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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샛별 May 26. 2024

아카시꽃은 피고

어느 젊은 날의 기억


비 오는 날 안개 자욱한 길을 달리는 버스 안, 집에서 내려 들고 온 따뜻한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이른 오월인데도 벌써 아카시꽃들이 지천입니다. 매년 기온이 상승한다더니 오월초인데도 꽃송이들이 주렁주렁 만개한 모습입니다. 거짓말처럼 밀폐된 창너머 아카시 꽃향기가 느껴집니다. 순간 금세 무디어지는 특성과는 달리  한번 맡은 냄새는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어서 과거의 기억과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후각이 오늘은 훌륭한 기억의 감별사가 되어 훌쩍 사십여 년의 시간을 넘어 저를 젊은 시간으로 데려다주었습니다. 그저 그런 날이었더라면 기억 속에서 희미해졌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하얀 아카시꽃이 만발했던 그날의 풍경과  꽃향기의 기억은 잊히지 않은 채 매년 꽃이 피는 날이 오면 그때의 시간으로 저를 데려갑니다.


일생에 한 번뿐인 그런 사랑을 하고 싶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여러 번의 사랑이 올 수도 있음을 그때는 몰랐습니다. 길게 만나는 오랜 사랑이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제게 짧지만 강렬할 수도 있는 사랑도 있음을 알 되었습니다.


어느 아주 가까이서  사랑이 순간에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서로를 아끼며 힘이 되어 주 가까운 친구와의 들불처럼 타오른 사랑은 거기까지. 제 탓이었지요. 더 이상은  하지 말자하고 결국 아끼던 친구를, 사랑까지 묶어서 모두 보내야만 했습니다.

함께 하기에는 앞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요. 익어서 떨어질 시기에 만났더라면, 아니 그를 넘어설 만큼은 아니었겠지요, 인연이 아니었더라고... 아니 그냥 친구로 아끼기만 할걸... 차라리  사랑을 표현하지 않았더라면...

헤어지던 순간에도 어려운 일이 생긴다면 가장 먼저 달려와 힘이 되어줄 거라던 그 사람은 지금은 어느 하늘 아래 살고 있을지. 그렇게 좋은 친구 하나를 잃고 말았습니다.


오월의 끝자락이었지요. 헤어지던 날 흐드러지게 피어있던 가로수길의 아카시 꽃이, 이젠 태워버리고 없는 그 풍경을 뒤돌아 보며 쓴 그의 편지의 한 구절이, 매년 철 따라 향기와 함께 돌아옵니다.

이제야 무엇, 젊은 날의 사랑의 강렬함은 잊고 말아서, 늙어가며 자잘한 일상의 순간에서 사랑임을 느끼고 표현하는 나이에 와서도 그 시절의 마음만은 기억납니다.


아카꽃이 피는 시간이 돌아오면 하던 후회.

긴 세월 하지 않았더라면 하고 후회했다면, 오늘은 아끼지 않고 사랑한 것이 다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합니다. 늙지 않고 늘 젊은 제얼굴을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으니까요,


많은 것들이 점차 그 색이 흐릿해지고 나날이 잊는 것들이 많아져가는 노년의 시간. 그 길목에 서서 어리석었던 날들에 대한 후회를 이제는 정말 홀가분하게 떠나보낼 수 있는 듯합니다.


오늘 아카시 향기가 불러온 기억이 눈물겹도록 슬픈 것은.

 그 사람이 그리워서가 아닙니다.

애틋한 연둣빛 봄이 지나가는 계절. 내 인생의 봄날 같던 그 시절의 내가 그리운 탓입니다.

얼굴조차 희미한 그 사람에게도 저 향기의 기억이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새삼 내가 준 아픔마저도 말입니다.




-아카시꽃은 피고


향기로 기억하고 있었지

어느 사랑 하나


오월 어느 날

다시 살아나는 날들

눈멀었던 마음은

미친 속도로

세월을 넘어 달리고


보이지 않아도

느껴지는

함께 잡았던 두 손

헤어지던 날의 짙은 꽃향기


잊히기보다는 

오랜 세월 익어 

더욱 진해지는 그리움

때가 되면 잊지 않고 돌아오는

내 젊은 슬픈 날


버스 차장 너머

바라보는 꽃송이들

살포시 눈 감으면

스미어드는 오랜 아픔의 향기


서글픈 시간들이었다 해도 

늙어가는 오늘

기억해 낼 사랑이 있음은

또한 얼마나 다행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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