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S는 'Trusting a Robot' Study의 약자로 '로봇 신뢰하기'에 대한 연구 혹은 '로봇 믿기'에 대한 연구라고 생각하며 소설을 썼다.
로봇을 믿을 수 있을지 없을지 사고실험하고 연구하는 입장에서 내가 초점을 잃지 않으려고 계속 노력했던 건 ‘간병로봇이 사람을 돌보는 고통을 겪고 어떻게 변화해 가는가’였다. 내 책상에 하나의 무대를 만들어놓고 전에는 없었던 간병로봇을 배치했을 때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관찰한다고 생각했다.
“간병로봇이 사람을 돌보는 고통을 겪고 사람처럼 되어간다.”
이야기에서 보통 인물은 힘든 일에 맞서 그것을 극복할 때 성장한다.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사람이 힘든 일에서 해방되고 로봇이 그 일을 대신한다면 사람과 로봇 중 누가 성장할까?’
‘간병로봇의 성장은 무엇일까?’
이런 질문들을 가지고 글을 썼다.
TRS는 분명 성장했다. 돌봄의 끝으로 가면 신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것이 간병로봇 TRS의 성장이다.
그렇다면 원작에서 성한은?
영화에서 정인은?
그들은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원작에서 최지석 토마스 신부는?
영화에서 사비나 수녀는?
이 사건을 목격한 성직자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
흔히들 인공지능에 대해 얘기하면서 인공지능이 우리의 손을 벗어나 어떤 일을 저지를지 두렵다고 하지 않나. 그건 사실 우리 자신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생각한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인공지능 로봇에 투사하는 것이다. 인공지능은 인간이 설계하는 거니까 당연하게도 인간의 특성을 닮을 수밖에 없다. 문제가 생기더라도 깨어있다면 대처할 수 있다. 다만 늘 깨어 무언가를 준비하고 대처해야 한다는 건 너무 힘들고 지치는 일이지 않을까. 게다가 로봇은 인간의 편리를 위해 만들어 쓸 텐데 말이다.
미래에 대비해야 한다는 걱정이나 강박 말고, 지금 바로 내 곁에 있는 구체적인 일상의 한순간 안에서 깨어있고 싶었다. 내게 닥친 일들을 회피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서투르더라도 있는 그대로 돌파한다고 생각하며 <TRS가 돌보고 있습니다>를 썼다. 한 개인의 경험과 관찰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모두가 언젠가는 겪고 고민하게 될 사회적 문제와 만나게 되었다.
또 나는 인공지능 TRS를 인간의 거울이라고 생각하고 소설을 썼다. 그래서 간병로봇의 얼굴과 보호자의 얼굴이 같다고 설정했다. 보호자는 자신을 닮은 로봇이 환자를 돌본다고 여기며 죄책감을 덜고, 환자는 가장 의지하는 가족의 얼굴을 한 로봇이 자신을 돌보니 더 편하게 받아들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결말에 이르러 간병인과 환자의 고통이 TRS를 통해 하나로 합쳐진다고 생각했다. 아픈 이와 돌보는 이의 고통이 TRS에 비치듯이 말이다. 이야기 속에서 TRS는 인간의 거울이자 변화한 인공지능의 실체이다.
“TRS는 어디에 있습니까?”
“모르죠. 제가 그 로봇 새끼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 <TRS가 돌보고 있습니다> 중에서
주님께서 카인에게 물으셨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그러자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느냐? 들어 보아라.
네 아우의 피가 땅바닥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 창세기 4장 9절~10절
2017년 초에 TRS 초고를 쓰고 일주일쯤 시간이 흐른 후에 다시 읽어보았다. 최 신부와 성한의 위 대사가 어딘가 낯이 익더라. 가만히 들여다보니 창세기의 카인과 아벨 구절에서 온 것이었다. 작가인 나도 쓰고 나서 알았다.
성한의 대사("모르죠. 제가 그 로봇 새끼를 지키는 사람입니까?")에는 자신이 겪었던 일을 로봇 탓으로 돌리는 성한의 일면이 드러나 있다. 인간이 자신을 위해 일한 로봇을 버리는 모습이기도 하다.
영화 전반으로 이 카인과 아벨 이야기가 확장돼 있더라. 영화 도입부에서 수녀 내레이션과 함께 환자의 오줌이 흐르자 마치 피가 흐르는 것처럼 보였다. 크레딧을 보니 종교 자문이 있었다. 종교 자문을 통해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도 궁금하다. 내 눈에는 영화에서 '아우의 피'가 환자의 아픔이자 간병로봇의 생명, 고통으로 보였다.
작품이 영상화되니까 다양한 반응이 들려온다. 원작자로서 반갑고 기쁘다. 작품이 내 손에서 떠나가면 많은 독자, 시청자들이 창작자보다 더 많은 것들을 발견해 주시는 것 같다. 그럴 때 비로소 자유로워진다고 느낀다. 내가 작품을 손안에 가둔 게 아니라 작품이 스스로 다른 곳으로 흘러갔다는 그런 감각 말이다. 중요한 발견인 것 같다.
책 《깃털》에 실린 세 편의 소설 모두 공교롭게도 죽음에 대해 말하고 있다. 각 작품의 분위기는 무척 다르지만 말이다.
<깃털>은 출판사에서 가장 좋아한 작품으로 표제작이 되었다. 경이로움이 담겨 있다고 좋아해 주셨다. <TRS가 돌보고 있습니다>와 완전히 다른 분위기가 담겨 있다고 한다. <TRS가 돌보고 있습니다>로 데뷔한 뒤, 첫 원고 청탁을 받고 쓴 소설이라 내게 각별하기도 하다.
후각을 잃은 철새들이 로봇 새와 함께 날아오르는 이야기이다.
코로나 이후의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강렬하게 느낀다. 세상이 바뀌었다고 말로 하긴 쉽지만 사실 사람이 죽고, 동물과 식물이 죽고, 그간의 세계관·가치관이 죽는 것이다. 죽음이 숫자로 기록되는 요즘, 소설로나마 죽은 이들에게 예의를 갖추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표제작 <깃털>에 우주 장의사가 등장하는 건 우연이 아닌 것 같다.
<백화>는 바다를 배경으로 하는 SF로 출판사에서 SF 퀴어 소설로 소개하고 있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산호초를 따라서 CHASING CORAL>(2017, 제프 올로프스키 Jeff Orlowski)에서 영감을 얻고 썼다. 다큐멘터리는 ‘죽어가는 산호초를 기록하는 사람들’(출처:넷플릭스의 '산호초를 따라서' 소개문)을 보여준다.
바다의 수온이 올라 산호에서 공생조류가 떠나면 산호의 색이 하얗게 변하는 백화현상이 생긴다. 조류(algae)가 광합성을 해 산호에게 에너지를 전해주는데 수온이 일정 구간을 벗어나면 조류가 살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