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탕에서 흉내내본 풍요의 감각
따뜻하고 노곤한 목욕탕에서, 문득 깨달았다. 엄마와 나는 여전히 결핍의 언어로 대화하고 있었다.
거의 이십 년 만에 엄마와 단둘이 목욕탕에 갔다. 아버지의 병간호로 지친 엄마에게 따뜻한 탕 속에서의 위로라도 건네고 싶었다. 깨끗한 신축 온천탕, 김이 서린 공기, 세신사의 파우더 향이 나는 타월이 피부를 부드럽게 스치는 촉감, 그리고 콸콸 쏟아지는 온천수 소리 속에서- 잠시나마 엄마가 고단한 삶을 벗어놓길 바랐다. 하지만 물이 뜨거워질수록, 우리 사이의 오래된 긴장도 조금씩 피어올랐다.
엄마의 세대는 살아남기 위해 절약해야 했고, 그래서 '걱정'이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하지만 내게 그 걱정은 불안의 유산이었다. 따뜻한 물속에서도 엄마는 여전히 잃을까 봐 긴장했고, 나는 그 긴장이 내 안으로 스며드는 게 두려웠다.'엄마 좀 그만해, 엄마의 불안을 나한테 제발 전가시키시지 좀 마.'하고 매몰차게 말해버렸다. 순간, 뜨거운 증기 속으로 정적이 흘렀다.
소설가 김진명은 '존재란 시간이 쌓여 형성되는 것'이라 말했다. 그 말처럼 나라는 인간도 부모의 결핍과 역사를 이어받았다. 그리고 내 삶에서도 또 다른 형태의 결핍을 겪으며 살아간다.
하지만 결핍을 인식하는 순간, 우리는 다른 문장을 쓸 수 있다.
엄마의 문장이 생존의 언어였다면, 나는 회복의 언어로 내 아이에게 말을 걸고 싶다.
요즘 읽고 있는 '결핍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라는 책은 말한다. 결핍은 집중을 낳지만 동시에 시야를 좁힌다고 말이다. 부족하지 않기 위해 애쓰다 보면, 삶은 어느새 '방어'의 자세가 되어버린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늘 조심스럽고, 실패가 두려웠다. 결핍은 나를 부지런하게 만들었지만, 그 부지런함이 나를 얽매기도 했다. 이제야 알겠다. 풍요란 돈의 크기가 아니라 마음의 넓이였다.
실패해도 괜찮다고 믿는 여유, 그리고 언제든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의 대역폭'
그것이야말로 진짜 풍요의 감각이다.
아침에 종종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준다. 요즘은 재택하는 날이 생겨 여유롭게 걸을 수 있다. 이 시간은 언제나 평화롭다. 아이의 작은 손을 잡고 오솔길을 걸으면, 아이는 재잘거리며 웃는다. 그때 찡끗 웃는 표정이 내 하루의 시작을 밝혀준다.
어젯밤, 아이가 말했다. "엄마가 나랑 같이 걸어줘서, 나 예쁘다고 해줘서 고마워. 그게 너무 좋았어"
그 말에 가슴이 저릿해진다. 내 어린 시절엔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안정감과 따뜻함이었다.
나는 아이에게 정서적 풍요를 심어주고 싶다.
때로는 좋은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며, 세상을 '부족함'이 아니라 '가능성'으로 느끼게 해주고 싶다. 세상은 안전한 곳이며, 탐색해 볼 만한 곳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을 물려주고 싶다.
그래 이 모든 건 어쩌면 내가 받지 못했던 사랑의 보상일지도 모른다.
나는 결핍의 딸이었지만, 이제는 풍요의 엄마가 되어 새로운 서사를 쓰고 있다.
삶의 중심에 따뜻한 기억과 보호받는 감각이 쌓여 아이가 여유라는 여백을 품고 살아가길 바란다.
그때 비로소 결핍의 잔해 속에서, 조용하지만 단단한 풍요의 이야기가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