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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진로문제로 도움이 필요합니다.’

부끄러운 고백 

바람이 분다. 

계절은 어김없이 제 때를 맞춰 우리를 찾아오는 듯하다. 


불과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열대야로 뒤척이며 잠들지 못했는데 오늘 밤은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분명히 이 바람 속에 가을이 있음을 그간의 경험으로 감지해본다. 


세월 탓인지 체력저하 탓인지 건강이 좋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지금도 좋지 못한 상태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았고 무엇인가에 골몰한다는 것도 힘들어 대부분의 것들을 내려놓았다. 

적은 일을 하면서도 주변이 매우 산만하고 추진력이 없었으며 우왕좌왕할 뿐 진척 없는 일들이 대부분이었다. 

지속되는 근육통과 아토피 피부염은 작년까지만 해도 내 인생에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는 질병이었다.(굉장히 힘든 질병이다.)  


갑자기 어느 날 내게 다가온 증상들은 마치 ‘이 때다’하며 적진을 초토화시키는 적군처럼 온몸을 두들켜 팼다. 

나는 아우성을 내며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이렇게라도 해서 몸주인의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할 요량일까?

두통부터 요통, 무릎통증, 팔 저림과 얼굴 신경의 불편까지 모든 것이 한꺼번에 쓰나미처럼 들이닥쳤다. 더욱이 괴로운 것은 수술이나 입원을 요하는 것들도 아니기에 일상의 불편과 심리적인 괴로움을 주변에 이해시키고 공감을 얻기가 무척 힘들었다. 

적진에서 혼자 외롭게 버티는 심정인데...     


일도 모든 것이 꼬이기만 했다. 

내 상황과 내 자신이 화해를 해 나가야 할 때라는 것인가?

사각 링 위에서 정신없이 두들겨 맞는 복싱선수가 된 것 같았다.     

 

몇 가지 중요한 원인제공의 일련의 일들이 있기도 하였지만 비단...한 두 가지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어찌되었든 증상은 분명했다. 

조바심, 무기력, 무동기, 우울, 분노, 짜증, 외로움, 고독, 허무함, 피로, 열정없음, 부질없음, 불안, 걱정, 의기소침, 건망증, 둔감, 소극적 태도.................     

온갖 것들이 되살아났다.      


한동안 잊고 살았던 녀석들이 내 앞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더 기세 등등하고 더 힘이 강해진 녀석들이 나를 압도했고 밀어붙였다.      

어떻게 해야 되나? 갈팡질팡하고 마음은 하루에도 스무번씩 롤러코스터를 탔다. 막막했다가 초조했다가 불안했다가 화가 났다. 이런 기분 언제였더라? 기억을 더듬어 보니 내가 완전히 길을 잃었을 때, 20대 중반 딱 그 즈음에...떠안고 있던 그 녀석들이었다. 사라진 줄 알고 있었던 녀석들이 어느 틈엔가 다시 되살아나다니...아주 놀라운 녀석들이다. 너희들....잘 지냈니? 나는 다시 길을 잃었고 어디로 가야할지 혼란스러운 상황에 빠져버린 것이다. 


우습게도

진로상담자인 내가 또 길을 잃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막막함을 다시 느꼈고 연이어 실패하는 좌절감을 고스란히 재경험했으며 내 일과 삶에 대한 무가치함에 시달렸다. 

괴롭다는 말로는 부족한 상태에 놓여버렸다.

      

그간 상담실에서 만났던 많은 내담자의 얼굴이 스쳐갔다. 나는 과연 그들을 얼마만큼 공감하고 얼마만큼 존중했던 것일까? 참담한 실패 앞에 마주 선 이들에게 어떤 상담자였을까? 모호한 미래 앞에 두려움과 긴장을 느끼던 이들에게 나는 무슨 이야기를 했었던가? 기회에 들떠 호기로운 전망을 펼치던 이들에게 나는 어떤 표정이었을까?

모든 것들이 영화처럼 지나갔다. 부끄럽지만 깊은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무살 중반의 나와 이제 곧 쉰을 앞에 둔 나는 

굉장히 달라졌다고 믿었었는데 

전혀 준비 없이 연타로 쳐맞고 있으니 

속수무책의 감정에 휩싸이니 머리로 이해한 모든 것들은 부질없었다.      


다만 과거의 내가 헤매다 헤매다 헤쳐나오는 과정에서 내게 도움이 되었던 것들이 있었을 것이다. 찾아야 한다. 그게 무엇이었는지 찾아보아야 한다. 

마치 오래된 서랍장을 뒤지는 심정으로 지금의 고통을 견디는 지혜를 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여러 시도와 실패, 그리고 목표와 현실의 괴리, 아무런 열망이 없는 그 자체, 현재의 난관을 탈출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제한된 전망 이 안겨주는 절망감을 나는 한동안 잊고 살았던 모양이다.      

상담자로써 또 내담자로써 

양 극단의 위치를 오가며 나는 내 자신과 싸워야 했다.      


어른이 되어도 어차피 인생은 고해야...라며 뜻 모를 소리를 지껄인 입망정 탓인가? 서른살이 되면, 마흔이 되면, 쉰살이 되면 괜찮아 질 꺼라 단순하게 생각을 했었던 순진성 때문인가? 삶은 회오리치며 내 마음과 정신을 강타하였다.      


그 토록 많은 공부를 하고 그토록 많은 책을 읽고 

그토록 많은 수련을 했는데 이게 뭐람................................................또 다시 진로가 고민이라니 울다가 웃다가 미칠 노릇이었다.       


내 삶은 때때로 전혀 괜찮지 않은 지점이 함정처럼 존재하고 

크게 부주의하거나 나태하지 않아도 그 함정에 깊이 빠질 수 있음을 온 몸으로 다시 경험해 보고 나서야 내 앞을 스쳐갔던 많은 이들의 이야기를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과거의 나는 어떻게 했던가? 하나의 질문만을 남기고 모든 것을 지웠다.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미숙했고 경험도 없었고 진로상담자도 아니었는데 

어떻게 그 수렁에서 빠져나왔던 것인가?

다시 생각하고 다시 생각하고 다시 생각하였다.      

이 작업은 진심으로 내가 박사학위 논문을 쓰면서 연구 참여자의 삶의 이야기를 다시 읽고 다시 읽고 다시 읽는 과정과 흡사하였다.      


내 삶이니까 내가 다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재 구성되고 재편되었다. 완전히 길을 잃었다고 느껴졌던 때에 내 안에서 분명히 길을 찾았던 , 그 순간에,  도움이 되었던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다. 믿고 싶었다. 나는 나에게 지속적으로 질문하였고 

탐구하였다. 


그리고 주변의 진로자원을 재정리하며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 부분이야말로 젊은 시절의 나와 달라진 부분이었다. 


나에게 지금 어려움이 있습니다. 

저를 좀 도와주세요. 


스무살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지금 나는 생각할 수 있고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은 다행이었다.      

이상하게 들리시겠지만 저는 진로상담자입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 진로문제로 도움이 필요합니다.’      

냉정히 생각하면 부끄러울 것도 없는 이야기었다. 

누구나 인생에서 진로가 난관에 봉착하고 우리는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가?

나라고 다를 것도 없는 일이었다. 

순수한 마음으로 나를 돌보고 싶다는 바람이면 충분한 결정이었다.      

그래서 

친구를 만나 위로를 받았고 

가족에게 지지를 부탁했고 

선배와 동료들에게는 정보를 물었으며 

스승에겐 괴로움을 털어놓았고 

지인들에겐 하소연도 하였다. 

상담자에겐 전문적인 상담도 요청하였고 당연히 돈을 내고 상담을 받았다. 

운동을 하고 

가급적 취미생활을 하며 정서적 환기를 하려고 노력했으며 

좋은 글을 읽고 쓰며 생각을 정리하였다. 

더불어 

부정적인 기운을 주는 이야기는 되도록 멀리하였고 

불특정 다수와 어울리는 것도 자제하였으며  

삶을 훨씬 간소하고 정갈하게 하고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자연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웃들과 만나 소소한 환담을 나누고 

글을 쓰는 시간이 꽤 큰 도움이 되었다. 역시 진로상담을 연구한 학자들의 이야기가 맞는 부분이 있구나 혼자 감탄을 하다가 (웃기도 하였다)     


그렇게 노력한지 100일 정도가 흐르고 나니 

나는 예전의 나로 돌아왔고 

마음은 단순하고 평화로워졌다. 


고민하던 문제가 해결되었는가? 라고 묻는다면 

다는 그저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다.      


문제는 거기 그대로 있다. 

하지만 조금 달라졌다. 


100일간의 사투를 통해 나는 또 하나의 벼랑을 건너는 나만의 방법 하나를 터득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가격을 매길수도 노하우를 전수할 수도 없는 나만의 방법일테지만 어찌되었든 하나의 감각이 내게 남게 되었다. 


이로써 어떤 하나의 경험을 통과하였다. 이 경험의 자원이 또 다른 징검다리가 되리라...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되돌아와 기쁘다.      


오늘은 제법 선선하여 책읽기에 좋은 날이었고 보려고 쌓아둔 먼지 묻은 연구자료를 

몇 줄 읽어 나갔다. 


꽤 좋은 재출발이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네 인생에서 언제 비포장도로가 나타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 

     

나는 그 길 어디쯤에서 당신이 쉬어 갈 의자를 들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진로상담자인 나는 길 위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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