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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민 Dec 06. 2023

오래 기억될 ‘2023 올해의 작품’

내 멋대로 선정한 올해의 작품 7선

작년 이맘때 내 멋대로 ‘올해의 작품’을 선정해 짧은 글을 적었다. 형식(장르)과 관계없이 열 편의 작품을 말해봤는데, 올해는 반대로 시도해 보았다. 시, 소설, 에세이에서 각 두 편씩 선정했고 한 편의 영화를 더했다. 올해 출간됐거나 개봉한 작품 중 이 지면을 통해 소개했으며 지금도 기억나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은 일곱 작품을 추려 지금 공개하려고 한다. 아시다시피 선정 여부와 작품의 우열은 관계가 없다. 그런 것이라면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 없는 작품은 훌륭하지 않아서가 아니고, 내가 스스로 그렇게 느끼지 못해서도 아니다. 다만 나의 기억이 미천한 탓이다. 이 글엔 끝인사가 없으니 미리 인사도 드린다. 진정한 ‘올해의 작품’은 선생님께서 그렇게 느낀 바로 그 작품일 것입니다. 누가 뭐라 하건.




         

없음의 대명사 

오은, 문학과지성사


수많은 작품 중 하나를 꼽기는 항상 어렵지만, 시는 유독 그렇다. 왜 그런가. 인생의 순간이 하나가 아니고 우리의 허기에 끝이 없듯 사는 동안 매번 다른 시가 다가오기 때문이리라. 그러니까 한 편의 시 또는 시집의 이름을 여기에 적어 둔다는 건 언젠가 먹은 한 끼 메뉴를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시간이 지나고도 유난히 생각나는 메뉴는 있는 법. 올해는 이 시집이 내게 그랬다. 읽고서 덮었다고, 그 시간은 지나가고 여기 없다고 생각할 때마다 시는 다가와 명료하게 말했다. “없음은 있었음을 끊임없이 두드릴 것이다. (···)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야. (···) 열어도 닫아도. 열지 않아도. 닫지 못해서. / 있다.” (〈그것들〉 중에서) 그러므로 믿어 본다. 없어도 있다고.

         



저는 많이 보고 있어요 

안미옥, 문학동네


집을 생각하거나 무언가를 볼 때마다 이 시집이 떠올랐다. 가보지 못한 곳에 가고, 해보지 않은 일을 할 때도. 어렴풋이 알던 것을 실제로 겪을 때는 비로소 다음의 시구를 깨달았다. “구체를 경험한다는 건 / 그럴듯한 것과 멀어지는 일”(〈주택 수리〉 중에서). 사람과 세상을 허투루 대할 적마다 들려온 목소리도 있다. “소중하게 다뤄야 해. 무엇을 소중하게 다뤄야 하는 걸까. 잠드는 일과 깨어나는 일 사이에서, 아니 깨어나는 일과 잠드는 일 사이에서. 그때 만난 모든 사람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구별해볼 수 있다. 한 뼘의 사랑과 한 발자국의 위로가 얼마나 커다랗고 깊은지.”(〈썬캐처〉 중에서) 그것을 가장 잘 알고 잘하는 건 아마 시인들일 것이다. 세상은 아직, 다행이다. 사랑, 하는 시인들이 어딘가에 살아서.




              

최소한의 최선 

문진영, 문학동네


올해도 문단을 대표하거나 대중에게 인정받는 소설가들의 작품이 여럿 출간됐다. 단 한 사람 한 사람의 독자가 각각의 계절을 지나는 데 의미가 되었을 그 이야기들이 훌륭한 소설임을 의심하지 않는데, 여기서는 처음 밝힌 대로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은 소설을 뽑았다. 그러니까 나의 사고와 인식의 구조를 조금이라도 더 움직인 쪽으로. 이대로의 내 삶도 긍정할 수 있게 해준 작품으로. 끝까지 고민한 두 권이 같은 소설가의 책이었다. 해서 더 많은 이야기가 담긴 책을 선정했다. 이 소설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을 떠올리면 각별한 기분이 든다. 연말을 핑계로 한 번쯤 만나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물론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기다린들 “안와는 안 와.” (〈어느 늦지 않은 어떤 때〉에서는 ‘안와’가 온다.)

          



두고 온 여름 

성해나, 창비


겨울과 여름이 떨어져 있다는 것은 인간에게 다행한 일이리라. 여름을 버텨낼 땐 겨울에 잃은 것을 추억하고, 겨울을 견딜 때는 여름에 두고 온 것을 돌아볼 수 있을 테니까. 지금은 여름을 생각할 때이다. 지난여름에도 저마다 무언가를 두고 왔을 것이다. 매듭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어떤 매듭이 좋은 매듭인지 알지 못한다. 다만 최선에 가까운 매듭에 관해서라면 조금 말해볼 수 있다. 잘 두고 가려는 마음으로 안녕을 바라는 것. 그렇게 나의 내력이 되게 하는 것. 이것이 내가 이 소설을 통해 배운 최선의 매듭이다. 작별은 반복될 것이다. 이 책에 관한 기억도 그럴 것 같다. 마침표를 찍고 보니 전부 한국 소설이다. 외국 소설도 하나쯤 말해도 된다면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허진 역, 다산책방)를 꼽고 싶다.




               

당신이 좋아지면, 밤이 깊어지면

안희연, 난다


어떤 책은 읽을 때 가장 좋고, 어떤 책은 덮을 때 가장 좋다. 또 어떤 책은 책 밖에서 조우할 때 가장 좋다. 안희연 시인의 쓴 이 책은 읽거나 덮고서도 좋았지만, 책에 담긴 무언가를 생활에서 만났을 때 가장 좋았다. 겨울이 오니 더 자주 그런다. ‘귤’을 볼 때나 ‘등뼈’ 또는 ‘명랑’이라는 단어를 마주할 때마다 누군가의 기억 속 작은 목마를 바라보는 기분이 든다. 그 순간 혼자일 수 없게 된다. 반갑고 애틋한 목소리가 들려서. 책을 덮고도 오래간 그 목소리가 들린다면, 스스로 의식하지 못했더라도 깊게 경청한 순간이 있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경청은 단지 발화의 반대말이 아니다. 대화의 한 축이다. 나는 책의 화자와 나눈 어느 봄날의 대화를 기억한다. 앞으로도 그러리라. 꽤 오래. 밤이 깊어질 때마다.

       



우리는 조금씩 자란다 

김달님, 미디어창비


이 책을 읽고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글과 말로 추천했다. 그러기를 여러 번. 무언가를 되풀이하는 기분이 들 만도 한데, 늘 새롭다. 매번 짜릿하다. 할 때마다 다른 이유로 좋음을 말할 수 있는 책이라서 그렇다. 오늘은 이렇게 해보자. 인간이 글로써 타인을 존중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이 책은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세상에 나온 것 같다. 읽는 이나 글에 담긴 인물이나 때로 글쓴이 자신마저도 보살핀다. 오직, 문장으로. 더해 ‘다음’의 일이 쓰여 있기도 하다. 우리 중 누구도 예외 없이 겪었거나 겪게 될 소중한 사람과의 작별, 그 시간을 통과한 저자는 그 순간의 장면과 마음을 우리 앞에 내놓았다. 예외 없는 사려 깊음과 사랑으로. 끌어안고 울어도 좋을 슬픔으로. 나는 세상에 그런 게 있다는 걸 저자에게 또 배웠다. 




             

다음 소희

정주리 감독


올해는 영화나 시리즈를 자주 접하지 못했다. 다만 안도한다. 이 영화를 놓치지 않고 보았다는 점에서. 지난봄, 이 영화에 기대 쓴 글에 이렇게 적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한 그 세계의 다음은 없다.” 그러면서 “유진이 그랬듯 그처럼 공감하는 사람의 마음은 힘겹다. 유진도 힘겨울 때 유진이 필요하다. (···) 나보다 먼저 유진이 된 이들을 위해서라도. 비정한 이 세상에 다음이 존재하려면 우리는 모두 ‘다음 유진’이 되어야만 하리라”하고 덧붙였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아직 세상을 모르고 여전히 낯선 일투성이지만, 포기를 선택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려면 기억해야지. 소희를, 유진을 그리고 지켜야 할 것들을. 무력해 보이더라도 희망을 남겨 본다. 다음 해에는 모두가 일터에서 무사하기를. 그런, 세상이기를.



(2023. 12. 06.)

(@dltoqur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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