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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로서의 우리

이제 그냥 살자

by 따뜻한 불꽃 소예

오랜 고심 끝에 남편은 또 한 번 사업체를 정리했다.

그가 아프고 난 뒤 다시 일을 시작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나는 너무 힘들었다. 혹시라도 무리가 될까 늘 마음이 곤두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차저차 정리해야 하는 시점이 결국 와버렸다. 그의 볼록해진 배를 바라보며,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모험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남편은 종종 말했다.

"내가 너희에게 짐만 되는 건 아닐까? 일을 하지 않으면 나는 왜 살아야 하는 거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는 평생 '의무 속에서' 살아온 사람이다.

아들로서, 장남으로서,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해야 하고, 부양해야 하고, 노력해야만 존재 가치가 있는 줄 아는 삶.

공부를 잘해야 아버지의 체면을 세울 수 있고, 자격증을 따야 부모에게 부끄럽지 않고, 돈을 벌어야 사랑받을 수 있다고 믿어온 삶.

나는 그에게 한 번도 그런 부담을 준 적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잘 모르겠다. 어쩌면 나도 모르게 그 무게를 보탰을지도.


그래서 나는 조심스레 말했다.

"아니야. 당신은 존재 자체로 우리에게 울타리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 그냥 우리 옆에 있어주기만 해도 돼."


점심시간 산책길에서 그는 말했다.

"딱 몇 초 아무 생각도 안 드는데... 그게 참 좋더라."

그 말을 하는 그의 표정은 오랜만에 잔잔했다.

"이 공기를 맡을 수 있다는 게 좋다"고도했다.


문득 생각했다.

우리는 왜 관계 속에서 '기능'과 '성과'를 유지해야만 존재 가치를 인정받는 걸까?

인간의 존재는 도대체 무엇으로 증명되는 걸까?


나는 한때 아버지가 미웠다.

집에만 있는 아버지가 부끄러웠고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아버지가 집에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나는 안정적인 학창 시절을 보냈다는 것을.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존재의 감각이 얼마나 큰 혜택이었는지.

그리고 부모가 있다는 건- 부끄럽지만- 누군가를 탓할 대상이 있다는 점에서도 인간에게 이상한 안전망이 되기도 한다. "다 아빠 때문이야.", "엄마 때문이야"라는 익숙한 변명 뒤에는 사실, 그들이 존재한다는 안도감이 숨어 있다.


그래서 그냥 살자. 그냥 살아간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


내일이 되면 어떤 마음이 들지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남편이 그저 내 옆에 '있어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는 그가 부디 존재 자체로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길 바란다.

그렇게, 우리가 서로의 삶에 비어 있는 자리를 가만히 채우며 그냥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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