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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어른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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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콩콩 Nov 03. 2019

어느 날 맥심이 사라졌다

정확히는 맥심 커피믹스가

그 자리를 메운 것은 카누였다. 총무팀이 직원들을 위해 각층 휴게 공간에 구비해 놓은 커피가 맥심 커피믹스에서 카누로 바뀐 것이다. 공지는 없었다. 처음엔 설마 맥심이 없어졌을 리 없다며 싱크대 이곳저곳을 열어 맥심을 찾았다. 한 발짝 떨어져서 원래 맥심이 놓였던 선반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카누가 놓인 옆으로 원두와 커피 그라인더와 드리퍼, 캡슐커피머신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없는 것은 오로지 맥심뿐이었다.

그제야 이 회사에서 맥심의 시대가 끝났음을 알았다. 엉겁결에 달큰쌉쌀한 나의 아침 루틴이 위협을 받았다. 나는 입맛을 다시며 자리로 돌아왔다.

"맥심이 없어졌어요."
"맥심? 그랬나?"

동료들의 대답은 심드렁했다. 마치 맥심이 있었는 줄도 몰랐단 듯이. 공지도 없이 맥심이 퇴장한 이유가 좀 더 명확해졌다. 나 같은 맥심파가 없었겠지.

출근 후 맥심 한 잔과 하루를 시작해왔다.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날도 카페라떼를 마시는 날도 흔했지만 아침 커피의 초기 설정값은 오랫동안 맥심이었다. 습관은 어학연수 때도 이어졌다. 한인마트에서 공수한 맥심을 매일 아침 마셨다. 교실에 퍼지는 맥심 향기에 무려 커피의 나라 콜롬비아와 브라질에서 온 친구들이 반하기도 했다. 나는 일부러 맥심을 2-3봉씩 들고 다니며 맥심을 궁금해하는 친구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게 한국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커피인데 어때? 맛있지?

이제 커피믹스 맥심을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커피'로 부를 수 있을까?

문득 카누의 광고 파트너로 오래 일했던 전 회사 상사의 말이 떠올랐다. 어느 세대부터는 (그러니까 아마 GenZ쯤 되려나) 커피의 기본값이 자판기 커피도 아니고, 캔커피도 아닌 원두커피라고. 그때는 '오오 그럴 수도 있겠네!' 하고 지나갔지만 이번엔 눈앞에 세대가 사람 모습을 하고 바통 터치하는 걸 목격한 듯 기분이 이상했다. 이러다 커피믹스도 요즘 아이들은 모르는 아득히 먼 문명의 도구가 되려나? 디스켓이나 수화기처럼? 버려진 싸이월드처럼?

내 몸의 반은 맥심 커피믹스로 이루어졌다고 말하던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회사 휴게실에 맥심이 없어지고 카누가 생겼어. 이제 나랑 너 말고 맥심 먹는 사람 없나 봐."
"섭섭하네. 커피에 카제인나트륨이 좀 들어가 줘야 되는데. 나한테 한 박스 있는데 보내줄게. 병원에서 당조절 하라고 해서 못 먹어."

아! 회사 휴게실엔 맥심이 없고, 맥심 팬에겐 당조절이 필요한 시절이 도래했구나!






매일 아침 휴게실에서 맥심 봉투를 스틱 삼아 커피를 휘휘 젓고 있으면 (환경호르몬이 좀 들어가야 맛이가 좋다) 가끔 지나던 동료들이 말을 걸곤 한다.

"어? 맥심 드시네요?"
"맥심 좋아하나 봐! 자주 먹네?"

이제 맥심을 마시면 조금 눈에 띄게 된 걸까 봐 조금 움찔했다. 스마트폰 시대에 아직 2G 폰을 쓰는 사람처럼 보이려나? 아니면 커피맛을 잘 모르는 사람처럼 보이려나?

아, 제가 커피라면 믹스부터 캡슐, 에스프레소 머신, 드립 커피까지 가리지 않고 좋아하는데요, 회사라는 데를 다니면서부터 출근하고 맥심을 한 잔 먹는 습관이 생겨서 이걸 먹어야 일이 시작되는 거 같달까요? 점심까지 든든한 느낌이기도 하고...


라고 설명하는 나를 상상했다.

설명할 필요 없는 취향은 얼마나 편한가. 나는 지나간 취향, 소수의 취향을 갖기 싫었다. 그래서 맥심이 좋은 게 아니라 커피가 좋은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지나간 것은 잘 보내고, 새로운 것은 먼저 받아들이는 요즘 사람이면서 동시에 경험이 쌓이고, 안목이 늘면서 더 고급진 취향을 갖게 된 어른이고 싶었다.

그런데 맥심을 마시는 데 이유가 어디 있나. 그냥 내 입에 맛있으면 장땡이지. 내가 맥심‘만’ 마시든, 맥심‘도’ 마시든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를 생각하는 건 너무 시시하다. 휴게실에서 맥심이 사라진 일은 나름 충격적이었지만 덕분에 커피 취향을 돌아보고, 맥심에 대한 애정을 깨달은 것은 좋다. ‘맥심=커피믹스’라는 공식이 더 이상 성립되지 않는 날이 생각보다 빨리 오겠지만 나는 내 속도로 내일 아침에도 맥심을 마실 것이다.

역시 취향의 시작은 ‘인정’에서부터.


#계간손혜진 #어른의일 #취향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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