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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지로움 Oct 08. 2021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다. 이젠 내가 부모다.

자식이라는 보스몹과 전쟁하면서 든 생각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는가?


나는 이 말이 참 좋았다. 평생을 엄마를 이기면서 이 말을 이용해 내 마음에 정당성을 부여하며 살아왔다. ‘엄마는 결국 내 뜻을 따라줄 거야!’라는 마음을 품고 늘 엄마를 이기며 사는 효년이었다. 그래서 내가 지금 벌을 받기 시작한 것 같다. 겨우 100일 남짓 살아온 내 자식이 나를 이겨먹기 시작했다. 분명 100일 전까지는 저 말이 좋았는데, 이젠 저 말이 참 무섭게 느껴진다. 나의 남은 인생은 늘 아들놈에게 지면서 살겠구나.. 하며 반성을 시간을 걷는다. (엄마 미안해.. 그래도 앞으로도 나한테 져줘.. 사랑해)


전세가 역전된 삶을 살게 된 지 겨우 100일 남짓 되었지만 이 생활에 꽤나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아기가 집의 상전이 되어 수발을 드는 삶이 익숙해져 갈 무렵 고난이 찾아왔다. 또래보다 훨씬 이른 이앓이가 시작된 것이다. 다른 아기들은 주로 6개월 무렵 시작되는 이앓이가 우리 집 상전님께는 벌써 시작되는 모양이다. 며칠 전부터 입술과 혓바닥을 이용한 마찰음 같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쨥쨥과 턉턉의 중간 정도 소리가 난다.) 침도 줄줄 흘리고 칭얼거림이 아주 많이 늘었다. 옹알이가 시작된지는 꽤 되었는데, 이렇게 하루 종일 찡얼거리는 옹알이를 한적은 없었다. 울기 직전의 찡얼거리는 소리가 하루 종일 이어졌다. 가끔 방긋하며 웃어주는 시간을 선물하기는 한다. 정말 신기하게도 엄마가 넉다운 되지 않을 정도로 완급을 조절하며 당근과 채찍을 반복하는 하루를 보내게 해주는 상전님이시다. 이렇게 며칠을 보내니 오늘 아침에는 번아웃이라는 말도 우습게 느껴질 정도로 ‘도망가고 싶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아기는 바운서에 앉아 한껏 고조된 목소리로 옹알이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소리를 못 들은 척 외면하며 아기방에 숨어 머리를 쥐어뜯고 얼굴을 가리고 숨어있었다. 아기와 대치하는 상황이 길어지자 재택근무 중이었던 남편이 거실로 나와 아기를 안아 올리는 소리가 방으로 새어 들어왔다. 그리곤 내가 숨어있던 아기방으로 들어와 내 상태를 확인했다. 놀란 눈치였다. 잠시 고민을 하더니 반차를 낼 테니 오후엔 아기를 시댁에 맡기고 카페라도 다녀오자고 제안을 했다. 이 순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너무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떠다니느라 어느 하나도 골라잡아 말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나약한 엄마인가?’, ‘나이스’, ‘도망가고 싶다는 내 마음의 말이 밖에까지 들렸나?’, ‘나는 왜 이것도 못 참는 엄마인 걸까?’, ‘나는 왜 강하지 못할까’, ‘거절해야 하나?’, ‘아기 엄마가 아기를 두고 어딜 간다는 말이야’ 등등 내 머리에는 수많은 자아가 커다란 회의실에 둘러앉아 끊임없이 의견을 쏟아냈다. 그리고 내 마음은 눈물을 쏟아냈다. 


거절을 할 수가 없었다. 머리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뒤로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아기는 태어난 뒤 1년 동안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폭발적인 성장을 한다. 모든 감각이 깨어나고, 자아가 생겨난다. 동시에 몸이 발달하며 각기 쓰임에 맞는 기능을 수행하기 시작한다. 아기는 내적으로, 외적으로 비약적인 성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흔하게 말하는 원더윅스를 지나고 성장통을 겪으며 첫 번째 생일을 향해 달려간다. 물론 아기의 첫해가 지나가도 원더윅스가 조금 더 이어지기는 하지만 의사표현을 할 수 있는 시기가 되기 때문에 첫해와는 조금 다르다. 그 성장통을 온전하게 받아들여 성장해야 하는 아기의 힘듦을 대신 해줄 수 없기에 아기를 공감하며 함께 힘든 시기를 보내주는게 부모다.


아기를 시댁에 맡기고 나오는 그 길이 얼마나 좋던지, 두 눈을 감고 차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감상했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없는 그 고요함, 음악소리가 온전하게 들리는 그 공간, 공기, 창밖의 시원한 바람, 모든 게 완벽했다. 뒷좌석의 카시트의 존재가 무색하게도 나는 마치 아기가 없는 사람처럼 홀가분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죄책감 같은 것이 밀려왔다. ‘나, 엄마 맞아? 왜 아기가 없는 시간이 좋지?’


육아가 힘들다는 이야기는 정말 많이 들었지만, 늘 공감하긴 힘들었다. 주변에서 육아를 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을뿐더러, 있다한들 자세하게 들여다보기도 어려웠다. 핵가족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정말로 육아에 대한 기초지식이 바닥인 상태인 것이다. 내가 육아를 하며 가장 의구심이 들고 듣기 싫은 이야기는 ‘아기가 순하다’라는 말이다. 요즘 나에겐 아기가 우는 모습만 보인다. 분명 아기는 웃기도 하고, 잠도 잔다. 그럼에도 나는 아기가 하루 종일 우는 것처럼 느껴진다. 퇴근이 없는 이 육아라는 직업을 갖게 된 엄마에게 젖먹이 아기란 종일 스무고개를 시키는 무서운 보스다. 드디어 보스의 마음을 다 알아차린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늘 새로운 과제를 던져주는 깨기 힘든 보스몹 같은 존재가 바로 아기이다.



그래서 나는 SNS 내가 육아로 힘들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올린다. 혼자만 힘든 하루를 보냈다고 생각하고 넘기기엔 어딘가 나와 같은 하루를 보낸 사람이 있을 거라 생각하기에 계속 올린다. 내 힘든 마음을 올리며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든다. ‘사람들이 나를 징징거리는 나약한 엄마로 보면 어쩌지?, 내가 아기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아닐까?’ 그럼에도 올린다. 오늘도  번이나의  힘든 마음을 귀여운 사진과, 재미있는 동영상과 함께 업로드했다. 예쁜  예쁜 거고 힘든  힘든 건데 그냥  얘기하고 싶었다. 누구라도 보고  새끼 이쁜  봐주길, 누구라도 읽고  마음 힘든  공감해주길 바라며.



정말 다행인  나에게는 듬직한 내편 남편님이 계시다는 것이다. 남편이라고 하면 남의  같으니  글에서만은 내편인 편이라고 칭하겠다. 우리 부부는 코로나의 수혜를 보고 있다. 출근을 해야 하는 남편은 4단계로 격상된 코로나 거리두기 덕분에 재택근무를 하고 있다. 남편에게 주어졌던 10일의 출산 휴가가 끝난  코로나는 더욱 무서운 확산세를 보였고, 회사에서는 재택근무라는 감사한 배려를 해주었다. 그래서 냄편은 아기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거의 모든 육아의 현장을 직접 경험하고 있다. 물론 일이 많아 근무시간에는 거의 책상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아기가 하루에 얼마나 우는지, 잠은 자는지,  먹는지 등을 내가 따로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말인즉슨 육아를 하고 있는 내가 얼마나 힘들지도 아주 잘 이해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100일의 기적을 기다리는  험난한 시기에 서로의 마음을 할퀴지 않고 슬기롭게 극복해나가고 있다.


오늘같이 내가 육아에 넉다운 되어가는 상황도 구구절절 말하지 않아도 남편이 이미 눈치채고 적절한 조치를 취해줄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 인가 싶다. 


 예시로, 친오빠의 상황을 가져와보면 오빠는 육아의 힘듦을  모른다. 여기까지만 읽는다면 혹자는 말할 것이다. ‘ 오빠분이  그렇네요.’ 그렇다, 나도 오빠에게  잔소리한다. ‘오빤  너무 몰라!! 언니한테 정말 잘해야 !’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된다. 오빠는 조카가 태어난  30 만에 해외출장을 가야 했고 100일을 일주일 앞두고 귀국했다. 오빠는 산후조리원의 천국만 맛보고 백일의 기적이 찾아온 후에야 육아를 경험했으므로  시기가 얼마나 힘든지 모르는  당연했다. 그리곤 조카의 돌잔치가 끝나기 무섭게  해외 출장길에 올랐다가 6개월을 타국에서 보낸 뒤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무렵 겨우 아장거리던 조카는 이제 트램펄린에서도   있는 여유가 생겼고, 거의 모든 말을 알아듣고 간단한 의사표현은 말로  정도로 성장했다.  과정에서 새언니가 겪은 모든 시간은 오빠에게는 화면 너머로 보는 시간이었고, 사진과 영상으로 남은 가장 예쁘고 사랑스러운 모습들만이 가득한 육아였다. 육아 매운맛이란 단어는 오빠에게는 남의 일이었다.


내 핏줄인 형제가 이 모양이다. 최악의 경우처럼 여겨지는 육아 케이스이다. 아빠는 아기가 거저 컸는 줄 아는 케이스. 다행히 오빠가 그렇게 안하무인은 아닌지라 언니에게 충분한 보상을 하는 것 같아 마음이 놓이긴 했다. 하지만 어쩌면 이 스토리가 나에게도 적용되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보상은 무슨! 공감이 필요하다고!’라는 생각이 더 앞선다.

만약 냄편님의 재택근무가 없었더라면? 밤새 2,3번 깨어나는 아기를 달래고, 이른 새벽부터 시작되는 육아의 전쟁터에서 전우가 잠시 퇴장하는 그 상황을 맞이했을 것이다. 전장의 수많은 총알은 모두 내 몸통에 꽂히며 무릎이 땅에 닿고 정신을 잃을 때쯤 등장하는 전우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우리 아기 잘 놀았어? 잘 자네~ 너무 예쁘다.’, ‘힘들었지? 나도 오늘 너무 힘들더라, 나 씻을게’.


힘들었지?라는 말로는 위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3개월 전까지 사회의 구성원이었던 사람으로서 회사에 가서 일하는 것이 훨씬 쉽다고, 차라리 애를 네가 보는 게 어떻겠냐고, 돈은 내가 벌겠다고. 그렇게 퉁명스럽게, 날이 선채로 남편을 할퀴고 등지고 잠들었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수많은 아빠들이 육아를 전담하는 엄마의 짜증을 충분하게 이해하지 못할 것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속 시원하게 마음을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았다. 지금 아기가 있다면 아내에게 감사함의 마음을 전하고, 아기가 없다면 아내가 맞이할 상황에 대해 최대한 이해하기 위한 준비를 했으면 좋겠다.


우리가 만든 아기를 함께 키우고, 함께 책임지면 좋겠다. 그리고 스스로의 삶을 뒤로 미루고 육아를 하는 엄마의 마음을 조금 더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누누이 이야기하지만, 정말로 밖에서 일하는 게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는 것보다 백배는 쉽다.


이 세상에서 첫해를 보내는 아기라는 보스몹을 이기기위해 부부는 합심해야한다.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하고 복돋아야한다. 우리는 부모가 되었기에 자식에게 평생을 지며 살아가야 한다. 다만 그 길을 함께 걷는다면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그래서 우린 서로를 더욱 잘 챙겨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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