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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명진 Jul 18. 2022

여행, 인생의 변곡점

사십춘기에 얻은 것들(3)

나는 20대 초반까지만 해도 비행기 한 번 타보지 못한 촌놈이었다. 요즘이야 어릴 때부터 제주도는 물론 해외로 가족여행을 가는 경우도 있지만, 그때는 제주도 여행도 있는 집안 자식 이야기였다. 대학생이 되어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으로 배낭을 메고 해외여행을 떠나는 게 로망이었던 시절이었다. 해외여행을 가기 위해, 군대를 ‘다니는’ 동안 저녁마다 과외를 하며 돈을 모았다. 나는 집에서 군대로 출퇴근하는 상근예비역, 그러니까 옛말로 '방위'였다. 가난한 집에 태어났지만 운은 좋았다.


난생처음 비행기를 타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지루할 정도로 천천히 움직이던 비행기가 굉음을 내며 활주로를 내달리다가 이윽고 땅을 벗어날 때, 20년 넘게 내 발목에 묶여 있던 사슬을 끊고 떠오르는 느낌이었다. 살다 보면 일상이 끌어당기는 중력을 거슬러야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이륙하는 비행기처럼 익숙했던 일상을 박차고 떠나야 한다.


첫 해외여행을 떠난 것은 2003년 월드컵의 열기가 식고 이라크전쟁이 발발해 국제정세가 혼란스러웠던 시기였다. 고향에서 함께 풍물패 활동을 하던 친구, 누나 4명이서 꽹과리, 장구, 북, 징을 메고 함께 비행기를 탔다. 우린 한 달간 유럽 여러나라를 돌며 길거리에서 ‘PEACE OF COREA’라고 적힌 대형 태극기를 바닥에 깔고 사물놀이 공연을 했다. 현지에서 여행기를 써서 지역신문에 연재해 원고료라는 것도 처음 받아봤다.

‘버스킹’이라는 단어도 생소했을 때였다. 요즘에는 K-POP에, 비보이까지 한류 열풍 속에서 공연하며 여행하는 한국 젊은이들이 많아졌다지만, 당시만 해도 우리 팀의 길거리 사물놀이 공연은 새로운 도전이었다. 현지 한국 배낭여행객 사이에 나름 소문이 퍼져서 우리 공연을 보기 위해 여행 경로를 바꾸는 사람도 있었다.


처음은 늘 그렇듯이 설레고 두렵다. 파리에서 첫 공연을 위해 공연 장소를 물색하다가 사람이 많이 모인 광장에서 사물놀이 악기를 꺼내기만 하면 프랑스 경찰에게 쫓겨났다. 이대로 공연 한번 못하고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공원 한 켠에서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춤을 추는 흑인 형님들 옆에서 연습 삼아 첫 공연을 했다. 처음에는 지켜보는 사람이 거의 없었지만, 사물놀이라는 생소한 소리와 가락에 파리 시민들이 하나 둘 몰려들어 우리를 에워쌌다. 공연이 한창 이어지고 있을 때 경찰이 왔는데, 구경하던 파리 시민들이 경찰을 설득해 돌려보냈다.


우여곡절 끝에 첫 공연을 성공한 이후, 우리는 더욱 대담해졌다. 파업을 지지하는 대학생 시위대에 섞여 풍물을 치며 파리 도로를 행진하고, 이탈리아 로마에서 경찰이 순찰을 도는 패턴을 미리 파악해 광장에서 치고 빠지며 게릴라 공연을 하기도 했다. 하이델베르크에서는 1970년대 독일에 간호사로 파견됐다가 현지에 남아 한식식당을 운영하는 한 교포의 요청으로 지신밟기(정월대보름날 액운을 막기 위해 집안을 돌며 풍물을 치는 우리나라 풍습)를 하기도 했다. 우리는 라면 몇 개 얻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아주머니가 주신 봉투에는 500유로, 그러니까 우리나라 돈으로 60만 원이 넘는 돈이 들어 있었다. 여행경비가 부족했던 우리는 마지막 여행지인 이탈리아에서 며칠 노숙을 할 예정이었으나, 덕분에 편안하게 잘 먹고 잘 잤다.

여행은 의도치 않게 삶을 변화시킨다. 모험을 동반한 여행은 인간을 성숙하게 만든다. 한 달간 여행을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자, 부모님이 바라는 대로 착실히 살던 아이는 달라져 있었다. 내면에는 자존감이 자리 잡았다. 스스로 삶의 내용과 방향을 결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여행을 다녀온 후로 부모님이 그토록 싫어하는 학생회 활동을 하고, 공무원이 되길 바라는 바람을 무시하고 대안언론에 취직해 쥐꼬리만 한 월급을 받으며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아버지는 내가 대학에 입학할 때부터 ‘학생운동을 하면 부자의 연을 끊겠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씀하시곤 하셨다. 학생회 활동은 들키지 않아 그냥 넘어갔지만, 몇 년 후 부모님의 뜻을 거역하며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귀촌했다가 한동안 아버지는 정말로 부자의 연을 끊으셨다. 시간이 흐른 뒤, 결국 내가 살고 있는 시골집에 오셔서 손자들과 행복하게 지내고 있는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신 뒤에야 귀촌을 허락하셨다.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는 법이다.


없는 집 살림에 장남만큼은 제대로 키우기 위해 고등학교부터 유학을 보내고, 서울에 있는 사립대를 졸업할 때까지 뒷바라지해주신 부모님의 고생과 감사함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부모님 원하는 대로 산다고 내가 행복해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내가 스스로 행복한 삶을 살아야 부모님도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지만, 나도 아빠가 되고 나니 자식에게 뭔가를 바라고 기대하는 마음이 불쑥불쑥 올라온다.


삶의 방향이 크게 변할 때마다 여행을 떠났다. 서른 살 여름, 홍성으로 귀촌을 결심한 곳도 폭우가 쏟아지는 지리산이었다. 산을 오르기 전에는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하산할 때는 생각이 명확해졌다. 2박 3일간 지리산 능선을 걷다 보니 온갖 걱정과 잡념이 사라졌다. 그 이후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있거나 심란할 때마다 지리산을 종주했다. 서른다섯 살 10년간 기자생활을 마치고 신문사를 그만두겠다는 결심을 할 때도 지리산 위에 있었고, 창업을 앞두고 두려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도 지리산 능선을 탔다. 처음으로 창업한 협동조합을 나올 무렵에는 보령 앞바다 섬마을을 찾아다녔다. 두번째 창업 이후에도 크고 작은 여행이 이어졌다.


마흔에 가까워지면서 혼자 여행을 떠나는 일이 잦았다. 여럿이 어울리는 여행이 즐겁기는 하지만, 삶의 돌파구를 찾아야 할 때는 혼자 떠났다. 새로운 공간에서 오롯이 나 자신에 집중하면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한다. 여행을 통해 삶의 방향이 달라지는 지점, 변곡점을 찍는다. 그럴 때마다 또 다른 인생이 펼쳐졌다. 삶의 굴곡, 그 마디마디마다 여행은 늘 크고 작은 답을 줬다.


* 사진 출처 : Photo by John McArthur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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