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언저리를 돌이켜보면 방황의 연속이었다. 또래들과 함께 창업한 협동조합은 방향을 상실한 채 가라앉고 있었다. 당시에는 침몰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흘러가는 대로 놓아두면 새로운 육지에 다다를 수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희망만 무성했다. 그저 저항할 수 없는 물결에 몸을 맡겼다.
잠 못 드는 밤이 계속됐다. 도저히 서른아홉의 나로서는 답을 찾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누워있어도 머리는 쉬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물음으로 시작해 여러 가지 시나리오가 연관성도 없이 떠올라 스스로를 괴롭혔다. 망념과 망상에 사로잡혀 눈만 감은 채 뒤척였다.
그런 밤이면 무작정 책을 읽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끊어야 했다. 일단 끝없이 가지를 뻗으며 잠을 방해하는 생각에서 빠져나오는 게 급선무였다. 다행히 타인(저자)의 생각을 무심코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얽혀 있던 생각의 실타래가 끊어졌다. 그렇다고 답을 찾은 건 아니었다. 다만 혼자만의 생각이 파놓은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을 터득했을 뿐이었다. 그때부터 독서를 탈출구로 삼았다. 새벽에 깨서 이런저런 고민에 다시 잠들지 못하면, 다시 식탁에 앉아 해가 뜰 때까지 책을 읽었다.
독서를 하다 보면 책이 말을 걸어올 때가 있다. 책은 "너의 생각은 어떠냐"고 나에게 물었다. 저자의 생각과 내 생각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대화가 이뤄졌다. 덕분에 독서는 생각의 굴레에 묶여 있는 나를 풀어주었다. 언젠가 책을 읽다가 ‘삶에서 중요성을 낮춰라. 중요성은 저항과 장애를 낳는다’는 내용과 마주쳤다. (요즘에도 삶이 이리저리 엉키면 이 문구를 떠올리는데, 그때마다 내가 어디에 중요성을 높이고 있는지 살펴본다.)
처음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스스로를 동기부여하기 위해 중요성을 높여야 최선을 다할 수 있고, 최선을 다해야 원하는 목표를 성취할 수 있다고 믿었다. 마흔이 될 때까지 그렇게 살아왔다. 하지만 책은 "중요성은 몰입을 방해할 뿐"이라고 충고했다.
비로소 온갖 난관에 가로막혔던 당시 상황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 조직을 잘 이끌어서 직원협동조합의 성공사례로 만들어야 해. 그것이 내 인생의 목표야. 실패한다면 내 삶은 방향을 잃고 말 거야.’ 협동조합이 잘 될수록 중요성은 더욱 높아졌다. 중요성이 커질수록 내 마음과 행동은 경직됐다. 경직된 마음 때문에 중요한 목표를 방해하는 상황이 벌어지면 올바르게 대응하지 못했다.
삶은 그 중요성을 내려놓으라고 종용하는 것 같았다. 협동조합을 주식회사로 바꾸고 회사를 빠르게 성장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동료에게 대표직을 넘겼다. 함께했던 동료들 중 다수가 그 방향을 택했다. 나는 창업을 준비할 때부터 4년간 애정을 듬뿍 쏟았던 회사를 나왔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방황은 공부하기 좋은 교재였다. 기계적으로 책만 읽으면 텍스트 이상의 의미를 찾기 힘들지만, 방황했던 경험이 책을 만나면 삶을 이해하는 지혜가 생긴다. 단순한 정보나 지식을 삶의 지혜로 바꾸는 것은, 불혹의 나이에 질풍노도의 시절을 보냈던 ‘사십춘기’의 경험이었다. 방황이 짙어질수록 공부의 맛은 깊어졌다.
요즘에는 공부에 푹 빠져있다. 마흔둘이 된 올해부터 대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는데, 살면서 이렇게 공부가 재미있었던 적은 없었다. 매주 제출해야 하는 페이퍼와 발제자료를 작성하고 싶어서, 새벽에 번쩍 눈이 뜨일 정도다. 전날 밤까지 쓰다가 막힌 글을 어떻게 이어갈지 아이디어가 떠올라, 까먹기 전에 서둘러 작업실로 출근한다. 대학원 수업시간에 글을 발표할 때면 설레서 두근두근 가슴이 뛴다.
‘마을미디어’를 소재로 논문을 준비하고 있는데, 지역신문 기자를 하면서 가졌던 고민, 신문사를 나와 마을콘텐츠를 만들며 쌓았던 경험을 반추하며 의미를 찾는 작업이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이 공부를 하다 보니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 지도 알게 됐다.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에서 재미를 얻고, 미래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공부가 어찌 즐겁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물론 매주 대학원 수업 준비를 하고 저녁시간에 홍성에서 대전까지 오가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공부와 일, 강의까지 병행하는 것도 만만치 않다. 해야 할 업무 때문에 대학원 수업을 준비할 시간이 부족한 것이 짜증 날 정도로 공부가 재밌다.
마흔이 넘어서야 공부의 맛을 제대로 알게 된 것 같다. 초등학교 때에는 부모님께 칭찬받고 싶어서 공부했고, 중학교부터는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좋은 직장을 얻어서 가난한 부모님을 행복하게 해 드려야겠다는 생각으로 공부했다. 참, 착한 장남이었다. 하지만 착한 장남, 본인은 정작 행복하지 않았다.
나는 요즘 이기적으로 공부한다. 타인을 위한 공부는 지겹다. 내게 필요 없는 공부는 하지 않는 편이다. 미래를 위한 수단으로 공부를 대하지도 않는다. 좋은 직업과 더 나은 소득을 위한 공부는 어릴 때 지긋지긋하게 하지 않았던가? 미래에 저당 잡혀 공부하는 것은 아닌지, 그 자체로 즐거운지 늘 살핀다.
책을 통해 내 삶을 비춰보기 시작하면서 독서가 비로소 공부로 이어졌다. 독서는 역사, 철학, 종교, 과학을 넘나들었다. 내 삶을 이해하기 위한 ‘이기적인 공부’는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공부로 확장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공부도 결국 나로부터 출발해야 행복하다.
나를 위한 공부는 삶을 보다 깊게 이해하게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다. 그럴 때 공부는 노는 것보다 재밌다.
* 본문에 소개한 '삶에서 중요성을 낮춰라. 중요성은 저항과 장애를 낳는다'라는 내용은, 바딤젤란드가 쓴 <리얼리티 트랜서핑1(정신세계사)>에서 읽은 기억이 있는데, 정확한 문구는 생각나지 않는다. 러시아 양자물리학자 출신인 저자가 경험하고 이해한 세계를 설명한 신비주의에 가까운 책이다. 이 책의 내용은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내는 것(일체유심조)’이라는 불교의 사상과도 맞닿아 있다고 나는 이해한다. ‘스스로 중요성을 높이면, 그것을 방해하는 상황이 따르기 마련’이라는 저자의 주장은 얼핏 이성적으로 살펴보면 맞지 않는 것 같지만, 불교적으로 해석하면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