면(관람자의 위치)에서 강력하게 발산하는 빛이 있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빛은 너무도 강력한 나머지 인물의 피부를 매끄럽게 말들고 그림자마저 사라지게 하여 회화의 평면성을 강조한다. 관람자의 위치에서 과도하게 드러는 빛은 회화 공간에서 은밀하게 관음하는 시선을 폭로한다. 관람자는 회화 바깥에 있어야 하고, 절대 드러나서는 안 된다. 관람자의 위치는 신, 이성의 위치이므로 ‘본다’는 사실 자체는 숨겨져 있어야 한다. 이러한 시선을 둘러싸고 가시성과 비가시성의 문제는 그 자체로 권력의 문제가 된다. 관람자(우리)의 위치에서 쏘고 있는 그 조명 때문에 발각되는 것이다. 마네는 관람자의 시선을 회화 안으로 노출시키면서, 우리가 더 이상 그림 바깥의 존재로 있을 수 없게 만든다.
마그리트가 푸코에게 보낸 편지에서 완두콩 얘기가 나온다. 나는 이 대목을 정말 좋아하는데, 마그리트가 편지에서 말하길 자연의 사물들 사이엔 '유사'가 아니라 '상사'가 있다고 한다. 유사는 중심(모델)이 있고, 원본이 있다. 어떤 재현물이 무엇을 닮았다고 말하려면 닮을 ‘무엇’이 먼저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상사는 그러한 중심과 원본이 없다. 그냥 닮았을 뿐이다. 곤충을 정의하는 사전에서 “곤충은 다리가 여섯 개다”라고 확언한다면, 다리 일곱 개가 있는 곤충은 곧바로 이상한 존재가 되어버린다. 그런데 그 곤충의 존재는 현실적으로 있다. 그러니까 기준에서 벗어난 존재에게 모순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이상하다. 마그리특다 말한 것처럼 완두콩 사이에는 유사가 아니라 상사만 있을 뿐이므로, 모순은 인간 만들어놓은 분류 체계에 있는 것이다.
푸코는 마그리트의 편지에 대한 화답을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의 원고에 싣는다. '말과 사물'이 정확히 일치한다고 믿는 서구의 오래된 욕망(칼리그람은 이러한 오래된 숙명에 대한 응답 중 하나다)을 해체한다. 그 욕망은 [그리기와 말하기], [보여주기와 이름붙이기], [모방하기와 의미화하기]를 하나로 묶으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공통 자리'의 문제이자, 이 글의 첫 시작부터 계속해서 주목했던 말과 사물의 공통 토대다. 이러한 공통 자리에 대한 이의제기를 마그리트의 회화 속에서 발견한다. 특히 마그리트가 푸코에게 붙인 편지에 동봉된 <이미지의 배반>이다. 누가 봐도 '파이프'를 재현한 것으로 보이는 회화 작품 속에 언어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반복한다. 두 가지 자명함 안에서 이 어긋나는 참조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푸코가 보기에 이 문제는 '참이냐 거짓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이 둘은 어떤 항이든 '확인'을 전제하므로, 말과 사물의 관계를 고정시킬 수 있는 공통의 토대를 전제로 해야만 한다. 도대체 '이것'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일까. 푸코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것도 확정할 수 없다."
푸코가 마그리트의 회화에서 주목하는 것은 바로 말(언표)과 사물(이미지)이 더 이상 ‘공통의 자리’에 놓일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푸코가 마그리트를 더욱 주목하는 이유는 '재현'을 비판하는 전략이 마네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마네가 재현을 내파한 것처럼 마그리트가 재현을 그냥 거부하거나 배제하지 않는다. 파울 클레나 칸딘스키의 작품이 제시하는 것처럼 재현을 거부하는 추상화로 가버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마그리트는 그 재현의 틀 안에 머무르면서 그걸 안에서부터 비틀고 있다. 마그리트는 재현의 '유사'를 수용하고 있지만, 그것을 배가시키고 중첩시키면서 어떤 것이 원본인지 알 수 없게 만든다. 이러한 태도는 푸코의 권력개념과 닿아 있다. 권력을 단순히 주체를 억압하거나 자유와 해방의 반대어로 보지 않는다. 그것은 충분하지 못한 권력에 대한 접근으로 권력은 오히려 주체를 생산하고 편재해 있으며, 독점할 수 없다. 그러므로 권력이 있는 곳은 반드시 저항 가능성이 내재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해는 헤테로토피아가 정상공간(또는 공통 자리)과 맺는 관계와 유사하다.
푸코의 관점에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언표로 읽을 수 있는 의미는 바로 지시관계의 '확언 불가능'이다. 어떤 형식으로 말과 사물의 자리를 단정할 수 없다. 우리는 어떤 재현을 보고 '닮았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이 무엇을 닮았는지 '확언'할 수 있는 필연성은 없다. 그러므로 사회 전반에서 걸쳐 암묵적으로 품행을 확언하는 정상성 ─사물에 대한 정의부터 품행의 올바름까지 담론과 연관된 모든 실존 형상에 기준을 제시하는 것─은 그 어디에도 없는 '공통 자리'에 의거한 불안한 구조물인 셈이다.
정치철학자 푸코의 회화 읽기는 이러한 '공통 자리'에 이의제기하는 헤테로토피아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 헤테로토피아는 푸코의 1960~80년 사이 잠깐 등장한 개념이지만, 그의 철학 전반에 걸겨 그림자를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 헤테로토피아는 정치철학보다 미술과 미학에서 보다 많이 활용되고 있지만, 그 의미는 푸코 철학 전반에 놓고 보았을 때 더욱 명확하게 보일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