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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유리 Jan 07. 2024

영포자, 박물관 발룬티어를 하다

모든 일의 시작은 이곳에서

장거리 연애를 이어오던 우리, 전부터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지만 해외에 거주하는 특수한 상황으로 결혼식은 예상치 못한 초 스피드 전개로 진행되었다. 그해 11월 상견례를 시작으로 혼담이 오고 갔고, 그다음 해 1월 우리는 식을 올렸다. 그리고 나는 결혼 준비에 온 정신을 쏟은 채, 유야무야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다행히 남편이 살고 있는 도시가 처음은 아니었기에 낯설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여행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감회가 남달랐다. 전에는 연인을 만나러, 여행으로 미국에 온 것이었다면 이제는 내가 이곳에 정착해서 살아야 한다.


그렇게 짐을 푼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남편이 명함을 하나 내밀었다.

"이게 뭐야?"

"친구 와이픈데 여기 뮤지엄 디렉터래. 네 얘기를 하니깐 이메일을 한번 보내보라고 하더라고."

"내가? 나 영어도 못하는데?"

"뭐 어때? 전부터 박물관 일 관심 있어했잖아. 영어 잘할 때까지 기다리면 아무것도 못해"


지금 생각하면 여행자에서 하루빨리 생활인, 이민자로 만들려는 남편의 큰 그림이지 않았나 싶다. 나는 그렇게 얼떨결에 레주메를 작성해 보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을 받았다.


"Hello Yuri,

I'd like to invite you to the museum(...) Thanks for your interest in volunteering. I look forward to meeting you."


그렇게 박물관에 첫 방문, 간단한 자기소개로 인터뷰를 대신하고 발룬티어로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 일이, 여기서 만난 인연이 이후 미국 생활어떤 영향을 줄지 알지 못했다.


박물관의 유물, 소장품은 아무리 차근히 둘러봐도 보는데 30분을 넘지 않을 만큼 크지 않았다. 여느 지역 박물관이 그렇듯이 전시가 주 인 공간이라기보다는 커뮤니티로서의 역할을 한다고 보는 것이 더 가까웠다. 지역 행사가 있을 때 주민들이 함께 모이고, 아프리칸 아메리칸의 기념일에 특별 이벤트를 열고 하는 식으로 말이다. 박물관에 상주하는 인원은 박물관 디렉터와 나이 지긋하신 큐레이터 한분이 다였고 이제 거기에 내가 합류하게 된 것이다.


내가 주로 한 일은 디렉터를 도와 박물관 홈페이지와 SNS에 박물관 소식, 아프리칸 아메리칸 커뮤니티 관련 지역 뉴스, 정보를 포스팅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오프라인 이벤트, 새로운 전시가 있을 때는 큐레이터를 도와 행사를 준비했고, 방문객 DB를 업데이트하고 그들에게 프로모션 이메일을 보내는 일도 했다. 새로운 일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말로만 듣던 스미소니언과의 연계 전시를 같이 준비할 기회도 있었고, 때때로 지역 방송사의 현장 취재를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등 생생한 지역 박물관의 업무를 경험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처음으로 정말 본받고 싶은 직장 상사를 만난 것이다.


한국에서 5년 넘게 일하면서 내게 직장 상사는 '실무보다는 정치를 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최악의 경우에는 실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전혀 알지 못해 업무지시조차 엉망으로 하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규모와 업종에 따른 차이도 있겠지만 내가 만난 뮤지엄 디렉터는 이전에 만난 직장 상사와는 여러 면에서 달랐다. 본인 업무에 대한 이해와 실행은 말할 것도 없이 완벽했고, 업무 지시, 피드백 또한 항상 명확했다. 또, 다른 사람 앞에서 나를 소개할 일이 있을 때에는 단순 자원봉사자 아무개가 아닌 한국에서의 마케팅 경력들을 살려 지역 사회에 공헌하고 있는 재원으로 소개해 주었다. 그녀와 함께 일하면서 미국에 와 처음으로 나란 존재가 어딘가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겠구나 하고 용기를 얻었다.


그렇게 점점 더 박물관, 커뮤니티 사람들과 가까워지고 있을 때쯤 그녀가 떠난다는 소식을 알렸다. 작은 지역 박물관에 있기에는 그녀의 능력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을 안 한 것도 아니었지만 좋은 기회가 그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 그녀가 떠난 박물관은 한층 더 한산해졌고 큐레이터도 더 이상 내게 줄 일이 많지 않아 나는 박물관 출근 횟수를 줄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거처를 옮긴 전 디렉터에게서 이메일 한 통이 도착했다.


"Hello Yuri,

I thought you might be interested in this opportunity (...)

Fw: After-School Teaching Positions: Korean Teachers and Teaching Assistants"


주립대학 내 다양성 센터로 자리를 옮긴 디렉터는 같은 대학 내 교육학 전공에서 한국어 프로그램 교사를 모집하고 있다는 공고를 보고 나를 생각해 추천해 준 것이다.


"공유해 줘서 고마워, 하지만 난 직 미국에서 합법적으로 일을 할 수도 없고 (...)"

"그런 문제라면 발룬티어를 하면 어때?"


실제로 당시엔 아직 워킹비자가 있는 게 아니라 공식적으로는 그 포지션에 지원할 수 없는 게 맞았다. 하지만 나는 그보단 아직까지도 용기가 나지 않아서 될 이유보단 안될 이유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미국 와서 이런저런 일들을 찾아다닌 걸 듣고 방법을 묻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하지만 열심히 시간 내어 설명을  주어도 실행을 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그럴 때면 허탈한 마음이 들 때도 있지만 그들도 어쩌면 나처럼 용기가 나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내 나라에서도 새로운 시도는 항상 어렵기 마련인데 하물며 외국에서는 더 그럴 것이다.


어쨌든 결론적으 나는 한국어 교사에 지원을 했고 인터뷰에서 워킹비자가 없기 때문에 발룬티어라도 기회가 있다면 해보고 싶다 말했다. 렇게 깍두기 교사로 일을 시작했고 다행히 학기 중에 워킹비자를 받게 되어 다음 학기에는 정식교사로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주립대학에서 운영한 이 초등학교 방과 후 한국어 프로그램 에피소드는 기회가 된다면 따로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그녀가 떠난 후로도 나는 한글학교 교사와 병행하며 박물관 자원봉사를 이어나갔고 약 2년을 거기서 일했다. 그리고 그 공을 인정받아 박물관 연례행사에서 공로상도 받게 되었다. 200여 명의 아프리칸 아메리칸 앞에서 내 이름이 호명되고, 기념패와 공로장을 수여받은 일은 지금 생각해도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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